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식의 정의는 무엇일까. 유기농으로 재배한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 엄마가 해준 밥처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요리? 이에 대해 뜨겁게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젊은 요리사들을 만났다. 요리를 향한 열정과 신념에 그들이 만든 김치 한 가닥, 나물 한 젓갈 허투루 대할 수 없게 된다.
오후의 가을빛이 여위어가는 시간, 유기농 쌈밥 전문점 ‘세발자전거’의 작은 주방에서는 요리사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파주 헤이리 ‘지렁이다’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는 세발자전거는 일반 음식점이라기엔 구조가 아주 독특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손님을 맞는 것은 카운터가 아니라 오래된 문짝을 얼기설기 대어놓은 작은 주방. 슬쩍 들여다보면 요리에 여념이 없어 보이던 요리사들이 금세 활짝 웃으며 “저 안으로 쭈욱 들어가시면 됩니다!”하고 반갑게 안내한다.

안내를 받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에 매달린 독특한 모양의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머니, 무지개 등 정겨운 우리말이 그림처럼 장식된 예쁜 그릇도 독특하다. 전면 유리창으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저녁 시간에 맞추어 각종 맛깔난 음식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모든 음식은 국내산 재료로 만들며, 조미료나 방부제를 전혀 넣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음식에 얼마나 긍지를 갖고 있는지 알 만하다.
1 업사이클한 그릇에는 잠시 생각이 머물게 하는 시구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단어가 그림처럼 박혀 있다.
2 ‘텃밭에 상추’. 햇빛을 가득 머금은 주방의 한 풍경.
3 정성스레 상차림에 열중인 박정윤 요리사.
4 친환경 재료를 엄선해 만든 세발자전거의 메뉴들은 날마다 조금씩 바뀐다.
세 요리사의 소박한 꿈, 현실이 되다
이날 찾아간 세발자전거에는 박정윤, 오은택 요리사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바퀴인 엄태진 요리사는 외국인 아내의 출산을 곁에서 지키기 위해 일주일 전, 슬로바키아로 날아갔다고. 쌈밥 전문점이라는 정체성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세발자전거’라는 이름은 오은택, 엄태진, 박정윤 이 세 사람의 협업으로 일한다는 의미에서 붙였단다. 워커힐 호텔에서 함께 일하던 선후배들이 그 호화로운 호텔 주방 대신 협소한 벤처(?)식당을 열기로 결정한 것은 딴생각이 통했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음식에 대한 꿈이 있잖아요. 직장에 소속되어 있으면 절대 그 꿈을 이룰 수 없죠. 코스트가 안 맞으면 쓰고 싶은 재료도 못 쓰고, 메뉴도 하라는 대로 정해야 하니까요. 게다가 좋은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서로 그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친해진 것 같아요.”
세 남자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어머니’의 손맛.
식자재 값이 오르면 당연히 음식 값도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음식 값을 쉽게 올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손익을 맞추려면 더 저렴한 식자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리사들 입장에서는 메뉴를 아예 내려버리고 싶을 만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일이지만 한 직장에 소속된 이상 할당된 요리를 해내야 하는 게 임무다.

그러던 중 본격적인 딴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2010년 킨텍스에서 열린 요리박람회에서 유기농 식재료를 만난 것이다. 점점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자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요리시장에서 유기농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화두다. 세 사람도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나를 요리해 먹어. 당신의 몸이 싱그러워질 거야’라고 말하는 건강한 식재료를 직접 눈으로 보니 진짜 좋은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다고.

“공교롭게도 세 명이 양식, 일식, 한식 등 다양한 요리 경험을 가지고 있어 어떤 식당이든 시작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합정동에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냈다가, 나중에는 막걸리집으로 업종 변경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됐죠.”

