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닮아간다. 오래된 기와집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할머니나,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를 오가는 검은 슈트의 도시인들 모습이 하나의 풍경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벤자민 주아노 씨의 작은 별장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리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 프랑스식(?) 한옥은 프랑스에서 성장한 뒤 한국에 와 17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벤자민 씨와 아주 똑같이 닮은 공간이었다. “서울은 멋진 도시예요. 공원과 산, 강이 있어 답답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나는 늘 자연이 그리웠어요. 한국에서 생활하는 내내 별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우연처럼, 운명처럼 이 집과 만나게 됐죠.”
한국의 공간_ 하나뿐인 아늑함과 만나다
벤자민 주아노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통이다. 1996년 군복무차 교환 교사로 오면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이태원에서 프랑스 가정식 전문점을 내는가 하면, 아리랑 TV에서 한국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여행 책자를 내기도 했고, 현재 프랑스의 한 대학원에서 한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가 좀 더 한국 문화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 계기가 생겼다. 바로 3년 전 경기도 양평에 그동안 꿈꿔왔던 한옥 별장을 마련한 것이다.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한옥 스타일의 뼈대만 남기고 그가 구상한 대로 새로 리모델링을 했다. 주말마다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면서 조금씩 지금의 형태를 만들어온 것. 그의 집은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있어 도로변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한 좁은 길을 굽이굽이 달려야 했다. 어떻게 이 집을 만났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양평에 놀러왔을 때 탐험하는 마음으로 산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쓰러져가는 낡은 집을 발견했단다. 정말이지 운명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하다. “공간이 주는 느낌이 무척 좋았어요. 가까운 부동산에 찾아가 혹시 내놓은 집이 있느냐고 물어봤죠. 그런데 딱 제가 본 이 집이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겠어요.” 그의 별장 이름은 ‘La Songerie’, 프랑스어로 ‘낮꿈’이란 뜻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와 흙으로 지은 평범한 한옥이다. ‘별장’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우리가 별장에 대해 갖고 있는 으리으리한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벤자민 씨는 오히려 한국식 별장에 대해 많은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이 집을 지을 때 한국 친구들은 별장이니까 더 크고 멋지게 지어야 한다고 조언했어요. 하지만 큰 집은 그만큼 관리를 해줘야 해요. 하지만 자주 와서 관리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 별장에 가면 너무 크기만 하고 온기가 없어서 마치 귀신집 같아요. 나는 이 집을 지을 때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오두막 같은 곳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제가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적당한 크기지만, 한 8명 정도는 와서 놀고 자고 갈 수 있어요.” 벤자민 씨가 이 별장을 지을 때 상상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숨바꼭질을 하고 놀던 작은 오두막이었다. 크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보물들을 다 모아놓은 곳,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곳. 이 별장을 처음 봤을 때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그의 이미지가 투영되었기 때문이리라. 평범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묘한 위화감에 이리저리 둘러보게 된다. 소위 프로방스풍이라 불리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주방과 조선시대 부엌에나 있을 법한 오래된 한국식 찬장이 너무도 친숙하게 잘 어울렸고, 모던한 아일랜드 식탁과 스틸 의자, 그리고 다다미가 깔린 좌식 공간 옆 원목 사다리가 마치 산장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퓨전도 뭐 이리 오묘한 퓨전이 다 있나 싶다. 벽 곳곳에 걸린 민화나 여기저기 놓인 고풍스러운 소품들 모두 그가 직접 돌아다니며 구입한 골동품들이란다.
한국의 음식_ 역사와 다양성의 문화
16년 전 군복무를 대체하기 위해 교환 교사로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이렇게 한국과 오랜 인연을 맺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 가지 분야에 깊이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다. 참기름 냄새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한국 음식도 점점 그 매력을 알게 되고, 늘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한국 친구들도 생겼다. 자신이 한국 문화에 대해 조금씩 배웠듯이, 한국 사람들에 프랑스 문화를 알려주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가 다른 세계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먹을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람들에게 진짜 프랑스 문화를 보여주겠다며 이태원에 프랑스의 가정식 전문점 ‘르 생텍스’를 연 것도 그래서다. “처음 ‘르 생텍스’를 오픈했을 때는 이태원에 외국 음식점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33개나 돼요. 하지만 제대로 된 프랑스 음식이나 이탈리아 음식을 하는 곳은 거의 없어요. 퓨전이 나쁜 건 아니지만, 진짜 음식을 모르는 채로 퓨전 음식만 먹게 되면 그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요.” 그의 식당이 ‘프랑스의 가정식’을 표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자신이 한국 음식을 통해 한국을 배운 것처럼, 한국 사람들에게 프랑스를 알려줘야겠다는 의무감의 발로였던 것. 