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식의 정의는 무엇일까. 유기농으로 재배한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 엄마가 해준 밥처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요리? 이에 대해 뜨겁게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젊은 요리사들을 만났다. 요리를 향한 열정과 신념에 그들이 만든 김치 한 가닥, 나물 한 젓갈 허투루 대할 수 없게 된다.
오후의 가을빛이 여위어가는 시간, 유기농 쌈밥 전문점 ‘세발자전거’의 작은 주방에서는 요리사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파주 헤이리 ‘지렁이다’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는 세발자전거는 일반 음식점이라기엔 구조가 아주 독특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손님을 맞는 것은 카운터가 아니라 오래된 문짝을 얼기설기 대어놓은 작은 주방. 슬쩍 들여다보면 요리에 여념이 없어 보이던 요리사들이 금세 활짝 웃으며 “저 안으로 쭈욱 들어가시면 됩니다!”하고 반갑게 안내한다.

안내를 받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에 매달린 독특한 모양의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머니, 무지개 등 정겨운 우리말이 그림처럼 장식된 예쁜 그릇도 독특하다. 전면 유리창으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저녁 시간에 맞추어 각종 맛깔난 음식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모든 음식은 국내산 재료로 만들며, 조미료나 방부제를 전혀 넣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음식에 얼마나 긍지를 갖고 있는지 알 만하다.
1 업사이클한 그릇에는 잠시 생각이 머물게 하는 시구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단어가 그림처럼 박혀 있다.
2 ‘텃밭에 상추’. 햇빛을 가득 머금은 주방의 한 풍경.
3 정성스레 상차림에 열중인 박정윤 요리사.
4 친환경 재료를 엄선해 만든 세발자전거의 메뉴들은 날마다 조금씩 바뀐다.
세 요리사의 소박한 꿈, 현실이 되다
이날 찾아간 세발자전거에는 박정윤, 오은택 요리사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바퀴인 엄태진 요리사는 외국인 아내의 출산을 곁에서 지키기 위해 일주일 전, 슬로바키아로 날아갔다고. 쌈밥 전문점이라는 정체성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세발자전거’라는 이름은 오은택, 엄태진, 박정윤 이 세 사람의 협업으로 일한다는 의미에서 붙였단다. 워커힐 호텔에서 함께 일하던 선후배들이 그 호화로운 호텔 주방 대신 협소한 벤처(?)식당을 열기로 결정한 것은 딴생각이 통했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음식에 대한 꿈이 있잖아요. 직장에 소속되어 있으면 절대 그 꿈을 이룰 수 없죠. 코스트가 안 맞으면 쓰고 싶은 재료도 못 쓰고, 메뉴도 하라는 대로 정해야 하니까요. 게다가 좋은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서로 그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친해진 것 같아요.”
세 남자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어머니’의 손맛.
식자재 값이 오르면 당연히 음식 값도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음식 값을 쉽게 올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손익을 맞추려면 더 저렴한 식자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리사들 입장에서는 메뉴를 아예 내려버리고 싶을 만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일이지만 한 직장에 소속된 이상 할당된 요리를 해내야 하는 게 임무다.

그러던 중 본격적인 딴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2010년 킨텍스에서 열린 요리박람회에서 유기농 식재료를 만난 것이다. 점점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자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요리시장에서 유기농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화두다. 세 사람도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나를 요리해 먹어. 당신의 몸이 싱그러워질 거야’라고 말하는 건강한 식재료를 직접 눈으로 보니 진짜 좋은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다고.

“공교롭게도 세 명이 양식, 일식, 한식 등 다양한 요리 경험을 가지고 있어 어떤 식당이든 시작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합정동에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냈다가, 나중에는 막걸리집으로 업종 변경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됐죠.”

세발자전거의 막내 박정윤 요리사는 월미도 횟집 아들, 오은택 요리사는 한정식집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식당이 내 집, 부엌이 놀이터 같았다. 정성 어린 음식으로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자연스럽게 체득했다고 할까. 호텔의 큰 레스토랑이 아니라 직접 손님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진심을 담아 요리할 수 있는 작은 식당. 소박하지만 요리사라면 꼭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돈을 벌겠다고 벌인 일이 아니었다. 이왕 하는 일, 하고 싶은 요리를 즐겁고 재미있게, 보람도 느끼면서 하고 싶다는 게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렇게 작은 용기가 솟아나고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자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뭔가 신나는 일’이 자꾸만 생겨났다.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합류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뜻하지 않게 도움의 손길을 만난 경우도 많았다. 헤이리에 오게 된 것도 그렇게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된 거라고 했다.
인테리어 비용을 줄인 대신 음식 값을 저렴하게 맞추었다. 심플하면서도 정겨운 식당 풍경.
“합정동에서 막걸리집을 할 때 지인들 초대해서 나눔 행사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페이퍼gt; 잡지의 정유희 기자님이 어떤 분을 데리고 오셨더라고요. 그분이 (주)쌈지농부의 천호균 대표님이셨어요."

맛 좋은 막걸리를 기분 좋게 즐기던 천 사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내가 헤이리에 괜찮은 공간을 갖고 있는데, 구경할 겸 꼭 한번 놀러 와요.”

