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농촌의 논밭은 고요하고 황량했다. 이 메마른 땅 어디쯤에 다시 피어나 푸르러질 생명력이 숨 쉬고 있을까, 아연해질 무렵 어디선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웃음이 너무도 밝고 건강해서 삭정이마저도 새 움을 틔우게 할 것만 같다. 도시에서 함께 동문수학하던 세 여자가 건강한 농촌 여성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고 눈물겹다.

바로 전날 도시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남쪽의 농촌마을은 청명한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에 도착해 소희주 씨에게 전화를 하니 지금 하우스에서 피망을 따고 있다며 그리로 오란다. 허허벌판에 오가는 사람도 없어 어렵게 정자나무가 있는 삼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스스로 농촌을 택한 젊은 여자들

소희주 씨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작은 체구로 커다란 트럭을 모는 당찬 여성이었다. 활짝 웃으면 큰 눈이 실눈처럼 감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박하기도 했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비닐하우스 안은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햇빛의 온기만으로 훈훈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피망 밭 저편에서 소희주 씨 남편인 남성민 씨가 피망을 열심히 따고 있었다. “뭐 하세요? 큰 것부터 담고 위에는 작은 피망을 담아야 돼요. 너무 잘고 모양이 망가진 피망은 상품 가치가 없어요. 저쪽에 다 모아놓으세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갓 따온 피망들을 풀어놓는 희주 씨의 재촉에 넋을 잃고 광활한 밭을 둘러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새도 없이 손은 이미 정신없이 피망을 분류해 박스에 넣고 테이핑을 해 한쪽에 쌓고 있었다. 농촌에 오면 누구나 자기 먹을 몫은 하게 된다더니,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정신없이 빠져들어 도시에서 늘 얼고 굳어 있던 허리께가 살살 녹다 못해 후끈해졌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합천과 창녕에 사는 강선희 씨와 변은주 씨가 도착했다. “여 와 있는 것도 모르고 느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청소 싹 하고, 설거지 다 해놓고, 그래도 안 오기에 밥이라도 해놔야 되나 싶었다. 여기 접어놓은 박스 붙이면 되나?”

소희주 씨와 동갑인 변은주 씨는 함께 다큐멘터리를 찍은 뒤 자주 만나게 되면서 더욱 ‘절친’이 됐다. 은주 씨는 현재 창녕에서 남편과 함께 마늘 농사를 짓고 있다. 강선희 씨는 89학번 선배로 합천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다양한 농민회 활동도 펼치고 있다. 도시에 사는 여성들이 카페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만나 남편 얘기, 애들 교육 얘기에 열 올리는 것처럼, 농촌 여성들은 밭에서 만나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거들고 돕는 게 진한 소통 방법인 듯싶었다. 이들 셋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다큐 영화 <땅의 여자>는 농민이면서 아내이고, 엄마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농촌 여성의 진솔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으로 작년 9월 개봉 이래 전국을 돌며 공동체 상영을 진행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다 빠져나간 오늘날의 농촌에서 이들 젊은 여성들이 일부러 농촌에 들어가 고군분투하면서도 행복하게 삶의 터전을 일궈가는 모습은 참으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농촌에 사는 여자, 그 진한 삶을 해부하다

