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걸고 가게를 연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린 시절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주재근 베이커리는 제과점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일품이었던 대표적인 동네 빵집이었다. 주재근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빵집을 오픈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경기도 광명의 한 아파트촌 입구에 자리한 주재근 베이커리 직영점은 고급스러운 앤티크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따뜻해 보이는 조명이 인상적인 제법 큰 제과점이었다. 이곳에 가게를 연 지는 8년째로 인터뷰를 위해 머무는 중에도 주부들과 가족 단위 손님들이 적지 않게 다녀갔다.
아랫목에서 발효시키던 반죽의 기억
“주재근 베이커리라는 이름이 워낙 오랫동안 불리어져서인지 실제로 저를 만나면 왜 이렇게 젊으냐며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할아버지인 줄 알았나 봐요.”

10여 평 남짓한 주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아 보였는데, 주재근 대표가 좋아한다는, 사용한 지 10년 넘은 단풍나무 작업대가 눈길을 끈다. 이 앞에서 그가 만든 빵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달콤한 시간을 선사했을까.

“물론 처음엔 먹고살 수 있는 기술 하나 배운다는 심정으로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이 일은 제 천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년 넘게 이 일만 해왔는데 아직도 빵 만드는 일이 이렇게나 좋으니 말이에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건 빵집을 열고 한길만 고집해온 덕분에 ‘주재근’이란 이름 석 자는 빵의 맛과 품질 보증서 같은 역할을 한다.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많이 밀렸다고 해도, 전국에 40여 개의 체인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의 이름이 가진 힘이 유효하다는 뜻일 게다.

물, 밀가루, 우유, 달걀이 제빵사의 손길을 거쳐 먹음직스런 빵이 되어 오븐에서 나올 때, 그 기분을 주재근 대표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만든 빵이라는 뿌듯함과 자부심뿐만 아니라 첫눈에 빵의 상태와 그 맛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제빵사는 장인정신으로 무장한다. 맛에 관한 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만 빵의 품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제빵 기계도 워낙 첨단화되어 많은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그렇게 나온 빵을 손님 앞에 선보일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제빵사의 몫이다. 빵이라는 것이 아주 작은 요소에 의해 맛이 좌우되기 때문에 제빵사는 늘 타협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릴 때도 많다고.

“오븐에서 빵이 나오기 전에 제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색과 냄새가 맞아떨어져야 해요. 그보다 약간 검게 나오거나 고소한 버터 냄새가 기준에 못 미친다 싶을 땐 전량 폐기하는 경우도 있어요. 조금씩 타협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빵의 품질은 떨어지고 맙니다.”
대를 잇는 1백 년 빵집을 꿈꾸며
주재근 대표가 이야기하는 제빵사의 중요한 미덕 중 또 하나는 늘 새로운 기술과 정보에 눈과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 그 또한 틈만 나면 유명한 해외 제과점을 둘러보며 새로운 빵이 없나 기웃거려 본다. 맛있는 빵이 있으면 제과장에게서 노하우를 알아보기도 하고, 한국에 사들고 와 직원들과 시식하며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오리지널과는 또 다른 풍미의 새로운 한국식 빵이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

지난겨울 일본에 출장 갔다가 롯폰기에 있는 초콜릿 전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날씨가 추운데도 초콜릿을 구입하기 위해 손님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단다.

“아무래도 초콜릿 제품이다 보니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실내에 있으면 온도가 올라가니까 제한한 것이었겠죠. 하지만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마케팅이나 할인 제도에 의존하는 판매가 아니라 정직하게 맛과 품질로 승부해도 알아서 손님들이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제과업계도 곧 그런 방식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자영으로 빵집을 운영해온 그로서는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에 의한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독과점 운영 방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동통신 제휴 카드 할인 폭이 20~30%에 이르자 자연히 소비자들은 저렴하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제과점으로 몰렸다. 이 때문에 가게마다 고유의 맛과 멋을 지키던 오래된 제과점들이 속속 문을 닫게 된 것. 이에 주재근 대표는 ‘이동통신사 제휴 카드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20%의 할인율을 10%대로 내리긴 했지만 최근에 다시 올라가고 있다며 거대 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토로했다.

“아무리 좋은 기계로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도 제빵사의 손끝에 담긴 정성을 따라가진 못하거든요. 진짜 빵맛을 아시는 분들은 분명 핸드메이드 빵을 선택하실 겁니다. 빵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젊은 사람들의 입맛과 유행에 따라 휙휙 바뀌는 빵집보다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오래된 동네 빵집이 더 유명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아닐까요?”

실제로 제빵 선진국에서는 지역마다 1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제과점이 있어 그 자체가 관광 상품화된다. 빵맛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 지역을 찾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빵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에서 빵이 대중화된 지도 이제 오래되었잖아요. 경주 황남빵이나 천안의 호두과자는 웬만한 휴게소에서 다 판매하는 유명한 빵이 되었죠. 설악산 단풍빵이나 울릉도의 호박빵도요.”
주재근 대표 또한 한 지역에서 오래 장사를 하다 보니 엄마를 따라 수줍게 크림빵을 고르던 꼬마가 어느새 훌쩍 자라 월급으로 빵을 사가는 모습도 보게 된다며 웃었다. 마치 언제고 변함없는 집 밥의 정겨운 맛처럼, 동네 빵집의 가치가 귀한 것은 이렇듯 한자리에서 변함없는 맛을 제공한다는 점일 것이다.

주 대표의 장녀인 주하영 씨도 올해 초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인 미국 CIA 요리학교에 들어가 제빵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며 주 대표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어쩌면 우리도 꿈꿔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1백 년 혹은 2백 년의 긴 세월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대를 이어 빵을 만들어내는 전통 있는 빵집을. 아홉 살 때 먹었던 달콤한 쿠키를 일흔 살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지극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코맘 윤아영의 행복론  (0) 2010.11.22
도쿄팡야 후지와라 야스마 사장  (0) 2010.09.08
기욤베이커리 에릭 오세르 제과장  (0) 2010.08.18
김치명인 강순의 여사  (1) 2010.07.23
김연신 한국선박금융 대표  (1) 2010.07.23
by 트래블러 2010. 8. 29.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