“정말 놀러 간다는 맘으로 순수하게 헤이리를 찾았어요. 좋더라고요. 그동안 요리만 하느라 몰랐는데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웃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천 대표님께서 공간을 제공해줄 테니 식당을 열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하시는 거예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한 끼 식사
막걸리집의 안주 요리만으로는 유기농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들어 팔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는 데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세 사람은 천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즉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좋은 재료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식, 한식을 소재로 잡았다. 어린아이부터 몸이 아픈 사람까지도 마음 편하게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한정식집을 콘셉트로 한 것. 합정동의 막걸리집은 단골손님이었던 한 막걸리 마니아에게 넘겼다. 모든 일이 술술 진행됐다.
언젠가 국밥집을 차리고 싶다는 오은택 요리사.
“사실 유기농이 좋은 줄은 다 알지만 비싸거든요. 그러니 대중적인 식당에서 유기농 재료를 쓰기에는 무리가 있죠. 저희도 100% 유기농이라고는 말씀 못 드려요. 다만 그런 신조를 가지고 100%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말씀은 자신 있게 드릴 수 있겠네요. 지금요? 그래도 60~70%는 돼요.”

일반 서민들이 유기농 음식을 즐길 수 있으려면 단가 조절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뷔페식 쌈밥집으로 전환했고, 인테리어는 헤이리에 있는 작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식당 이곳저곳에 물고기나 꽃을 형상화한 조명작품이나 멋진 그림이 걸려 있는데 모두 현직 작가들이 작업한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전시 공간이 되고, 식당으로서는 인테리어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과 의자, 그릇들까지도 작가들의 도움을 얻어 재활용(recycle)이 아닌 재창조(upcycle)한 작품들이다.

“쌈밥집을 열면서 정말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더 기쁜 것은 그게 서로에게 윈윈이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만약 뭔가 성과가 나오면 그걸 다시 나누고…. 점점 좋은 방향으로 윈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절약한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몫으로 되돌아갔다. 식자재 가격 상승으로 너도 나도 음식 가격을 올리는 이때, 세발자전거는 오히려 1인 식사 비용을 1만원에서 8천원으로 내린 것이다. 또한 5세 미만 어린이들에게는 비용을 청구하지 않고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게 해 그렇게 모은 성금은 전액 참사랑 나눔회에 보내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진심이 손님들에게도 닿았던 것일까. 세발자전거는 오픈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써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친환경 식당’,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은 쌈밥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홍대에서 식당을 할 때는 단골손님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잠깐 놀러온 뜨내기 손님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런데 손님이 손님을 부르고, 점점 재방문율이 높아지더니 이제는 주말에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늘었어요.”

실제로 오후 5시쯤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 식당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린 자녀들과 동행한 젊은 주부들이었다. 5세 미만은 무료라는 가격적인 메리트도 적잖게 작용했겠으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이곳을 찾게 만들었을 터였다. “겉치레 없이 그저 아들 같은 자식들 위해서 마진 생각 않고 식당을 운영하시는 그런 할머니들이 아직은 우리 곁에 있거든요.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어머님 세대가 끝나면 국밥 5천원, 국수 3천~4천원 하는 식당도 다 문을 닫을 거예요. 그때 되면 우리나라 외식 값이 아마 외국처럼 폭등할 거라고 봅니다.”

손님을 친아들처럼 여기며 정성 들인 국밥 한 그릇을 넉넉하게 담아내던 인심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섭섭해진다. 몇천 원짜리 백반을 먹고 식당 문을 나서면 배도 든든하고 마음까지 따뜻해지던 기억, 누구에게나 있지 않던가.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음식에 깃든 정성보다는 매스컴에서 다룬 맛집인지, 그럴듯한 외관을 갖고 있는지에 더 신경 썼는지도 모른다. 오은택 요리사는 서울 강남의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예로 들었다. 1만8천원짜리 파스타 한 접시에는 비싼 인테리어와 화려한 식기, 고급 가구 값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잠시의 허영 때문에 진짜 내 몸에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 잊고 산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요리하는 남자의 매력은 이제부터 시작
최근에는 ‘셰프’라는 외국어까지 붙여가며 남자 요리사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우리나라에서 요리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가정에서는 대부분 요리가 여자의 영역이다 보니 아직도 남자가 요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편치 않게 보는 사람이 많다.
소중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공간. ‘부엌’이라는 팻말이 의미심장하다.
“저희 경력이 다 15년 이상 되는데요, 처음 요리 시작할 때만 해도 남자 요리사가 많지 않았어요. 저도 한때는 ‘남자 새끼가 오죽하면 부엌에서 일을 하냐’고 흉보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웃음) 과거에는 숙식이 제공되는 직장이다 보니 지방에서 사고치고 올라온 분들 중 요리사로 취업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더군요.”(박정윤)