이들 셋은 부산 동아대 재학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소위 ‘전대협’ 세대라 자처하는 강선희 씨는 당시 노동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선배로 통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철학에 심취해 다들 ‘강선희는 졸업한 뒤 분명 노동자가 될 것’이라 믿어 마지않았다고. “어느 날 철학 공부를 하다 동기들 사이에서 논쟁이 붙었어요. ‘노동자와 농민 중에서 어느 계급이 더 중요한가’가 주제였어요. 농민이 가장 기본적인 먹을거리와 생산성을 제공하는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저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다 노동자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 이후 농민이 더 중요한 계급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내는 촌에 갈란다’ 선포하고 후배들을 설득하고 다녔죠.” 조금은 치기어린 결심이었지만, 언제나 한다면 하는 그녀였다. 마침 우루과이라운드로 농촌 문제가 심각하게 정치적 도마 위에 오를 때였다. 그녀를 주축으로 농촌 문제를 고민하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세미나도 하고 농활도 적극적으로 다녔다. 그 모임을 함께했던 11명은 공교롭게도 현재 모두 농촌에 들어가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단다. “20대 초반에는 누구나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꿈도 꾸지만, 살다 보면 그게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대학 시절 함께 공부하고 농활 다녔던 친구들이 모두 농촌에 있네요. 청춘의 빛나는 황금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모두 곁에 있는 덕분에, 단 한 번도 다른 삶을 꿈꾸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문제는 강선희 씨가 스스로 밝혔듯이 농사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거였다. 결국 그녀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고 청소년 활동을 이끄는 간사로 또 다른 형태의 농촌 여성의 삶을 살아가게 됐다. 그녀가 이렇듯 조금 남다른 농촌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농사와 집안 살림을 도맡아주는 시어머니 덕분이었다. 시어머니는 그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고,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적 활동의 든든한 동지이자 지지자이기도 했다. <땅의 여자>를 연출한 권우정 감독이 맨 처음 강선희 씨를 주인공으로 점찍은 것도 2006년 홍콩에서 있었던 WTO 반대 시위에 참가한 그녀와 그녀의 시어머니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바깥일에 바쁜 선희 언니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언니 대신 농사와 가사를 책임지는 권순남 씨는 고부관계를 뛰어넘어 오래된 여성 동지이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를 찍게 된 것도 홍콩에서 만난 이들의 독특한 고부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다큐멘터리 &lt;땅의 여자&gt;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이라는 고부간일지라도 같은 농촌 여성이라는 동지애로 이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거였다. 덕분에 선희 씨는 살림에 대한 부담과 당뇨병으로 앓아누운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나 대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2007년 지방자치선거에 민주노동당 합천 대표로 출마하기도 했다. 선거에 출마한 며느리를 위해 함께 띠를 두르고 합천 곳곳에서 홍보물을 나누어주는 노모의 모습은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제작 기간, 그녀의 남편 김정호 씨는 결국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충격이 더했다. 다큐멘터리는 오열하는 주인공들을 묵묵히 잡아냈다. “애기 아빠를 먼저 보내서 다들 ‘저 가정은 불행할 거다’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어차피 행복은 만들어가는 거기 때문에 사는 건 똑같아요. 다큐에 장례식 장면이 다 담긴 건 오히려 좋았어요.

감독이 나중에 장례식 때 찍은 것만 편집해서 시디로 만들어줬는데, 너무 소중한 선물이었고요.”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각별한 고부 사이를 자랑했던 시어머니는 바로 짐을 싸서 독립해 나갔다. 선희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뜻이라면 그것을 존중해드리는 게 옳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란다. 그녀와 시어머니는 여전히 농촌 여성이라는 동지애로 함께 나란히 걷고 있다.

희생정신으로부터 즐거운 인생까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 부산에서 나고 자란 희주 씨가 이렇게 농촌 토박이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녀조차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농사는 꿈도 꿔본 적이 없다. “제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가장 고되고 어려운 곳에 가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게 굶주리는 나라의 오지 같은 데 들어가서 선교사로 일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독문학을 전공한 것도 못사는 나라에서 많이 쓰는 언어라기에….” 그런데 우연히 동아리연합회 차원에서 간 농촌 봉사활동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농사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되고 힘들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힘들게 일한 게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땀을 흘리는 감동을 처음 받아본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 농촌이 가장 힘든 곳일 수도 있다는 것을.” 힘든 곳이었지만 가장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늘 웃는 얼굴에 해맑은 성격, 작은 체구로 일을 찾아서 하는 그녀를 농촌의 어르신들 누구나 예뻐했다. 선희 씨와 은주 씨 모두 “쟤는 농민들에게 제일 사랑받았던 애”라며 입을 모았다.

가장 힘든 곳에서 살겠다는 그녀의 희생정신은 이곳에서라면 인정받고 행복하고 즐겁게 일하며 살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힘든 가운데서도 땀이 주는 감동이 있다는 것을 농사가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희주 씨와 마찬가지로 농사일이라곤 농활이 전부였던 남편 남성민 씨와 함께 생면부지 농촌에 자리 잡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급기야 성민 씨는 2년간 품삯도 받지 않고 농가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익혔다. 그 기간 동안 얻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농사의 1년 흐름, 어려움과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이었다고.

