REPO & DOCU 희망지기
농촌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다
청진기(청소년 진로 찾기 프로그램)

서울 마포의 세이브더칠드런 사무실에 경상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 나에게 맞는 진로를 찾기 위해 저 멀리 경남 합천에서 올라온 농촌 청소년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먼 여정을 떠나왔는지 속 얘기를 들어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오정훈

“인권을 보호하려면 어디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가까이에 있는 현실을 돌아볼까요?”
열댓 명 쯤 되는 중학생들이 인권수업을 듣는데 열중이다. 경남 합천 지역아동센터에서 ‘청진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박3일간 서울 캠프를 온 아이들이다. 원래 27명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구제역 파동 때문에 절반 정도로 확 줄어든 인원이었다. 그러나 힘겨운 농촌 현실을 딛고 더 넓은 세계로 용기있는 발걸음을 디딘 아이들의 표정은 희망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피부로 느끼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이 아이들이 ‘진로찾기’라는 주제로 모임을 가진 것은 벌써 제작년부터다. 경북 지역의 대학 탐방도 다니고, 특강도 들었다. 그 중에서도 방학 캠프는 가장 기대되는 이벤트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부산으로 2박3일 캠프를 다녀왔다. 이번에는 서울이다. 소위 ‘지하철도 못타는 촌놈’이었지만 몇 번 서울을 오가면서 이제는 제법 노선도 읽을 줄 알게 되었단다.
“피곤해도 재미있어 해요.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도 가보고, 남산타워에도 가봤거든요. 어제 밤에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며 ‘내는 여서 살란다’하더니 오늘 아침에 만원전철을 타보고서는 ‘사람 못살 동네다’하면서 오락가락 하고 있지요.”
경남 합천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강선희 간사의 설명이다. 2년 넘게 청진기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그녀와 녹색연합 출신의 박순애 간사가 주축이 되어 이번 캠프를 기획했다. ‘청진기’는 ‘청소년 진로 찾기 프로그램’의 줄임말로 각종 문화적 교육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농촌 청소년들을 위해 적극적인 방법으로 진로를 찾는 프로그램이다. 삼성 고른 기회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200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합천 지역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응도 뜨겁다고.
“다들 고마워하세요. 아시다시피 농촌 경제가 어렵잖아요. 일이 바쁘다보니 아이들에게 그리 신경을 못 써요. 다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주의죠. 어제 아이들과 함께 간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에서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꼬마 애들이 단체로 온 걸 보고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어요. 저희 애들 중엔 전시회를 한 번도 못 가본 애들이 수두룩하거든요.”
이번 캠프를 통해 아이들은 난타 공연도 보고 미술 전시회도 관람했다. TV에서나 보던 서울 명소 곳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더 넓고 복잡다단한 세상과 처음 조우했다. 농촌과는 달리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사는 것을 보면서 미래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농촌에 사는 청소년들은 문화적인 혜택에서 너무 멀어져 있거든요. 영화 하나 보려면 시외버스 타고 진주까지 나가야 하고요. 얘들은 불량해지고 싶어도 놀데가 없어서 불량청소년도 못돼요.(웃음) 중학생 중에 연극을 본 애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어제 버스에서 ‘다빈치가 뭐꼬? 담배이름 아이가?’ 하며 떠드는데 서울 승객 분들이 막 웃으시더라고요.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지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 아빠와 함께 각종 전시회, 음악회에 다니는 서울 아이들과는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단지 사는 환경이 다를 뿐인데 열려있는 교육의 기회나 문화 체험의 분야는 이렇듯 협소하다. 강선희 강사가 청진기 프로그램을 구상한 것도 바로 이러한 계기에서다.[##줄바꿈##]