옛날에는 ‘요리는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전문 요리사에 대한 수요도 크게 없었다고. 그러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요리사가 크게 부족해 외국에서 몇 억을 주고 데려오는 일도 벌어진 적이 있었단다. 요즘은 일상을 풍요롭게 가꿔주는 취미로 요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요리가 여자에게 더 맞는 일인 것은 사실이에요. 어머니의 손맛을 내기에 남자들은 너무 거칠잖아요. 하지만 ‘요리사’나 ‘주방장’이라는 직업적인 측면을 본다면 남자들의 리더십이나 분석력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또 큰 재료를 다루려면 솜씨보다는 힘이 필요하거든요. 농어나 도미 같은 생선 대가리는 뼈 두께 때문에 여자 분들은 절대로 못 따요.”(오은택)

남자들의 요리는 어떻게 다른지 묻자 역시 스케일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끓이고, 지지고, 볶고’ 하는 아기자기한 요리가 아니다. 때로는 수십 킬로의 식재료를 쉴 새 없이 지고 날라야 하고, 무더위 속에서도 불 앞에서 요리해야 하며, 하루 열 몇 시간을 서서 힘을 써야 하는 노동이고 체력 싸움이다. 평소에도 자주 요리를 해 먹는 편이냐는 질문에 ‘코미디언이 집에서 웃기는 것 봤느냐’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큰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보인다. 박정윤 씨가 마케팅이나 영업 쪽을 담당한다면, 오은택 씨는 맛을 연구하고, 엄태진 씨는 손님과 소통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식으로 세 바퀴는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늘 같은 마음, 같은 의견일 리는 없다.

“셋 다 성격이다 달라요. 사이 좋아 보인다고요? 우리가 얼마나 싸우는데요. 맛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치지만 그게 다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이에요. 그게 있어야 발전이 있죠. 해결 방법은 간단해요. 셋 중 둘만 오케이하면 진행해요.”
왼쪽부터 오은택, 박정윤 요리사. 삼총사 중 나머지 한 명인 엄태진 씨는 슬로바키아에서 부인의 출산을 돕고 있다.
세발자전거는 출발한 지 아직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튼튼하게 세 바퀴로 굴러가는 만큼 느리지만 꾸준히 이곳저곳 들러보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머릿속에서만 구상하고 있는 계획도 많다.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요리는 국밥 한 그릇이에요. 언젠가 콩나물국밥집이나 설렁탕집을 꼭 하고 싶어요. 하얀 사골 육수로 맛을 낸 설렁탕 하나만 파는 거죠.”(오은택)

“전 호기심도 많고 외향적이라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요. 여러 사람이 어울릴 수 있는 파티 공간도 만들고 싶고, 늦게나마 외식업에 뛰어드시는 분들을 위해 맞춤형 프랜차이즈 사업도 벌여보고 싶어요. 곳곳에 친환경 식공간이 늘어날 수 있도록 많은 분의 동참을 이끌어내야죠.”(박정윤)

인터뷰가 끝날 즈음, 3m 남짓한 뷔페 테이블에 이들 요리사가 정성스레 준비한 성찬이 완성되었다. 국이며 반찬 하나하나에 이름과 산지, 영양소와 효능 등이 아기자기하게 적혀 있었다. 손님들은 천천히 음식을 눈으로 보고 향으로 음미하며 예쁜 접시에 먹을 만큼 담아갔다. 음식에 담긴 햇빛과 공기, 만든 이의 수고를 떠올리면서.

by 트래블러 2012. 2. 24. 09:03

그 여자 권순복, 이사를 가다

그녀의 첫인상은 ‘자신이 만든 공간과 참 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때로 더없이 사랑스럽고 로맨틱하며, 세련된 감각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평범한 주부에서 인테리어 코디네이터로, 지금은 멋진 CEO로 진화 중인 권순복 대표. 파란만장한 성공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녀의 공간을 만났다.
여자, 공간을 스타일링하다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권순복 씨가 이사했다는 소문이 업계에 알음알음 퍼졌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그녀의 새집을 궁금해했다. 분당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는 90년대부터 국내 유수의 잡지에 수많은 인테리어 화보를 제공해온 보물단지였다.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의 3층짜리 타운하우스. 거기에 권순복이라는 이름까지 더해졌으니 얼마나 그림 같은 집이 완성됐을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타일리스트 중 주택에 사는 사람은 별로 없죠. 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어요. 저희 스튜디오 근처에 타운하우스가 생겨 한번 가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다행히 가족들도 흔쾌히 찬성해줬고요.”

그녀가 운영하는 마젠타스튜디오와는 차로 5분 거리. 바로 뒤에 산이 있어서인지 새벽녘이면 멋진 운무에 휩싸여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층이 나뉘어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서재나 홈시어터 룸, 다락방 등 새로운 공간이 생겨 꾸미는 재미도 늘었다. 덕분에 안방은 그녀가 좋아하는 로맨틱 스타일, 거실은 세련된 모던 스타일로 공간마다 다른 콘셉트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재미에 빠져 너무 무리한 나머지 덤으로 감기몸살을 얻긴 했지만.