“처음에 농촌으로 간다고 했을 때 집에서 결사반대를 했어요. 저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지로 떠나는 것 같은 비장함 같은 게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사는 건 다 똑같아요. 어디에서 살아도 부지런하고 야무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잖아요. 그때는 왜 그렇게 갈등했는지…. 정말 왜 그랬지?” 지난해 태어난 막내 단비를 품에 안고 어르며 멋쩍게 웃는 지금의 그녀에게 농촌 여성이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모두 옛 추억이 된 듯했다. 처음 왔을 때는 도시에서 살던 버릇이 잘 없어지지 않아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도시에서는 다 각자 살잖아요. 처음에는 집에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문간에서 ‘어떻게 오셨어요?’ 물어보고 별 용건 없어 보이면 그냥 보내고 그랬는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닌 거야. 농촌에서는 다 같이 사는 거예요. 낯선 사람이라도 맨입으로 보내지 않아요.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죠. 왜냐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거든.” 처음엔 일이 서툴러 사고도 많이 쳤다는 희주 씨는 10년 넘게 진주에 살면서 누구보다도 야무지고 단단한 농촌 여성으로 다져진 듯했다. 무엇보다 농사짓는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갈 때는 몸이 천근만근이어도 힘든 농사일을 마칠 때쯤이면 오히려 활기가 돈다는 그녀는 영락없는 농촌 아낙의 모습이었다. 주위를 생각하는 인심, 나눠주는 기쁨을 알게 됐다는 건 농촌에 사는 덤이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처음 다큐를 찍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세 사람 모두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고 했다. 농촌에서의 삶이란 게 실상 단조로움과 반복의 악순환이어서 ‘매일 온다고 찍을 게 뭐 있겠나?’ 싶었단다. 그러나 연출을 맡은 권우정 감독은 몇 주 단위로 세 사람의 집을 돌면서 함께 먹고, 함께 농사를 짓고, 남는 시간에 조연출과 교대로 촬영을 했다. 늘 일손이 부족한 그녀들로서는 점점 반가운 식구가 되어갔다. “그게 다 수였는가 봐. 나중엔 카메라가 돌고 있어도 의식도 못하는 거예요. 처음 시사회를 할 때는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겠더라고. 나는 내가 쓰는 사투리가 그렇게 심한지도 몰랐어요.”

변은주 씨는 10년 만에 시댁으로부터 분가하면서 겪은 갈등, 남편과의 사소한 말다툼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담담하게 독백하듯, 친한 친구와 수다 떨 듯 그녀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여느 며느리, 여느 아내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다가왔다. “신랑은 자기를 속 좁은 사람처럼 그려놨다며 ‘상영중지 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벼르더라고. (웃음) 그런데 나중에 희주 이야기를 듣고 뭔가 깨달음이 왔어요. 이 영화가 우리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로 인해 농촌 여성들의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거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젠 안 부끄러워요.”

사실 농촌에 사는 사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밀짚모자를 쓴 중년 남성 혹은 땡볕에 그을린 피부의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가 이제 농촌에서 젊은 여성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이제 농촌에는 우리가 마지막 세대예요. 특히 제가 사는 창녕에서는 저희 바로 윗세대랑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소통하기도 어렵고 함께 맘을 모으기도 쉽지가 않아요. 뭔가 변화와 발전을 꿈꾸고 싶어도 사람이 없으니까 외롭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열아홉 살 때 농촌 총각에게 시집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게 후회된다는 말을 농담 삼아 하는 그녀지만, 소위 ‘일등 농사꾼’이라는 남편 김창수 씨에 대해 말할 때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농사일이란 게 내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하늘이 반이에요. 그래도 얘가 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느 때 주는 걸 좋아하는지, 온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도 다 알고 신경 써줘야 해요. 신랑이 일등 농사를 짓거든요. 전날 아무리 술에 취해 들어와도 다음 날 새벽에 물 줘야 하는 게 있다, 그러면 다시 자더라도 귀신같이 일어나 일을 나가요. 그런 정성을 들이지 않고 섣불리 농사를 시작하면 백 프로 다 망해요.” 은퇴 후 귀농을 꿈꾸는 도시 사람들이 물정 모르고 시작했다가 3년 안에 손 털고 나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다는 이들의 말에서 녹록지 않은 농촌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지 않았겠느냐’며 소탈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머지않은 듯했다.

분명 평범한 주부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사는 여성들임에 틀림없었다. 일상의 편리함 대신 땀 흘리는 노동의 희열을 더 사랑하고, 아이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닦달하는 대신 소여물도 주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게 키우며, 내 가족의 부귀영화보다는 함께 사는 이웃, 더 잘사는 농촌을 꿈꾸는 여자들. 그녀들이 굳건하게 디딘 땅에는 이들의 건강한 삶을 품어주는 소중한 에너지가 스민 듯했다. 우리가 잠시 잊어버린 진정한 행복까지도 말이다.

진행 홍유진(프리랜서) 사진 조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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