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권순복, 이사를 가다

그녀의 첫인상은 ‘자신이 만든 공간과 참 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때로 더없이 사랑스럽고 로맨틱하며, 세련된 감각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평범한 주부에서 인테리어 코디네이터로, 지금은 멋진 CEO로 진화 중인 권순복 대표. 파란만장한 성공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녀의 공간을 만났다.
여자, 공간을 스타일링하다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권순복 씨가 이사했다는 소문이 업계에 알음알음 퍼졌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그녀의 새집을 궁금해했다. 분당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는 90년대부터 국내 유수의 잡지에 수많은 인테리어 화보를 제공해온 보물단지였다.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의 3층짜리 타운하우스. 거기에 권순복이라는 이름까지 더해졌으니 얼마나 그림 같은 집이 완성됐을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타일리스트 중 주택에 사는 사람은 별로 없죠. 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어요. 저희 스튜디오 근처에 타운하우스가 생겨 한번 가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다행히 가족들도 흔쾌히 찬성해줬고요.”

그녀가 운영하는 마젠타스튜디오와는 차로 5분 거리. 바로 뒤에 산이 있어서인지 새벽녘이면 멋진 운무에 휩싸여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층이 나뉘어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서재나 홈시어터 룸, 다락방 등 새로운 공간이 생겨 꾸미는 재미도 늘었다. 덕분에 안방은 그녀가 좋아하는 로맨틱 스타일, 거실은 세련된 모던 스타일로 공간마다 다른 콘셉트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재미에 빠져 너무 무리한 나머지 덤으로 감기몸살을 얻긴 했지만.

“이제 이사한 지 일주일 남짓 됐는데 몸살을 앓느라 정신없었어요. 일할 때는 밤샘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원래 체력이 약한 편이거든요. 다행히 남편과 딸들이 저를 많이 도와줘요. 어제 작은 딸이 ‘엄마 이제 좀 살아났나 봐? 나 시험이었는데 엄마 패닉상태인 것 같아 일부러 안 건드렸어’ 그러더라고요.”

큰딸 현지는 벌써 스무 살, 작은 딸 예지는 열일곱 살이다.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그렇게 큰 딸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긴 매일 잡지 화보 촬영이다 인테리어 작업이다 해서 집 안에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며 어수선해도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기특한 딸들이었다. 이제는 대표라는 직함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지만 집에서 잡지 촬영을 하던 전업주부 시절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고.

소녀 시절부터 툭하면 방 안의 가구 배치를 바꾼다거나 멋진 지휘자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등 꾸미는 걸 좋아했다. 결국 취직이 잘된다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긴 했지만 미대에 간절하게 들어가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주부가 되어 평소 배우고 싶었던 것들과 만나면서 마음 한편에 미뤄두었던 끼가 되살아난 셈이다. 집 안 정리든 요리든,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90년대 후반에 <리빙센스>에도 몇 번 소개됐어요. 그때는 다재다능한 주부로 베이킹도 하고 수납도 하고 다 했어요. (웃음) 그러다 인테리어 코디네이터라는 이름도 얻게 됐고요.”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워낙 솜씨가 좋으니 잡지계에 소문이 퍼지고 규모도 점점 커졌다. 나중에는 살림, 육아와 병행하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모든 일을 끊기도 했다. 주부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지배한 시절이었다.

“애가 3학년쯤 되던 해였나, 기자들이 다시 괴롭히기 시작하는 거예요. 고민하다가 다시 조금씩 일을 받아서 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잡지의 화보가 유행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하게 됐는데 진짜 직업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생겼어요."
"처음엔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죠. 직장에 다니다 집에만 있으려니 무료해서 가만있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요리, 인테리어 등등 쉬지 않고 뭔가를 배우러 다녔던 것 같아요. 살림도 열심히 했고요. 그렇게 주부로 살면서 소질을 발견한 거죠."
주부, 커리어 우먼이 되다
한 여성지의 친한 기자가 에스닉 인테리어를 주제로 스타일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권 대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스타일의 인테리어라 오래 망설였는데, 그때 그 후배 기자가 한 말이 촌철살인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고.

“언니는 언제까지 해본 것만 할래? 새로운 것도 도전적으로 해봐야 발전이 있지 않겠어, 그러더라고요. 다 옳은 소리란 생각에 용기를 냈죠. 당시에는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 자체도 생소했고, 참고가 될 만한 자료도 별로 없었어요. 혼자 애를 쓰긴 했는데 나중에 잡지에 인쇄된 화보를 보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전국에 배포된 책을 모조리 사다가 불태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니까요.”스스로 봐도 부끄러울 정도의 퀄리티에 권순복 씨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스타일링 제의가 당장 끊겨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후배 기자는 아무 말이 없었고, 다음 달이 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로운 스타일링을 요청해왔다.

“결국 못 참고 제가 먼저 물어봤죠. 지난 번 화보 엉망이었는데 편집장님한테 혼나지 않았냐고. ‘엄청 깨졌지’ 그러더라고요. 민망한 마음에 그런데도 나랑 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후배가 웃으면서 한번 실수로 뭘 그러냐며 오히려 절 위로해줬어요.”