“이제 이사한 지 일주일 남짓 됐는데 몸살을 앓느라 정신없었어요. 일할 때는 밤샘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원래 체력이 약한 편이거든요. 다행히 남편과 딸들이 저를 많이 도와줘요. 어제 작은 딸이 ‘엄마 이제 좀 살아났나 봐? 나 시험이었는데 엄마 패닉상태인 것 같아 일부러 안 건드렸어’ 그러더라고요.”

큰딸 현지는 벌써 스무 살, 작은 딸 예지는 열일곱 살이다.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그렇게 큰 딸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긴 매일 잡지 화보 촬영이다 인테리어 작업이다 해서 집 안에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며 어수선해도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기특한 딸들이었다. 이제는 대표라는 직함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지만 집에서 잡지 촬영을 하던 전업주부 시절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고.

소녀 시절부터 툭하면 방 안의 가구 배치를 바꾼다거나 멋진 지휘자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등 꾸미는 걸 좋아했다. 결국 취직이 잘된다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긴 했지만 미대에 간절하게 들어가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주부가 되어 평소 배우고 싶었던 것들과 만나면서 마음 한편에 미뤄두었던 끼가 되살아난 셈이다. 집 안 정리든 요리든,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90년대 후반에 <리빙센스>에도 몇 번 소개됐어요. 그때는 다재다능한 주부로 베이킹도 하고 수납도 하고 다 했어요. (웃음) 그러다 인테리어 코디네이터라는 이름도 얻게 됐고요.”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워낙 솜씨가 좋으니 잡지계에 소문이 퍼지고 규모도 점점 커졌다. 나중에는 살림, 육아와 병행하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모든 일을 끊기도 했다. 주부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지배한 시절이었다.

“애가 3학년쯤 되던 해였나, 기자들이 다시 괴롭히기 시작하는 거예요. 고민하다가 다시 조금씩 일을 받아서 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잡지의 화보가 유행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하게 됐는데 진짜 직업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생겼어요."
"처음엔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죠. 직장에 다니다 집에만 있으려니 무료해서 가만있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요리, 인테리어 등등 쉬지 않고 뭔가를 배우러 다녔던 것 같아요. 살림도 열심히 했고요. 그렇게 주부로 살면서 소질을 발견한 거죠."
주부, 커리어 우먼이 되다
한 여성지의 친한 기자가 에스닉 인테리어를 주제로 스타일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권 대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스타일의 인테리어라 오래 망설였는데, 그때 그 후배 기자가 한 말이 촌철살인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고.

“언니는 언제까지 해본 것만 할래? 새로운 것도 도전적으로 해봐야 발전이 있지 않겠어, 그러더라고요. 다 옳은 소리란 생각에 용기를 냈죠. 당시에는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 자체도 생소했고, 참고가 될 만한 자료도 별로 없었어요. 혼자 애를 쓰긴 했는데 나중에 잡지에 인쇄된 화보를 보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전국에 배포된 책을 모조리 사다가 불태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니까요.”스스로 봐도 부끄러울 정도의 퀄리티에 권순복 씨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스타일링 제의가 당장 끊겨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후배 기자는 아무 말이 없었고, 다음 달이 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로운 스타일링을 요청해왔다.

“결국 못 참고 제가 먼저 물어봤죠. 지난 번 화보 엉망이었는데 편집장님한테 혼나지 않았냐고. ‘엄청 깨졌지’ 그러더라고요. 민망한 마음에 그런데도 나랑 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후배가 웃으면서 한번 실수로 뭘 그러냐며 오히려 절 위로해줬어요.”

그 일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로서 프로 의식을 갖는 데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에 그녀에게 주어진 미션은 황토를 테마로 한 아파트 인테리어. 권 대표는 재료와 소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결국 구하지 못한 재료가 있어 촬영 전날 밤에 남편과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경북 안성 까지 다녀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물어물어 도착한 허름한 시멘트 공장. 권 대표의 사정으로 닫힌 공장 문이 열리자 거기엔 그토록 찾아 헤매던 황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순간 정말 황토가 황금처럼 보이더라고요. 게다가 마치 기적처럼 제가 찾던 모든 재료가 거기 다 있었어요. 황토 벽돌, 황토 페인트 등을 차에 한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죠.”

작업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평소의 약한 체력은 어디로 갔는지 지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권순복표 황토 인테리어를 본 담당 기자의 첫 마디는 이랬다고. “언니, 정말 준비 많이 했구나….” “그때부터 제가 하는 일에 오기가 생긴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화보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죠. 다소 무리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투자로 여기고 열심히 했어요. 당시 저를 믿고 응원해주었던 가족들 공이 컸죠.”

