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김치명인 강순의 여사
트래블러
2010. 7. 23. 00:36

![]() 생명의 음식을 만드는 종부의 손길 초여름의 햇살은 뜨겁고 순정하다. 그대로 흙 속에 스며들어 금방이라도 생명 하나를 틔워낼 기세다. 낮은 담 너머로 그 햇빛을 오롯이 받으며 일행을 맞던 강순의 여사의 인상도 그랬다. 아담하지만 복스러운 인상이 죽어가는 것도 살려내고 남에게 받기보다는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종갓집 맏며느리 그 자체다. 강 여사의 안내를 받아 집 구경부터 시작했다. 붉은빛이 도는 베이지색 단독주택 안에 들어가 보니 과연 전통 음식을 하는 이답게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1층은 부엌과 응접실, 지하에 교육장을 마련해두었고, 2층은 남편과 둘이 오순도순 사는 살림집으로 꾸며놓았다. 강순의 여사는 한국 전통 김치의 맛을 가장 잘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는 김치 전문가다. 그 손맛이 얼마나 소문이 났으면 2000년부터 서울시농업기술센터로부터 전통 음식 교육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난해 마련했다는 경기도 광주 오포의 새 거처에는 40평 규모의 교육장과 일정 온도를 유지해주는 장아찌 보관고까지 갖췄다. 부엌과 창고 곳곳에는 대형 김치냉장고 열댓 개가 자리하고 있어 살림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뒤뜰 한편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묻혀 있는 수십 개의 항아리 속에는 7년 된 묵은 김치부터 연도별로 담근 김치가 가득 있고, 그 곁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을 담은 장독 1백여 개가 열을 지어 오롯이 햇빛을 받으며 숨 쉬고 있다. 이사하는 데만 한 달 반이 걸렸다며 고개를 휘휘 젓는 강 여사의 고생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직도 나주에서 못 가져온 장독이 반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고작 280ℓ짜리 냉장고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개 초보 주부는 감히 상상도 못할 큰살림임에 분명하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강순의 여사는 일행을 끌고 “덥다, 더워!”를 연발하면서도 교육장, 보관고, 그릇방, 주방 등등을 살뜰히 보여주었다. “수업하고 바로 온 거여. 바빠서 인터뷰하자는 걸 다 관두자고 했는데 여기는 어떻게 날을 잡았으까?” 충청도와 전라도의 언어가 뒤섞인 구수한 사투리가 퉁명스러운 듯 친절했다. 매주 금요일에 자택 교육장에서 오전/오후 반으로 나눠 50여 명의 수강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외부 강의가 쇄도해 눈코 뜰 새 없다는 그녀.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고된 살림을 다 짊어지느라 이젠 여기저기 고장도 나건만, 원천을 알 수 없는 에너지는 그녀를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게 한다. 이날만 해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텃밭에서 일하다 광주 시내에 가 서 강의를 하고 돌아온 참이었으니 말이다. “자네들만 아니면 지금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일할 시간을 잠시라도 빼앗긴 것이 영 아쉽다는 듯 텃밭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각한 일중독임에 틀림없었다. 바쁘게 동동거리는 강 여사를 자리에 앉히고 김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름에 빨간 김치는 맛이 없어. 굵은 고춧가루 듬성듬성 갈아 넣은 물김치가 맛있지.” “김치가 맛있으려면 다섯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돼. 첫째는 적당히 잘 익고, 둘째는 익을 때까지 배춧잎이 초록색을 유지해야 되고, 셋째는 군내가 나지 않아야 하고, 넷째는 무르지 않고 아삭아삭 씹혀야 하고, 다섯째는 사이다같이 톡 쏘는 맛이 나야 돼.” “그렇게 다 갖춘 김치가 없어.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로 어려운 음식이야.” “진짜 전문가는 우리같이 시집살이하면서 몸으로 직접 배운 사람들이야. 그걸 알아줘야 되는데, 그저 예쁘고 사근사근한 여자들만 좋아하지. 내가 진짜야.” 김치 이야기만 해도 사흘 낮밤이 모자랄 것 같았다. 