세발자전거의 막내 박정윤 요리사는 월미도 횟집 아들, 오은택 요리사는 한정식집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식당이 내 집, 부엌이 놀이터 같았다. 정성 어린 음식으로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자연스럽게 체득했다고 할까. 호텔의 큰 레스토랑이 아니라 직접 손님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진심을 담아 요리할 수 있는 작은 식당. 소박하지만 요리사라면 꼭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돈을 벌겠다고 벌인 일이 아니었다. 이왕 하는 일, 하고 싶은 요리를 즐겁고 재미있게, 보람도 느끼면서 하고 싶다는 게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렇게 작은 용기가 솟아나고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자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뭔가 신나는 일’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합류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뜻하지 않게 도움의 손길을 만난 경우도 많았다. 헤이리에 오게 된 것도 그렇게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된 거라고 했다.
인테리어 비용을 줄인 대신 음식 값을 저렴하게 맞추었다. 심플하면서도 정겨운 식당 풍경.
“합정동에서 막걸리집을 할 때 지인들 초대해서 나눔 행사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페이퍼gt; 잡지의 정유희 기자님이 어떤 분을 데리고 오셨더라고요. 그분이 (주)쌈지농부의 천호균 대표님이셨어요."

맛 좋은 막걸리를 기분 좋게 즐기던 천 사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내가 헤이리에 괜찮은 공간을 갖고 있는데, 구경할 겸 꼭 한번 놀러 와요.”

“정말 놀러 간다는 맘으로 순수하게 헤이리를 찾았어요. 좋더라고요. 그동안 요리만 하느라 몰랐는데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웃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천 대표님께서 공간을 제공해줄 테니 식당을 열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하시는 거예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한 끼 식사
막걸리집의 안주 요리만으로는 유기농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들어 팔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는 데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세 사람은 천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즉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좋은 재료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식, 한식을 소재로 잡았다. 어린아이부터 몸이 아픈 사람까지도 마음 편하게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한정식집을 콘셉트로 한 것. 합정동의 막걸리집은 단골손님이었던 한 막걸리 마니아에게 넘겼다. 모든 일이 술술 진행됐다.
언젠가 국밥집을 차리고 싶다는 오은택 요리사.
“사실 유기농이 좋은 줄은 다 알지만 비싸거든요. 그러니 대중적인 식당에서 유기농 재료를 쓰기에는 무리가 있죠. 저희도 100% 유기농이라고는 말씀 못 드려요. 다만 그런 신조를 가지고 100%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말씀은 자신 있게 드릴 수 있겠네요. 지금요? 그래도 60~70%는 돼요.”

일반 서민들이 유기농 음식을 즐길 수 있으려면 단가 조절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뷔페식 쌈밥집으로 전환했고, 인테리어는 헤이리에 있는 작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식당 이곳저곳에 물고기나 꽃을 형상화한 조명작품이나 멋진 그림이 걸려 있는데 모두 현직 작가들이 작업한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전시 공간이 되고, 식당으로서는 인테리어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과 의자, 그릇들까지도 작가들의 도움을 얻어 재활용(recycle)이 아닌 재창조(upcycle)한 작품들이다.

“쌈밥집을 열면서 정말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더 기쁜 것은 그게 서로에게 윈윈이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만약 뭔가 성과가 나오면 그걸 다시 나누고…. 점점 좋은 방향으로 윈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절약한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몫으로 되돌아갔다. 식자재 가격 상승으로 너도 나도 음식 가격을 올리는 이때, 세발자전거는 오히려 1인 식사 비용을 1만원에서 8천원으로 내린 것이다. 또한 5세 미만 어린이들에게는 비용을 청구하지 않고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게 해 그렇게 모은 성금은 전액 참사랑 나눔회에 보내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진심이 손님들에게도 닿았던 것일까. 세발자전거는 오픈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써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친환경 식당’,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은 쌈밥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홍대에서 식당을 할 때는 단골손님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잠깐 놀러온 뜨내기 손님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런데 손님이 손님을 부르고, 점점 재방문율이 높아지더니 이제는 주말에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늘었어요.”

실제로 오후 5시쯤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 식당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린 자녀들과 동행한 젊은 주부들이었다. 5세 미만은 무료라는 가격적인 메리트도 적잖게 작용했겠으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이곳을 찾게 만들었을 터였다. “겉치레 없이 그저 아들 같은 자식들 위해서 마진 생각 않고 식당을 운영하시는 그런 할머니들이 아직은 우리 곁에 있거든요.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어머님 세대가 끝나면 국밥 5천원, 국수 3천~4천원 하는 식당도 다 문을 닫을 거예요. 그때 되면 우리나라 외식 값이 아마 외국처럼 폭등할 거라고 봅니다.”

