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성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매일매일 글쓰기 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혼자였더라면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으리라.

단어, 문장 수련을 대충 거쳐

이달 부터는 단문을 쓰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애정이 있어야 관심도 가고, 관심이 있어야 보이는 게 있고 쓸 것도 많다.

그래서 이번주에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고, 더러워보이는 것들..

그러한 속성을 가진 사물들을 찾아 장점, 가치 위주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

발바닥

우리 몸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것이 발바닥이다. 땅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느라 늘 짓눌리고 못생긴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만약 발바닥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이 과연 직립보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 탑의 아랫부분은 기단이라고 해서 전체 높이를 지탱해야 하기에 꼭대기보다 훨씬 넓은 면적으로 만들어진다.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면적이 넓지 않더라도 의자나 탁자, 자동차처럼 네 개의 다리로 안정감있게 지탱을 한다. 무게 가진 것들 중에서 두 개라는 불완전한 숫자로 안전하게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두 발과 자전거밖에 없다. 자전거도 인간의 평형감각에 의존한 것이지 홀로 설 수는 없으니 엄연하게는 인간의 두 발 뿐이라고 하겠다. 다시 발바닥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토록 큰 고생을 하니, 냄새나고 더러울 수밖에. 때로 굳은 살도 박히고, 세균이 전염되어 무좀도 생긴다. 그렇게 더럽고 하찮은 신체부위로 치부되어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들은 발바닥을 감추려고만 한다. 예의를 차려야 할 곳에서 맨발을 드러내는 것이 실례로 여겨지는 것도 그 이유다. 인간사회 또한 그렇다. 험하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맨 아래를 받쳐주는 중요한 사람들인데,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발바닥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발바닥이 없으면 사람이 제대로 설 수 없듯이, 이 발바닥 계층이 없으면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못배우고, 몸으로 일하고, 아래에 있는, 혹은 구걸하는 사람들을 고마워하고 귀히 여겨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마운 발바닥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듬

살갗 위에 생기는 옅은 살색의 비늘 같은 껍질이다. 일종의 잉여물이라 볼 수 있다. 세포가 계속해서 새롭게 몸을 불리면서 불가피하게 떨어져 나오는 찌꺼기일 수도 있겠다. 주로 두피에서 많이 발생해, 지저분함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하지만 사실 비듬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계속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다. 생명이 유지되는 한 비듬은 계속해서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다. 산소를 들이마시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인간이 그러한 생명 활동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탄생되는 비듬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일면 모순된 경향으로 보인다. 자의든 타의든 떨어져나간 그 희생정신을 오히려 높이 사야할 것이다. 한때는 살아숨쉬는 내 몸의 일부였다가 어느 순간 도태되어 떨어져 나가 한 점 티끌로 사라져 버리는 그대의 비듬에게 경배를 보내길.

배꼽

배꼽이 탯줄이 있었던 자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배꼽이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무슨 필요가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신체기관 중 존재의 이유가 미미한,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바로 배꼽이 아닐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고, 저절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우리의 존재 위에는 어머니가 있고 그 위엔 어머니의 어머니가 있으며, 그 위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있다. 이는 신앙보다, 세상 그 어떤 진리보다 중요한 진실이지만, 생활의 혼잡함 속에서 가장 잊히기 쉬운 삶의 전제이기도 하다. 즉, 현재의 내가 탄생하기까지의 지난한 역사를,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는 것이다. 기껏해야 어제, 지난 주, 학창시절 생각만 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손가락이 만들어지고, 장기가 만들어지던 순간,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몸집을 불려가던 시절, 자궁을 통과해 세상의 빛과 조우한 순간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시절은 오직 배꼽만이 기억하고 있다. 뇌, 뼈, 살이며 근육, 모든 몸뚱이가 그 때를 잊고 무럭무럭 성장하는 동안 배꼽만은 탯줄을 달고 있던 그 모양 그대로 패여 자라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늘 배꼽을 바라보며 우리가 세상에 처음 왔을 때를 상기할 수 있도록 -물론 머리로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 배꼽은 우리 몸 한 가운데에서 죽을 때까지 그 모양 그대로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딱지

딱지는 상처가 난 데서 피나 고름, 진물 같은 것이 흘러나와 굳어진 것이다. 상처의 정도에 따라 딱지의 크기와 두께가 달라지는데, 대부분 손톱자국이 나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고 보기에 그닥 아름답지 않은 갈색을 띤다. 상처가 아무는 동안은 지독한 가려움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해 딱지를 강제로 떼면 피가 나거나 흉이 지게 된다. 즉, 딱지는 기다림이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기 까지 묵묵히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고통이 두껍고 딱딱하고 못생긴 딱지가 되어 떡하니 상처 위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때 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리란 걸 알지만 우리는 딱지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다. 자꾸만 거슬리고 신경이 쓰인다. 언제 떨어질까 궁금하기도 하고, 뗄까 말까 고민되기도 한다. 내 생명을 지탱하며 쉼 없이 뛰고 있는 심장은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산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엄청난 존재감이다. 신경쓰이는 것을 참고, 견디다 보면 어느새 딱지의 존재가 희미해지는데 그 때가 되어서야 딱지는 이별을 고하고, 그가 떠난 자리엔 희고 보얀 새살이 드러나 있다. 딱지의 기적, 기다림의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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