권순복 씨는 당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두고 봐. 내가 이 바닥에 권순복이라는 이름 석 자 알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만두지 않아.”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최면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주문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다
권순복 대표가 스튜디오 사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째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오픈하자마자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사업가 기질이 있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권 대표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저는 술도 못 마시고 청탁도 잘 못해요. 사업하려면 싫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못마땅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싫은 사람하고는 일 못해요. 대신 한번 맘에 든 사람하고는 끝까지 가죠.”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 어떤 이들은 매체를 가리기도 하는데 권 대표는 매체의 이름값보다는 그저 친한 기자가 있는 매체만 고집했다. 그것은 일종의 의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고 일한다’는 신조이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도 이러한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튜디오 사업을 하다 보면 흥정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할인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에게 그녀는 가차 없이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깎아드리는 건 문제가 안 돼요. 하지만 제가 깎으면 제 뒤의 후배들도 줄줄이 다 가격을 내려야 돼요. 제가 어떻게 물 흐리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사업이 위기에 처한 거래처 사장이 신제품 촬영할 비용이 모자라다는 얘기에는 흔쾌히 무료로 스튜디오를 빌려주기도 했다. 다행히 신제품은 대박이 났고, 그 보답으로 새집의 커튼을 맡아 시공해주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한 만큼 신뢰도 깊어지고 뗄 수 없는 인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업은 사업인지라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피곤한 상황에 휘말리기도 하고,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도 다반사다. 아무리 일을 좋아하는 그녀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일거리에 심신이 지칠 때도 물론 있다. 하여 열정적으로 일한 만큼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권 대표가 훌쩍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그녀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는 증거다.
“중요한 전시가 있어 출장 겸 가는 때도 있고 1년에 서너 번은 해외에 나가서 재충전을 해요. 어떤 때는 떠나기 이틀 전에 통보하기도 해요. 남편에게는 평소에 이렇게 말해두었죠. 내가 갑자기 어딜 가는 건 정말 미칠 것 같을 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라고요. 다행히 잘 이해해준답니다.”

권 대표는 올 초에도 까사스쿨 권은순 원장과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영국의 한 전시회에서 그녀는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받았다. “권 원장님이 꼭 봐야 할 전시가 있다면서 저를 끌더라고요. 의미심장하게 ‘네가 아마 좋아할 것’이라 덧붙이면서요. 앙드레 풋만이라는 프랑스 디자이너의 전시였어요. 아흔이 넘은 할머니인데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는 분이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한 영상에서 보디가드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백발에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었어요. 얼마나 멋있던지요!”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아흔까지 산다면 저런 모습이고 싶다’고. 그런 소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던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작아져 있었다.

“만약 아흔 살이 될 때까지 일을 한다면 아직 절반도 안 온 거잖아요. 40대가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닌 거죠.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권 대표는 이제 자타가 인정하는 스타일리스트이자 CEO다. 그런 그녀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일하는 게 즐거워 보인다’이다. 그녀가 창조한 공간들은 잡지 화보에서, 모델하우스에서, 브랜드 론칭 행사에서 또 하나의 판타지를 만든다. 많은 주부가 ‘나도 저런 곳에 살아봤으면…’ 하고 가슴 설레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환상. 권 대표는 그러한 환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꽃병 하나, 숟가락 하나까지 애지중지하던 평범한 주부 시절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즐겁게 일하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큰딸 현지도 엄마를 좇아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늘 배움에 갈급했던 그녀였기에 정식으로 디자이너의 길을 걷는 딸이 앞으로 펼쳐갈 미래는 자신이 해온 것과는 전혀 다를 거란 기대감을 품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이 사는 공간을 가꾸는 건 절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마 앞으로 더 전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물건에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거든요.”

이제는 ‘공간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권 대표. 리빙 페어에도 나가고 싶고, 스타일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책도 내고 싶단다. 그녀의 성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므로 빠르든 더디든 언젠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백발을 휘날리며 멋지게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아흔의 디자이너를.



by 트래블러 2011. 12. 28. 06:09

꿈을 찾는 여행학교 이야기
김현아 여행대안학교 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우리가 배움을 얻는 곳은 학교, 학원, 공부방 등 다양하지만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의 학교는 다름 아닌 길 위, 바로 여행 속에서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와 미래를 향한 꿈을 배우는 학교, 로드스꼴라에 찾아가 여행을 학교로 만든 사람, 김현아 교사를 만나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백기광

여행을 꿈꾸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누구에게는 치열했던 일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삶에 에너지를 주는 새로운 자극이 되기도 한다.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남을 행복한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 정처 없이 헤매는 방랑 같은 여행도 있다.