손님을 친아들처럼 여기며 정성 들인 국밥 한 그릇을 넉넉하게 담아내던 인심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섭섭해진다. 몇천 원짜리 백반을 먹고 식당 문을 나서면 배도 든든하고 마음까지 따뜻해지던 기억, 누구에게나 있지 않던가.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음식에 깃든 정성보다는 매스컴에서 다룬 맛집인지, 그럴듯한 외관을 갖고 있는지에 더 신경 썼는지도 모른다. 오은택 요리사는 서울 강남의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예로 들었다. 1만8천원짜리 파스타 한 접시에는 비싼 인테리어와 화려한 식기, 고급 가구 값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잠시의 허영 때문에 진짜 내 몸에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 잊고 산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요리하는 남자의 매력은 이제부터 시작
최근에는 ‘셰프’라는 외국어까지 붙여가며 남자 요리사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우리나라에서 요리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가정에서는 대부분 요리가 여자의 영역이다 보니 아직도 남자가 요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편치 않게 보는 사람이 많다.
소중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공간. ‘부엌’이라는 팻말이 의미심장하다.
“저희 경력이 다 15년 이상 되는데요, 처음 요리 시작할 때만 해도 남자 요리사가 많지 않았어요. 저도 한때는 ‘남자 새끼가 오죽하면 부엌에서 일을 하냐’고 흉보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웃음) 과거에는 숙식이 제공되는 직장이다 보니 지방에서 사고치고 올라온 분들 중 요리사로 취업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더군요.”(박정윤)

옛날에는 ‘요리는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전문 요리사에 대한 수요도 크게 없었다고. 그러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요리사가 크게 부족해 외국에서 몇 억을 주고 데려오는 일도 벌어진 적이 있었단다. 요즘은 일상을 풍요롭게 가꿔주는 취미로 요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요리가 여자에게 더 맞는 일인 것은 사실이에요. 어머니의 손맛을 내기에 남자들은 너무 거칠잖아요. 하지만 ‘요리사’나 ‘주방장’이라는 직업적인 측면을 본다면 남자들의 리더십이나 분석력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또 큰 재료를 다루려면 솜씨보다는 힘이 필요하거든요. 농어나 도미 같은 생선 대가리는 뼈 두께 때문에 여자 분들은 절대로 못 따요.”(오은택)

남자들의 요리는 어떻게 다른지 묻자 역시 스케일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끓이고, 지지고, 볶고’ 하는 아기자기한 요리가 아니다. 때로는 수십 킬로의 식재료를 쉴 새 없이 지고 날라야 하고, 무더위 속에서도 불 앞에서 요리해야 하며, 하루 열 몇 시간을 서서 힘을 써야 하는 노동이고 체력 싸움이다. 평소에도 자주 요리를 해 먹는 편이냐는 질문에 ‘코미디언이 집에서 웃기는 것 봤느냐’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큰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보인다. 박정윤 씨가 마케팅이나 영업 쪽을 담당한다면, 오은택 씨는 맛을 연구하고, 엄태진 씨는 손님과 소통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식으로 세 바퀴는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늘 같은 마음, 같은 의견일 리는 없다.

“셋 다 성격이다 달라요. 사이 좋아 보인다고요? 우리가 얼마나 싸우는데요. 맛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치지만 그게 다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이에요. 그게 있어야 발전이 있죠. 해결 방법은 간단해요. 셋 중 둘만 오케이하면 진행해요.”
왼쪽부터 오은택, 박정윤 요리사. 삼총사 중 나머지 한 명인 엄태진 씨는 슬로바키아에서 부인의 출산을 돕고 있다.
세발자전거는 출발한 지 아직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튼튼하게 세 바퀴로 굴러가는 만큼 느리지만 꾸준히 이곳저곳 들러보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머릿속에서만 구상하고 있는 계획도 많다.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요리는 국밥 한 그릇이에요. 언젠가 콩나물국밥집이나 설렁탕집을 꼭 하고 싶어요. 하얀 사골 육수로 맛을 낸 설렁탕 하나만 파는 거죠.”(오은택)