그러나 대중적인 입맛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진짜’ 프랑스 음식이 처음부터 사랑받은 것은 아니다. “제가 고집을 좀 부렸어요. 손님들이 ‘너무 짜요’ ‘느끼한데 왜 김치가 없어요’ 하고 항의도 많이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해주는 식당이 많으니 다른 데로 가시라고 했어요. 저희 식당만큼은 프랑스식 그대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고집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프랑스 음식의 진정한 묘미를 아는 미식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첼리스트 양성원 씨 등 프랑스 유학파 예술가들 사이에서 ‘프랑스 비스트로의 분위기와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입소문을 탔다. 또 2000년대 들어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세계 음식이 대중화 바람을 타면서 ‘르 생텍스’는 그야말로 줄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대박 식당으로 거듭났다. “음식 문화를 빼놓고 어떻게 프랑스를 말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호텔의 프랑스 음식은 정말 아니에요. 그건 그냥 유럽 음식을 모든 이의 입맛에 맞게 섞어놓은 것이죠. 그런 음식을 매일 먹을 수는 없잖아요. 기내식으로 나오는 비빔밥도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맛있다고 할 테지만 그게 진짜 한국의 맛은 아니잖아요.” 다양한 음식 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와 한국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특히 불고기나 비빔밥 같은 단품 요리보다는 나물과 고기, 밥과 국 등 여러 가지 음식이 한 번에 나오는 한 상 차림이야말로 한국이 자랑해야 할 훌륭한 식문화라는 것.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디로 여행을 가든 늘 스파게티만 먹어요. 이건 들은 얘기가 아니고 직접 본 걸 말씀드리는 건데, 정말 삼시 세끼 스파게티만 먹더라고요.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나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 음식을 먹고 삽니까. 음식 문화가 풍요롭다는 것은 전체 문화의 폭과 깊이도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에서 친구들이 오면 그는 늘 가장 먼저 정갈한 한정식집에 데려간다. 커다란 상 한가득 나오는 오색창연한 상차림에 먼저 놀라고, 그 음식에 깃든 전통과 역사성에 두 번 놀라면서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맛보는 낯선 음식이 무조건 입에 맞을 리는 없겠지만, 음식은 단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보기 위한 첫 단추라는 게 벤자민 씨의 생각이다.
한국의 자연_ 모든 것을 품에 안는 풍요로움의 상징
얼마 전 프랑스로 약 한 달간 휴가를 다녀온 벤자민 씨. 매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한두 달 정도 프랑스에 다녀오는데 점점 외국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면서 웃었다. 그에게 프랑스는 그리움이 느껴지는 옛 고향으로 남아버린 것일까. “프랑스에 가면 옛날 친구들도 만나고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아요. 하지만 이제는 왠지 먼 나라로 느껴져요. 특히 파리는 거의 외국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파리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이젠 나도 수많은 관광객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재미있는 건 말이죠, 그렇지만 제가 한국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제가 한국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고민과 체념이 묻어났다. 사실 한국에서 살아온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 아무리 다가가도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느낌에 때로는 자신이 왜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기도 했고, 한국을 떠날까 말까 하는 고민도 수없이 했다. “저는 다양한 삶을 살아왔어요. 고향에서도 오래 살았고, 외국에서 현지 사람들과 완전히 동화된 삶도 살아봤죠.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가 어디인가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인 것 같아요. 사실은 어디에서 살든, 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모두 자기 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비록 한국 사람은 될 수 없겠지만 몸속이나 마음속에 영원히 씻기지 않을 한국적인 요소가 스며들었겠죠?” 그가 서울에서 살면서 느낀 허무함을 달래준 것이 이번에 집을 얻으면서 텃밭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자주 들르지 못하는 탓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지만, 나름 구획이 있고 밭고랑을 만들어놓은 모양새도 그럴듯했다. 장화를 신고 수확물을 담을 라탄 바구니를 옆에 낀 벤자민 씨의 모습은 영락없는 프랑스 농부였다. 호박, 가지, 오이, 배추, 포도, 복숭아, 밤 등등 그의 손으로 가꾼 채소의 종류만도 20여 가지에 이른다. 지난주에는 수확한 오이로 물김치와 소박이를 만들었다며 보여주기도 했다. 새콤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게 흔히 먹던 물김치와는 사뭇 달라 ‘프랑스식 물김치’라고 부르면 좋을 듯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아주 멋있는 정원을 가꾸셨어요. 계절마다 갖가지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정원이었죠. 도시 생활을 동경했던 저는 시골이 마냥 싫었지만 말이죠. 그런데 교육의 힘이 참 놀라워요. 서른 즈음에 느꼈어요. 도시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에 보고 경험한 것들, 집에서 먹던 어머니가 해준 음식의 맛 같은 것이 숨어 있는 모양이에요.” 그의 인생에서 이제 한국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동반자가 되었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제대로 된 한식 레스토랑을 차려 외국 손님은 물론 한국인의 입맛까지 사로잡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농사를 짓고, 한국의 이웃들을 위해 프랑스 가정식을 만들고, 더 나아가 음식으로 서로 다른 문화가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프랑스식 한국 라이프는 당분간 계속 될 듯하다.
by 트래블러 2010. 12. 8.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