여행으로 세상을 배우는 학교
대안학교 로드스꼴라는 여행을 통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여행학교’다. 미인가 대안학교인 탓에 학력인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 학교처럼 3년제로 운영되며 학기별로 프로젝트를 수행해 졸업 때는 결과물을 제출해야 수료할 수 있다.
“로드스꼴라에 대한 오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일 년 내내 여행만 하는 학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실은 그렇지 않고요. 여행은 한 학기에 한 번, 한 달 정도 하게 됩니다. 나머지는 여행을 준비하고, 여행을 다녀와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로도 충분히 벅차거든요.”
대부분 ‘따분한 학교수업 대신 여행을 하는 학교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식의 기대를 하고 찾아온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니, 절대로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여행하기 전 여행지에 대한 지리, 문화, 사회적 상식은 기본이요, 관련 주제에 대한 전문가 초청 강의만 해도 10회 이상에 감상문도 제출해야 한다. 해외여행에 필수인 외국어 공부는 외고보다 더 철저하며 경우에 따라 제 2외국어도 배운단다. 그 뿐이랴. 여행지에서 낯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는 필수. 어디서나 손쉽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물론, 전문가 급의 사진기술도 익히고 있다.
“최근에는 졸업반 친구들과 함께 ‘백제의 길, 백제의 향기’라는 졸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서울, 부여, 공주, 익산부터 일본까지 백제의 흔적을 좇아가는 대형 프로젝트죠.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각각 자기 나름의 발견을 하게 돼요. 역사나 인류학에 관심을 보이는 친구는 졸업 후 대학에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을 것이고, 이런 식의 스토리를 만드는 여행 자체가 좋은 친구는 여행업계로 진출하고 싶겠죠. 여행을 통해 자신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친구도 있고요. 여행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반드시 여행 관련 업종에 종사하게 되는 건 아니에요.”
김현아 교사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를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대표교사로 ‘아픔을 딛고 미래로 향하는 나라 베트남 이야기’ ‘박영숙을 만나다’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그녀들에 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등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하다. 또 청소년직업센터인 하자센터에서 오랫동안 ‘창의적 글쓰기’ 강좌로 청소년들을 만나오기도 하고 ‘고정희문학상’? 수상자들의 모임 ‘고글리’를 운영하면서 문학에 소질 있는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글로벌 마인드를 익히는 확실한 방법
그런 그녀가 여행을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공정여행’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도가 높아진데서 출발했다. 공정여행이란 쉽게 말해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의 삶과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에서 쓴 돈이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그곳의 자연을 지키는 방식’을 이른다.
그렇게 공정여행을 전파하고자 한 사람들이 모였고, 일부는 여행사 트래블러스맵을, 그리고 김 교사는 대안학교 로드스꼴라를 맡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들을 학교를 운영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돼요. ‘여행이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구나, 여행 자체가 학교가 될 수 있겠구나….’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맞았다는 것을 아이들이 증명시켜준 셈이죠.”
그녀의 지론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학교를 다니며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는 이유는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다. 즉 학교는, ‘내가 평생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곳인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라면 여행은 더없이 훌륭한 학교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20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계획 하에 독립적인 여행을 떠나볼 기회가 거의 없죠. 하지만 배움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 시기 아이들에게 여행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져요. 인생의 거창한 깨달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도 필수적인 삶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지요.”
혹자가 말하듯 여행은 삶의 축소판이다. 대표적인 것이 의식주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드스꼴라에서 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숙소를 제외하곤 독립적인 재정을 운영하며 무엇을 입고, 먹고, 볼 것인지를 결정한다. 매일 학교와 학원, 독서실 등 부모가 정해진 루트만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180도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또 일상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 혹은 나와 비슷한 히스토리를 지닌 사람만을 만나게 되지만, 여행에서는 늘 낯선 사람, 새로운 사람과 만나게 된다. 인생이 만남의 연속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낯선 사람과 어떻게 만나고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그 어떤 교육보다 중요하다.
“네팔 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4,000미터나 되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등반할 때 많은 사람들이 셰르파라고 부르는 핼퍼를 고용해 짐을 운반하거든요. 우리아이들은 자기 짐은 자기가 맡기로 했지만 그래도 공동의 짐이 있었기 때문에 핼퍼가 필요했죠. 그 핼퍼들이 대부분 아이들 또래였어요. 열흘이 넘게 여정을 함께하면서 친해지고 대화도 나누면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쟤하고 나는 같은 나이인데 나는 부모 돈으로 이렇게 해외여행을 다니고 저 아이는 학교는커녕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그 이유가 뭘까.’ 말로는 글로벌시대니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산 체험을 한 아이들은 진짜 이해가 뭔지 저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진정한 교육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
로드스꼴라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학년이 없다는 것이다. 매년 기수별로 신입생을 뽑는데 나이는 15세부터 22세까지 다양하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동갑내기하고만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또 어린데도 배울 점이 많은 친구가 있고 나이 먹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친구도 있지요.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나이대를 초월한 교감을 얻기도 해요.”
그래서 형, 언니, 선생님 등의 호칭을 빼고 자신만의 호칭을 스스로 정해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로드스꼴라만의 차별성이다. 김 교사도 학교 내에서는 선생이 아닌 ‘어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했다.
이렇듯 보도듣도 못한 형식 파괴의 배움터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변하고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을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듯했다. 김현아 교사에 의하면 그 변화는 놀라움을 넘어 감동적일 정도라고.
“창준이는 1학기 때만 해도 적응을 못하는 듯 보였어요. 어떤 것을 보여줘도 늘 멍하니 있는 모습이더라고요. 사실, 저희 수업은 몇 시간을 연속해서 스트레이트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긴 하거든요. 어쨌든 그랬던 창준이가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진 것이 첫 번째 변화였다. 세상에 대한 질문도 많아지고, 제법 수준 높은 책도 찾아 읽게 됐단다. 무엇보다 가장 흐뭇했던 것은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발휘했던 리더십과 협동심이었다.
“4,000미터나 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십대 아이들에게 결코 만만한 코스가 아니에요. 자기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들은 제몫의 짐까지 지고 올라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죠. 창준이는 체력이 좋은 편이라 먼저 올라갔는데 한참 후 보니 다시 뛰어내려오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경사가 꽤 급한 편이라 제가 깜짝 놀라 왜 내려오냐 물으니 ‘어딘이 짐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제가 들어드리려고요.’ 그러는 거예요.”
누가 요즘 아이들은 인내심도 없고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했는가. 김 교사가 함께 여행했던 아이들은 적어도 서로 힘이 되어주고 이끌어주는 과정 속에서 ‘진짜’ 인생이 완성된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었다.
“여행이라는 게 마냥 설레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처음에는 무조건 국내 도보여행을 하는데 발에 물집 잡히는 것은 다반사고, 때로는 부상도 당하죠. 누구는 속도가 느리고 능력이 부족하기도 해요. 하지만 ‘경쟁’만 해서는 결코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없거든요. 혼자 기를 쓰고 간다고 해서 그 길이 즐거운 것도 아니고요.”
로드스꼴라에는 교복도 없고 교과서도 없다. 대신 교실에서는 흥겨운 합주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은 교과서 대신 두꺼운 인문학 책을 품고 다니며, 고민과 투정 대신 프로젝트에 대한 협의와 내일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은 정부지원이 없기 때문에 미인가 대안학교에 다니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하지만 저희 같은 작은 학교가 창출해 내는 재미있는 상상력이 공교육과 만난다면 분명 대단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거라 믿거든요. 그때까지 로드스꼴라는 계속 재미있는 일들을 벌여나갈 작정이에요.”