“전 호기심도 많고 외향적이라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요. 여러 사람이 어울릴 수 있는 파티 공간도 만들고 싶고, 늦게나마 외식업에 뛰어드시는 분들을 위해 맞춤형 프랜차이즈 사업도 벌여보고 싶어요. 곳곳에 친환경 식공간이 늘어날 수 있도록 많은 분의 동참을 이끌어내야죠.”(박정윤)

인터뷰가 끝날 즈음, 3m 남짓한 뷔페 테이블에 이들 요리사가 정성스레 준비한 성찬이 완성되었다. 국이며 반찬 하나하나에 이름과 산지, 영양소와 효능 등이 아기자기하게 적혀 있었다. 손님들은 천천히 음식을 눈으로 보고 향으로 음미하며 예쁜 접시에 먹을 만큼 담아갔다. 음식에 담긴 햇빛과 공기, 만든 이의 수고를 떠올리면서.

by 트래블러 2012. 2. 24. 09:03
최근 다이어트에 효과가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백차(白茶)가 인기를 얻고 있다. 백차는 녹차와 같은 잎을 쓰지만 가공 과정이 다르다. 비비지도 덖지도 않아 흰 솜털이 나 있는 어린잎을 오랜 시간 그대로 말린 차다. 백색의 솜털이 덮여 있어서 은색의 광택이 나며, 향기가 맑고 맛이 산뜻하다.

일반적으로 백차는 여름에 열을 내려가게 하고 심장과 장에 좋다고 알려져 있어, 더러는 약재로도 많이 사용한다. 또한 가공과정을 덜 거친 까닭에 녹차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항암 효과를 자랑한다고.

요즘 들어 백차가 더욱 주목받고 있는 것은 탁월한 다이어트 효과 때문이다. 특히 비만 인구 증가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영미 국가들은 이미 예전부터 백차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독일에서 백차 추출물이 새로운 지방세포 성장을 줄이고 동시에 기존 지방세포의 분해를 촉진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 다이어트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지, 지방세포가 지방을 어떻게 만들고 분해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향후 백차를 이용한 신약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으로 백차의 효능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다. 하루에 백차를 네 컵 정도 마시면, 평소 먹던 음식을 그대로 먹어도 체중이 줄어드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피부의 독소를 감소시켜 윤기 있는 피부를 유지하는 데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

건강에도 좋고, 피부에도 좋고, 다이어트 효과도 있다니 일석삼조다. 올여름에는 녹차나 홍차와는 또 다른 맛과 향을 지닌 백차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보자.

//백차의 종류//

# 백호은침(白毫銀針) - 가장 대표적인 백차. 찻잎에 가느다란 흰 털이 있어서 백호, 전체 색깔이 은색인데다 마치 침처럼 곧고 뾰족해서 은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국 복건성의 복정(福鼎)과 정화(政和)에서 많이 생산된다. 더운물을 부으면 하얀 털(백호)이 빠져나오는데 함께 마시는 것이 좋다.

# 안길백차(安吉白茶) - 길이가 짧을수록 좋은 찻잎이라 볼 수 있다. 즉, 어린잎이 최고의 안길백차다. 중국 절강성 안길현에서 주로 재배된다. 구수한 맛이 일품으로 주전자에 끓여서 냉장 보관해두고 마셔도 좋다.

# 기타 - 백모란, 수미, 공미 등 백호은침과 다른 찻잎을 비율에 따라 섞은 차로 여러 가지가 있다. 취향과 풍미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보는 즐거움도 만끽하려면 투명한 유리잔에 마셔보자.

취재 | 홍유진(자유기고가)

by 트래블러 2012. 2. 20. 09:33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성공하고 싶다.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

이런 꿈을 꿔 본 일이 없다.

내가 꾸는 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것들이었다.

나 자신이 소박한 이상주의자라 강변하고 싶은 게 아니다.

어떤 꿈이 더 가치있다고 절대 이야기할 수 없는 법이다.

어쨌든,

나는 늘 그런 꿈을 꾸지만

날마다 좌절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진보한 것 없이

늘 제자리인 것만 같고,

마감에 급급해 숙제처럼 글을 써내면서

보다 나은 글을 써내지 못한 자괴감에 휩싸인다.