조신한 종부 이미지만 생각했더니 웬걸, 억척스러운 전라도 아줌마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가 투박하니 귓가에 쏙쏙 박히는 게 왜 그녀가 김치 요리 전문가로 인정받는지 알 것 같다. 그간 그녀를 거쳐간 학생만도 수천 명에 이른다. 하지만 최근 몇몇 제자가 그녀로부터 배워간 김치를 마치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매스컴에 흘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며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92년도에 내가 김치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는 고추씨 김치에 대해 아무도 몰랐어. 왜냐면 우리 집안에서 대를 이어 내려온 김치니까. 그걸 가지고 식당까지 열었을 때도 난 아무 말 안 했어. 그런데 TV에 나와서는 자기네 친정엄마가 가르쳐줬다고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 안 그래?” 당장 잘못을 정정하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묵묵부답인 탓에 속상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도 올렸다. 그녀가 원한 것은 사실대로 인정하기를 바란 것인데, 일이 결국 이렇게 돼 그녀는 최근 집안 음식인 ‘고추씨 백김치’로 특허 신청을 내기도 했다. 그저 맛있는 김치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 특허를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오랜 시간 만들고 가르쳐온 집안의 김치가 다른 포장을 하고 돈벌이로 이용된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섭섭했던 것이다. ![]()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 마음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남편 나도균 씨 역시 외아들이다. 시할아버지는 참봉으로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고, 시댁은 나주시를 통틀어 손꼽히는 갑부였다.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 고조할머니는 자기 땅만 밟다 돌아가셨다잖아.” 그러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 나이 30대 때였다. 안정적인 교사 자리를 그만둔 남편은 시골 땅을 팔아 사업을 시작했다. 오락실, 사진관 등등 안 해본 일이 없지만 받을 돈 못 받고,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챙겨주는 성격에 시작하는 사업마다 족족 망했다. “2년에 한 번씩 꼭 한 탕을 하더라니까. 어떡해. 내가 나서야지. 하숙도 하고 식당도 하고, 길거리에서 장사도 해봤어. 새벽에 애 낳고 아침에 바로 일하러 나간 적도 있으니까….” 뭐니 뭐니 해도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재주는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음식 솜씨였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 소개로 알음알음 폐백과 이바지 음식을 조금씩 해줬다. 그러자 사람들은 종가의 음식 맛을 알아봤다.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던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서비스로 끼워준 장아찌와 김치는 더욱 인기를 끌었고, 급기야는 이 맛을 어떻게 내느냐며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시에서 전화가 왔다. 강의 요청이 쇄도한다며 올라와서 장아찌 담그는 법 좀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치와 장아찌 전문가로 가르치는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어느새 20년이 되어가고 있다. 음식 시집살이를 오롯이 겪어낸 종갓집 맏며느리, 가정 경제를 책임지던 억척 주부, 이제 한국 음식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남편의 사업이 안 풀리던 시절, 매년 수천 포기씩 담그던 김장을 못하게 됐을 때”라고 주저 없이 꼽는 강순의 여사. 그녀에게는 지독한 생활고보다 종갓집인데 김장을 하지 못해 사람들과 나눌 수 없었던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던 것이다. 마늘 자르는 기계에 절단돼 검지 길이만큼이나 뭉툭해진 가운데손가락, 고된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허리와 다리. 