by 트래블러 2011. 12. 16. 23:31
우리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전성은 前 거창고등학교 교장

일평생을 교육계에 몸담아온 퇴임 교장이 책을 냈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왜 학교는 불행한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의 지난 역사가 그려진다. 진정한 교육전문가가 부재한 현실 속에서 원로 교육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폐부를 꿰뚫는 일침이 된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오정훈



지루한 장마가 끝날 생각을 않던 어느 목요일, 거창에서 막 올라온 전성은 교장을 만났다. 훌쩍 큰 키에 선 굵은 주름과 깊은 눈빛.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일평생을 투신한, 노회한 교육자의 카리스마가 번득이는 외모였다. 몇 시간 버스에 몸을 싣고 온 터라 피로가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성큼성큼 걷는 품이 힘찼다. 마침 때가 되어 근처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는데 노교장은 거리낌 없이 유명 프랜차이즈 피자 가게를 가리킨다. 피자를 즐겨먹는 퇴직 교장선생님이라니. 몇 번이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전성은 교장은 40여년 넘게 경남 거창고등학교 등에서 교사,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다. 나름의 교육관과 뚜렷한 교육개혁 정신으로 지난 참여정부 때는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을 2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일평생 일궈온 주옥같은 교육관을 정리한 책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퇴임 교장, 학교의 안부를 묻다
지난 6월 그가 출간한 교육 에세이 ‘왜 학교는 불행한가’는 가장 원론적인 교육의 의미와 학교의 가치를 묻는 책이었다. 과거 학교의 목적은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든가, 학교 교육으로는 결코 인격을 바꿀 수 없다는 등 거침 없는 그의 교육론은 지난 세기에는 금지어 취급을 받았고, 오늘날 봐도 가히 혁신적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제국주의적 학교교육 제도 아래서 교육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까? 교육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과연 국익일까?’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 우리 학교의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오로지 경쟁, 경쟁만을 부르짖는 오늘날의 교육 풍토에서 그는 의연하게 ‘교육의 목표는 평화’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마치 경쟁이 교육의 목표인 양, 성공하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인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쟁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도 제국주의에서나 쓰이던 사람을 통치하던 수단이에요. 학교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시합’을 해야 해요. 경쟁은 너와 내가 겨뤄서 이기면 살아남고, 지면 나가떨어지는 거지만, 시합은 서로 같이 잘 되자는 거거든요.”
그는 경쟁의 한 예로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들었다. 과거제는 관료를 뽑기 위한 등용문이었지 절대 진리탐구를 목표로 한 제도가 아니었다는 거다. 조선시대에서나 통용되었던 고루한 가치를 여전히 고집하는 것은 무지와 편견의 소치다.
전 교장은 지난 노무현 정권 시절, 교육혁신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약 2년간 교육 개혁에 힘쓰기도 했다. 당시 그의 주도로 연구하고 쓰였던 ‘참여정부 교육백서’는 현재의 입학사정관제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교육개혁의 요지는 성적만 가지고 애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91점과 89점이 무슨 차이냐 이 말이죠. 그건 그 학생에 대한 정보가 못돼. 정보라는 건 수학을 좋아하는지, 국어를 좋아하는지, 시를 잘 쓰는지 소설을 잘 쓰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와 같은 것들이죠. 이런 것들을 포트폴리오에 기록해 놓으면 대학은 그걸 보고 학생을 뽑으면 됩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그 학생의 교육이력을 보고 뽑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학교도, 선생도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르쳤는지 기록으로 남겨 단순한 선발 경쟁이 아닌 가르치기 경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의 입학사정관제는 잘못 가고 있다며 전 교장은 혀를 찼다.
“준비단계만 5년이 필요합니다. 교과서도 바꿔야 하고 바뀐 교과서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도 교육시켜야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줄 수 있는 교육시스템도 확립시켜야 하죠. 2008년에 시작됐으면 아무리 빨라도 2012년도에나 적용시킬 수 있는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작정 진행하니 아이들의 부담만 가중되고 있지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제도도 요동치는 게 현실이다 보니 교육이 백년지계(百年之計)가 아니라 삼년지계도 못 된 지 오래다. 많은 학부모들이 학교에 대해 불신과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른다.