지금의 내 상태가 평화롭고 희망적이다가도

순간 순간 과연 나아지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면

불안하고 무섭다.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 하나 최선을 다하면

조금씩 쌓여 보다 나은 내가 되리라 믿어보지만,

에휴, 모르겠다.

의도하지 않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생각없이 행동하기도 하고,

나태해지기도 하고,

최근의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자꾸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난 지독한 회의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by 트래블러 2012. 2. 13. 00:03

어린 시절 아주 잠시지만, 비행에 빠진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비행, 옳지 못한 행동을 매일 같이 하고 다녔던 때였다. 열 살 때였으니까 비행청소년도 아니고 비행어린이였다고 해야 하나.

술을 마시고, 난잡하게 놀기엔 안타깝게도 너무 어린 나이였고, 다만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고, 닥치는 대로-이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돈과 물건을 훔쳤다.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몸싸움까지는 안 갔지만 그 직전까지 갈 정도로 반 애들과 심하게 싸운 적도 있었다.

사실, 2학년 때까지 나는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수 적고, 착하고, 내성적이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최고의 모범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나를 두고 많은 어른들이 우려를 표했다. 숙제를 전혀 해놓지 않고, 마치 해온 것처럼 어줍잖은 꼼수를 쓴 나에게 벌을 주다가 담임선생님은 “전혀 그럴 것 같이 안 생겼는데....”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시로 지갑에 손을 대고 무슨 잘못인지 학교에 불려가기까지 할머니와 엄마는 “다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 돌려버리기도 했다.

그랬다. 그 때 내겐 비행을 함께하던 친구가 있었다. 함께 했다는 것은 적합지 않겠다. 내 비행을 지켜보고 방관했던 친구가 있었다. 훔쳐온 돈으로 군것질을 함께 했으며 가끔은 그냥 돈을 주기도 했다. 그 애는 그게 다 훔친 돈이라는 걸 알면서 아무 말 없이 받아쓰고 내 곁에 있었다. 함께 다른 애들과 싸웠고,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게 어떤 형태의 우정이었는지, 혹은 상처받은 영혼들끼리 이해타산이 맞았던 건지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그 애는 늘 ‘죽음’에 대한 이야길 했다. 열 살짜리의 고민치고는 참 심오했다. 물론,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끄덕끄덕 동조를 했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어떤 고민을 이야기했던가. 그게 무엇이든 진실을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가 왜 그렇게 모진 방황을 거쳐야만 했는지 알겠다. 나에게 상처 입힌 어른들, 뭣같은 세상에 열 살짜리 꼬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음을... 지금은 알겠다. 그 일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작고 어렸다. 적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묻고 지나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어쨌든, 당시 내가 1년 남짓 저질렀던 온갖 비행과 악행들은 나름대로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 상처를 그대로 담아두고 다시 착한 아이로 돌아가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나쁜 아이로라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1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다. '착한 아이'라는 본성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던 도벽에의 충동도 어느 정도 사그라졌고, 숙제도 공부도 조금씩 할 맘이 생겼다. 그렇게 4학년이 되어서는 그 애와 반이 갈리고, 나 또한 이전의 착한 아이로 거의 돌아왔다. 할머니와 엄마는 역시 ‘다 친구 잘못사귀어서 그랬던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내 비행의 원인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던 나 또한 ‘그런가 보다’하고 살았다.

내 비행의 원흉으로 지목된 그 애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후에는 맨송맨송하게 지냈다. 공부는 그저 그랬지만 사실 그렇게 못된 애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날 힘들게 했던 애로 여기고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누명을 씌웠으니 미안하기도 하다.

6학년 때였던가, 그 애와 다시 한 반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이미 나는 완벽한 모범생으로 거듭나있었다. 반에서 1등은 못돼도 2등 정도는 늘 차지하는 성적이었고, 부반장까지 역임했으니. 그 애와는 노는 무리도 달랐다. 친하지 않아서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는데 그 애와 그 애의 친구들이 날더러 ‘고상하다’며 비꼬고 놀렸던 건 기억난다. 지난 과거를 떠올리게 했음은 물론이다.

왜 갑자기 그 애 생각이 나는 걸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의 아픈 시절을, 그 애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한 게 많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그 애도 아마 그럴 것이다.

by 트래블러 2012. 2. 1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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