그 일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로서 프로 의식을 갖는 데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에 그녀에게 주어진 미션은 황토를 테마로 한 아파트 인테리어. 권 대표는 재료와 소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결국 구하지 못한 재료가 있어 촬영 전날 밤에 남편과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경북 안성 까지 다녀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물어물어 도착한 허름한 시멘트 공장. 권 대표의 사정으로 닫힌 공장 문이 열리자 거기엔 그토록 찾아 헤매던 황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순간 정말 황토가 황금처럼 보이더라고요. 게다가 마치 기적처럼 제가 찾던 모든 재료가 거기 다 있었어요. 황토 벽돌, 황토 페인트 등을 차에 한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죠.”

작업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평소의 약한 체력은 어디로 갔는지 지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권순복표 황토 인테리어를 본 담당 기자의 첫 마디는 이랬다고. “언니, 정말 준비 많이 했구나….” “그때부터 제가 하는 일에 오기가 생긴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화보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죠. 다소 무리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투자로 여기고 열심히 했어요. 당시 저를 믿고 응원해주었던 가족들 공이 컸죠.”

권순복 씨는 당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두고 봐. 내가 이 바닥에 권순복이라는 이름 석 자 알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만두지 않아.”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최면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주문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다
권순복 대표가 스튜디오 사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째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오픈하자마자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사업가 기질이 있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권 대표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저는 술도 못 마시고 청탁도 잘 못해요. 사업하려면 싫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못마땅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싫은 사람하고는 일 못해요. 대신 한번 맘에 든 사람하고는 끝까지 가죠.”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 어떤 이들은 매체를 가리기도 하는데 권 대표는 매체의 이름값보다는 그저 친한 기자가 있는 매체만 고집했다. 그것은 일종의 의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고 일한다’는 신조이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도 이러한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튜디오 사업을 하다 보면 흥정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할인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에게 그녀는 가차 없이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깎아드리는 건 문제가 안 돼요. 하지만 제가 깎으면 제 뒤의 후배들도 줄줄이 다 가격을 내려야 돼요. 제가 어떻게 물 흐리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사업이 위기에 처한 거래처 사장이 신제품 촬영할 비용이 모자라다는 얘기에는 흔쾌히 무료로 스튜디오를 빌려주기도 했다. 다행히 신제품은 대박이 났고, 그 보답으로 새집의 커튼을 맡아 시공해주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한 만큼 신뢰도 깊어지고 뗄 수 없는 인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업은 사업인지라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피곤한 상황에 휘말리기도 하고,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도 다반사다. 아무리 일을 좋아하는 그녀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일거리에 심신이 지칠 때도 물론 있다. 하여 열정적으로 일한 만큼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권 대표가 훌쩍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그녀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는 증거다.
“중요한 전시가 있어 출장 겸 가는 때도 있고 1년에 서너 번은 해외에 나가서 재충전을 해요. 어떤 때는 떠나기 이틀 전에 통보하기도 해요. 남편에게는 평소에 이렇게 말해두었죠. 내가 갑자기 어딜 가는 건 정말 미칠 것 같을 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라고요. 다행히 잘 이해해준답니다.”

권 대표는 올 초에도 까사스쿨 권은순 원장과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영국의 한 전시회에서 그녀는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받았다. “권 원장님이 꼭 봐야 할 전시가 있다면서 저를 끌더라고요. 의미심장하게 ‘네가 아마 좋아할 것’이라 덧붙이면서요. 앙드레 풋만이라는 프랑스 디자이너의 전시였어요. 아흔이 넘은 할머니인데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는 분이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한 영상에서 보디가드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백발에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었어요. 얼마나 멋있던지요!”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아흔까지 산다면 저런 모습이고 싶다’고. 그런 소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던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작아져 있었다.

“만약 아흔 살이 될 때까지 일을 한다면 아직 절반도 안 온 거잖아요. 40대가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닌 거죠.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권 대표는 이제 자타가 인정하는 스타일리스트이자 CEO다. 그런 그녀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일하는 게 즐거워 보인다’이다. 그녀가 창조한 공간들은 잡지 화보에서, 모델하우스에서, 브랜드 론칭 행사에서 또 하나의 판타지를 만든다. 많은 주부가 ‘나도 저런 곳에 살아봤으면…’ 하고 가슴 설레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환상. 권 대표는 그러한 환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꽃병 하나, 숟가락 하나까지 애지중지하던 평범한 주부 시절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즐겁게 일하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큰딸 현지도 엄마를 좇아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늘 배움에 갈급했던 그녀였기에 정식으로 디자이너의 길을 걷는 딸이 앞으로 펼쳐갈 미래는 자신이 해온 것과는 전혀 다를 거란 기대감을 품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이 사는 공간을 가꾸는 건 절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마 앞으로 더 전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물건에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거든요.”

이제는 ‘공간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권 대표. 리빙 페어에도 나가고 싶고, 스타일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책도 내고 싶단다. 그녀의 성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므로 빠르든 더디든 언젠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백발을 휘날리며 멋지게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아흔의 디자이너를.



by 트래블러 2011. 12. 28. 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