진정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전성은 교장이 책을 내고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옛 제자들 몇몇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더란다. 그 중 한 명이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 제목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목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거창고를 다니면서 정말 행복했거든요.”
그의 말마따나 거창고등학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학교’다. 수식어도 많다. 울타리도, 교문도 없는 학교, 인성교육과 입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학교 등등.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등과 같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직업 선택의 십계만 보아도 거창고가 일반 고등학교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가 책에 쓴 것, 그리고 교육에 대해 말하는 내용들은 혼자만의 오롯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의 거창고등학교를 있게 한 고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원경선 이사장님 두 분으로부터 배우고 얻을 것을 때가 되어 알린 것뿐이죠.”
전성은 교장의 부친이기도 한 고 전영창 교장은 195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부채가 많은 한 학교를 맡게 된다. 그게 거창고등학교의 시작이다. 오랜 역사만큼 사회적, 정치적 세파로부터 부침도 많이 겪었다. 전영창 교장은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주도한 학생들을 퇴학시키라는 교육감의 지시를 거부하는 바람에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고.
어쨌든 지금은 전교생의 대부분이 4년제 대학에 진학, 그 중 1/4정도 되는 학생들은 소위 SKY대학이라 불리는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으로 유명해 매년 우수한 중학생들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는 이 시골학교에 몰려든다. 그 배경에는 전영창, 전성은 전 교장을 비롯 거창고를 거쳐간 수많은 선생님들의 치열한 고민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 국력은 아이들 개개인의 재능과 소질, 관심을 살리는 거거든. 어떤 사람들은 엘리트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에요. 삼성 보세요. 10만 명이 뼈 빠지게 일해서 삼성 회장 한 사람 먹여 살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성은 교장은 진정 옳은 교육을 위해서는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교육 선진국을 보면 학교 설립이 허가제가 아닌 자유로운 신고제임을 알 수 있다. 교과서 또한 국정이 아니라 누구나 교과서를 쓸 수 있고, 학교와 교사, 학부모에 의해 채택 여부가 달려 있다. 즉, 배우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방법이야말로 진정한 선진교육이라는 것이다.
“20년 전에 비하면 얼마나 많이 나아졌습니까? 살기도 좋아졌고, 국민의식도 높아졌지요. 이만큼 사회가 성숙해졌으면 이제 국가가 교육에 손을 놔야할 때가 됐어요. 결정권을 단위학교에 맡기고 행정지원을 해줘야 돼요. 행정을 잘하고 있는지는 컨설팅을 해주는 독립적인 기구를 두고 평가를 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교육청, 교과부도 다 컨설팅을 받아야 합니다. 즉, 상부기관이 하부 기관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학교, 교육행정 기구, 평가 기구 이 셋이 수평적 보완관계를 가질 때 진정한 교육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른 어떤 사항보다 제도 개혁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다.

결국 바뀔 것이라는 올곧은 희망
매번 교육 개혁이라고 새로운 안이 나올 때마다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사교육 철폐’다. 마치 사교육이 사라지지 않으면 공교육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을 심어주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성은 교장은 이는 교육개혁의 진정한 쟁점을 흐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일침했다.
“전두환 정권 때 과외금지령이 내렸을 때 어땠습니까? 오히려 음성과외가 판을 쳤어요. 사람들은 증상과 원인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교육 시장이 공교육을 압도할 정도로 커진 것은 단순히 증상일 뿐입니다. 증상을 없앤다고 해서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학원 문제는 결코 교육 문제의 본질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무상급식 문제도 교육 문제가 아니라 복지문제일 뿐이죠. 본질에 벗어난 쟁점을 던져놓음으로써 교육관련단체들이 말려들게 만들고 그 사이에 교육부는 화살을 피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미래를 낙관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 성숙된 만큼 ‘교육 분권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 참여정부 시절, 그가 입학사정관제를 처음 내놓았을 때 결사반대를 외치던 관계자들이 지금은 교과부 요직을 맡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지배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라는 전 교장의 주장은 분명 이상주의자가 꿈꾸는 미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금껏 계속 나은 방향으로 흘러왔지 않았냐?”는 확신에 찬 질문을 받고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우리가 좀더 의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그 속도가 더 빨라지겠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수록 우리 교육 현장은 그만큼 빨리 우리가 꿈꾸는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자유, 평등, 공존…. 교과서 속에나 나오는 가치가 아니다. 그 가치를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교사, 학교가 있는 한 대한민국의 교육에도 희망은 있다.
by 트래블러 2011. 12. 1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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