아이들,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나다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른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날에는 냇가에서 마음껏 수영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고, 겨울에는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놀기도 했다. 자연의 넉넉한 품에 폭 안겨 마음껏 뛰어다니고 떠들어댈 수 있었던 그런 자유로움을 떠올리면, 암담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유년기를 보내기엔 농촌이 더 제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농촌은 기성세대가 보낸 농촌과는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게 박순애 간사의 말이다. 경제적으로는 더 힘들어졌고, 젊은 세대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정체된 사회 구조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패배주의와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 예전과는 달리 TV나 인터넷 등 매체가 발달하면서 이에 중독된 아이들도 많이 늘었다. 그래서 이처럼 훌륭한 자연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정작 게임에 빠져 집안에서만 지내는 아이들이 대다수라고 했다.
“요즘 시골 아이들은 비록 자연 속에 살고 있어도 교감할 줄을 몰라요. 우리가 어릴 때 놀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거든요. 컴퓨터와 티브이가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놀 줄 모르는 것은 도시랑 똑같아요. 그래서 우포늪도 가고 철새도래지도 다니면서 우리가 사는 농촌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을 배우고자 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처음에는 환경수업을 위주로 프로그램을 짰다. 그 과정에서 박순애 간사는 아이들이 새로운 수업과 환경에 매우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 가면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투리가 튀게 들릴까봐 말도 제대로 못하고 뷔페에 가도 긴장해서 절반도 먹지 못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
“이 아이들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두려운 수준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구나, 이런 것을 느꼈어요. 농촌은 학교 단위도 매우 작고 유치원 친구들이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그대로 가거든요. 새로운 인간관계나 새로운 생활에 대해 배워볼 기회가 없었던 거죠.”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변경을 했고, 그렇게 지난해부터 시작된 진로찾기 프로그램은 꽤 긍정적인 반향을 얻었다.
“사실 농촌에서 접할 수 있는 직업군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가장 좋은 직업이 농협 직원이랑 공무원이에요. 아니면 선생님. 이도저도 못하면 부모님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하죠. 그러나 지역에 대한 고민이나 자연에 대한 애정이 없는 아이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어 농사를 지어야 한다면 얼마나 가겠어요?”
강선희 간사는 현재 농촌 아이들이 처한 환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위에 롤모델이나 성장동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자극을 받아 성장해야 하는 단계임에도 아이들에게 동력이 없기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생활방식에 그대로 젖어버린다는 것이다.
“농촌 아이들의 현실은 혹독해요. 도시에서 중학교 3학년은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 고르는 정도의 선택을 앞두고 있지만 농촌의 중3들은 집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해요. 좁은 바닥에서 보고들은 것도 별로 없는데 갑자기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지는 거죠.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주위에 조언을 해줄 사람도 마땅치 않아요. 부모들은 ‘니 알아서 해라’식으로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부모들도 잘 모르니까요.”
아이 앞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미처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답답한 현실에 만족하며 살거나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아이들. 청진기 프로그램을 통해 이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스로가 선택하는 나의 미래
요즘 지방 중학생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우정학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120등까지의 우등생만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데 경쟁률이 치열한 이유는 시 예산으로 기숙사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역 차원에서는 우수한 인력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지만, 우정학사에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학생들의 박탈감이 커지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라고 두 선생님은 지적했다.
“그렇게 공부시켜도 나갈 애들은 다 나가거든요. 공부 잘하는 애들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아이들이 어떻게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지 방향성을 찾아주고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때 아닌 경쟁의식에 휩쓸려 중학교 때부터 야간자율학습에 시달려야 하는 평범한 중학생들의 고충이 만만치 않다는 거다.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은 포기 할 만도 하다. 즉, 지역 청소년들 1200여 명 가운데 1000명 정도의 아이들은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체념하며 산다는 거다.
“솔직히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끝났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우리 애들 지금 공부해봤자 도시 애들 따라가기 힘들거든요.(웃음) 근데 이 애들이 공부한답시고 방학에도 보충수업 때문에 매일 학교에 나가요.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많고 행복해질 수 있는데, 자꾸 공부만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방에서 강선희 선생님과 함께 공부해온 병우는 강 선생님의 권유로 청진기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됐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시작하게 됐지만 고 1이 된 지금은 적극적으로 모임을 끌어나갈 정도로 든든한 형이 됐다.
“처음엔 선생님이 하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됐어요. 수의사가 되겠다는 장래희망도 생겼고요.”
농촌소년다운 수줍음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지만 할 말을 끝까지 또박또박 해내는 모습이 여간 기특하지 않았다. 병우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합천에 남기로 했다. 3월, 합천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더 많은 친구들과 더 재미있는 일을 벌이기 위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이번에 고1 올라가는 아이들이 가장 능동적으로 똘똘 뭉쳐있어요. 부산에 갔을 때 인디고서원이라는 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나 봐요. 거기에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토론 프로그램인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에 참여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병우와 친구들은 합천 최초의 인문학 동아리를 만들기로 했다. 다음 주에 있을 인문학 캠프에 합천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고, 올해 안에 합천지역 청소년 1000명을 모아 인문학 캠프를 개최할 계획이다. 선생님의 주도로 이뤄지는 모임이 아닌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강선희 간사는 더욱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아이들이야말로 이 땅의 희망이다
청진기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은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어딜 데려가도 쭈뼛거리며 낯설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선생님, 우리 이것, 저것하면 안돼요?”하면서 조르기도 한다. 더 적극적으로 즐기게 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해야 할 일도 늘고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예산과 지원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고민이 많다.
“농촌에 노인들만 많고 아이들이 적어서 문제라고 하지만 정작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예산 자체가 노인 예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요. 그나마 있는 예산도 우정학사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다 들어가 버리니까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거죠.”
청진기 프로그램의 올해 목표는 우정학사에 들어가는 예산의 1/10이라도 일반 학생들에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합천에 생긴다는 것이다. 공부방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강선희 간사는 스스로 계획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아이들만의 공간을 만들어줄 꿈에 부풀어 있다. 도서관 겸 영화관은 물론, 아이들의 사무실도 마련해줄 예정이라고.
“2011년은 합천 지역 청소년들이 가히 혁명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 아이들이 만들어갈 합천 청소년들의 미래가 너무 기대됩니다. 그저 앞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아이들에게 이제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거든요.”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애정, 내 고향에서도 꿈꿀 수 있는 미래…. 아이들은 적극적인 진로 찾기 활동을 하며 많은 선물을 얻었다. 그저 학교 선생님, 공무원이 최고인 줄 알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기자, 수의사, 사회운동가를 꿈꾼다. 강선희, 박순애 간사와 아이들은 올해에도 역사기행, 대학탐방, 도시캠프 등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을 예정이다.
“뭐든 서울로 집중되는 현상을 깨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어요. 서울에 나가 살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놓고 싶어요. 그러려면 정치, 경제, 복지 등 복합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겠지만 일단 아이들이라도 잘 키워놓으면 좋은 밑바탕이 되지 않겠습니까?”
강선희 간사의 말마따나 아이들은 이 땅의 미래다. 이 아이들이 올바른 가치관, 삶에 대한 희망,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미래는 충분히 밝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마치 기분 좋은 노랫소리처럼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했다.

‘청진기 프로그램’이란?
삼성꿈장학재단의 후원을 받아 합천 지역의 여러 지역아동센터가 참여해 청소년들의 진로를 찾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지역적인 한계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지역의 많은 선생님들과 사회복지사, 시민단체들이 함께 힘을 모은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고운 심성을 기르고, 여러 도움을 받아 문화적,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청소년들이 많아질수록 농촌의 현실 또한 점점 풍요로워져 갈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