소문난 살림꾼 강순의 여사가 되기까지 겪은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가 그녀의 손끝에 착실히 배어 결국은 김치 맛으로 우러난 게 아닐까 싶다. 예순넷 그녀가 소화하는 일의 양을 보면 누구라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하루에 수백 명의 식사를 챙겨 보내는 것쯤은 그녀에게 일도 아니다. 며칠에 걸쳐 김치 2천 포기를 혼자 담그기는 것은 기본, 거기에 들어가는 멸치젓, 가자미젓, 게젓 등 수십 가지의 젓갈 모두 싱싱한 재료만 엄선해서 직접 만든다. 그뿐인가. 텃밭 농사를 직접 짓고, 2백여 개 항아리의 된장과 고추장을 담그고 관리하면서도 이건 언제 만든 것이고, 언제쯤 퍼 올릴 것인지 하나도 빠뜨리는 법이 없다. 이래서 종갓집 맏며느리는 타고나야 하나 보다 싶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게도 시집살이로 눈물바람이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음식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타박 받은 일이 없었다고. “음식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으니까. 시어머니는 내가 한번 가르쳐주면 다 잘한다고 했어. 한번 가르쳐주곤 다 나한테 맡겨버렸으니까. 양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힘들었지. 울기도 많이 울고. 매 끼니 밥을 가마솥으로 세 솥은 해대야 했어. 음식이라 할 것도 없지. 된장국 아님 김칫국. 거기에 김치가 다였어. 머슴들한테 주는 김치는 하얀 거나 돼? 시퍼런 거. 근데 그 김치가 참 맛있었어. 고추씨 백김치도 거기서 나온 거야.” 그녀가 알고 있는 음식에 대한 거의 모든 지혜는 시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이라 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로부터,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로부터, 그렇게 2백여 년을 내려온 나씨 집안 여자들의 음식 솜씨는 어떤 재화나 물건보다 더 소중한 집안의 가보였다. “시어머니? 반은 남자야. 통이 크고 못하는 게 없었어. 동네에 큰 잔치나 행사가 있다 하면 시어머니가 혼자 가서 다 하고 오셨어. 나주에서 우리 어머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니까?” 간장, 고추장, 된장만 있으면 무엇이든 맛깔나게 뚝딱 만들어내는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그야말로 마술 같았다고. 어떤 요리를 해도 쉽게, 자연 그대로의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내는 재주는 그대로 강 여사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이 나한테 김치 만드는 비법이 뭐냐고 자꾸 묻는데, 사실 비법이 뭐 따로 있어? 시집와서 4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음식해서 남들 퍼주면서 그렇게 살았어. 학원 가서 잠깐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쫓아와?” 그래도 뭔가 특별한 재료가 있지 않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더니 못이기는 척하며 멸치가루, 톳, 다시마 육수, 콩물, 새우가루 등 독특한 김치 재료 명단을 끝없이 줄줄줄 읊어준다. 그뿐 아니다. 대추고추장, 감고추장 등의 다채로운 장 종류, 김부각, 연부각, 아카시아부각 등 모두 시어머니로부터 배웠다는 저장 음식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있다. 한참 얘기하다가도 문득 “나씨 집안 비밀인데 너무 많이 얘기해준 것 같다”며 크게 웃는다. “이제 내가 죽으면 없어지잖아. 며느리 얘기는 하지도 마. 음식에 관심도 소질도 없어. 뭐, 시집살이를 대물림해주고 싶지도 않지만. 아직 장가 안 간 셋째 아들, 요 녀석이 데리고 올 색시만 기다리고 있는 참이야.”(웃음) 그녀가 손으로 쭉 찢어 입에 넣어준 고추씨 백김치는 아삭아삭 입 안에서 자연의 노래를 만들어냈다. 짜지 않고, 시원하고, 감칠맛까지 맴도는 이 김치, 너무 맛있어서 다른 이에게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인터뷰 중에도 몇 번씩 강의 요청 전화가 이어지고, 바쁘고 힘들다면서도 강의를 해달라는 곳은 거의 거절하는 법이 없다. 배우고 나가서는 딴말을 일삼는 제자들이 징글징글하다면서도 김치 맛을 궁금해하는 주부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맛있는 김치를 먹게 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그녀의 손끝은 마를 날이 없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