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한 강남대로를 살짝 비껴난 골목 어귀의 작은 빵집. 그저 부동산이 있고, 작은 슈퍼가 있고, 가끔 새소리가 들려오는 한적하고 평범한 동네 길목일 뿐이다. 그러나 도쿄팡야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빵 굽는 냄새와 어눌한 한국어로 손님을 맞는 후지와라 씨의 인사가 문득 작은 일본에 온 듯 가슴 설레게 했다.
밀가루를 반죽해 벽에 장식한 ‘서울’, ‘동경’, ‘NY’이라는 글자가 먼 길을 돌아 여기 이 낯선 땅에 자리 잡은 후지와라 씨의 여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작은 빵집에서 만나는 도쿄 스타일
빵집은 제자리에서 모든 빵을 집어들 수 있을 만큼 아담했다. 이른 오후임에도 나무로 된 트레이 몇 개는 이미 비어 있었고, 안쪽으로 깊은 주방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빵은 구워내느라 예닐곱 직원의 손길이 분주했다. 후지와라 씨는 몇몇 직원과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직원도 있고, 애니메이션 보면서 공부를 했다는 직원도 있어요. 천재예요. 저는 한국 오면서 서울대 어학당에서 두 달 배웠는데, 아직 멀었어요. 직원들이 저질 한국어라고 놀려요.”

발음이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완벽한 실력이라고 칭찬했더니 수줍은 듯 웃는 표정이 영락없는 젊은 청년이다. 뉴요커를 꿈꾸던 음악도가 어쩌다 한국이란 나라에 와서 빵 사랑에 푹 빠져 있을까? 후지와라 씨의 달콤 짭조름한 빵 이야기가 시작됐다.
“한국에는 개인 빵집이 거의 없어요. 작은 빵집은 돈벌이가 쉽지 않아 불안해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는 콘셉트가 강하잖아요. 일본 사람이 직접 만든 ‘토오쿄오’ 스타일 빵이에요. 일부러 손님들이 찾아와요. 그래서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수익이 똑같아요.”

후지와라 씨가 내뱉는 ‘토오쿄오 스타일’이라는 거센 발음이 문득 귓가를 맴돌다 간다. 실체는 잘 모르겠지만 스타일이 있는 빵집이라니 낯설면서도 멋지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빵집에서 특정한 스타일을 찾으려 했던 적이 있던가. 문득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대부분인 것을 보고 놀랐다는 후지와라 씨. 무역 컨설팅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한 카페의 제과 담당으로 왔다가 가게를 내고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타깃 고객층인 젊은 여성이 많이 다니는 이대나 홍대 근처로 알아봤지만 권리금만 1억이 넘는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모자란 자금을 가지고 가게를 찾다 보니 이렇게 한적한 골목까지 밀려났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국적인 도쿄 분위기를 내는 데는 더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후지와라 씨는 일본의 유명 제과점인 안젤리카 출신으로 일본의 빵 맛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사람이 직접 만드는 일본 빵’이라는 콘셉트는 강했다. 특히 비교적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 그토록 다채로운 디저트와 새로운 빵 맛을 본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충분히 어필할 만한 곳이었다.

“손님들이 ‘일본 갔을 때 먹어봤어요’ ‘망가(일본 만화)에서 봤는데 꼭 먹어보고 싶었어요’ 등의 말을 많이 해요. 아무래도 서로 가까운 나라니까 많이 알고 계시고, 그래서 찾아오시는 분도 많은 것 같아요.”

특히 그가 제빵을 배운 시모키타자와의 안젤리카는 카레빵이 유명한 곳으로 일본 여행을 가는 이들이 한 번쯤 들르는 맛집이다.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곳이 ‘안젤리카의 카레빵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입소문이 쫙 퍼진 것이다. 후지와라 씨는 자신이 안젤리카 출신 제빵사라는 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 가게가 빠른 시간에 자리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젤리카에서 배운 빵들을 한국에서 한국의 재료로 만드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고.

“일본에는 카레 페이스트가 있어서 거기에 재료를 좀 섞어서 빵의 속을 채워요. 그런데 한국에는 카레가루밖에 안 팔더라고요. 한국의 큰 제과점에서도 카레빵을 파는데, 감자에 카레 양념을 한 거라 일본 카레빵과는 달라요. 결국 스스로 방법을 개발해야 했어요.”

여러 번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한국의 카레가루와 채소를 넣어 개발한 카레빵은 놀랍게도 안젤리카의 빵 맛과 흡사했다. 카레카루에 물을 넣더라도 너무 묽거나 되지 않게 조절해야 하는데, 그 비법은 비밀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물어봐요. 일본 빵하고 한국 빵이 어떻게 다르냐고. 그런데 난 한국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지 못해서 몰라요. 그냥 우리가 일본 빵을 우리 콘셉트대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개성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뉴욕이든 어디든 빵이 있는 곳이라면
도쿄팡야를 오픈한 것은 2008년 10월. 불과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매출은 몇 배 이상 뛰었고, 직원은 7명으로 늘어났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비좁은 가게와 담백하고 깔끔한 도쿄팡야만의 빵 맛이다.

“맛을 내는 게 굉장히 미묘해요.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약간 짜게 만드는 게 중요한데요, 소금 양을 조금만 잘못 넣어도 짜거나 맛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또 온도와 습도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니까 그것도 고려해서 소금을 넣어야 해요.”

도쿄팡야의 대표 빵은 역시 카레빵과 미소빵이다. 우리는 흔히 카레밥을 떠올리지만 일본에서는 식사 대용으로도 카레빵을 즐겨 먹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부드러운 빵 안에 다진 돼지고기와 채소를 넣은 따뜻한 카레 소스가 들어 있는데 과연 일품이었다. 일본식 된장인 미소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미소빵 또한 도쿄팡야의 인기 빵 중 하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된장의 구수한 맛보다는 달콤하고 보드라운 맛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너무 달거나 짜지 않은, 절제된 맛이 일본 빵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외에도 멜론빵, 딸기단팥빵, 명란새우빵 등 확실히 일반 제과점에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신기한 빵들이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후지와라 씨가 제빵사가 된 것은 뉴욕에 일본 빵집을 내기 위해서였다. 스무 살 때 4년 남짓 뉴욕에서 밴드 보컬 활동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무척이나 행복했고, 이곳에서 평생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갖게 되었다고. 뉴욕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을 구상하던 중 떠오른 것이 뉴욕에는 맛있는 빵집이 없다는 거였다.

“일본 빵집을 내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미국 빵은 정말 맛이 없거든요. 그래서 도쿄로 다시 돌아가 안젤리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제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웠어요.”
원래 요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생전 처음 접해보는 제빵 세계가 녹록할 리 없었다. 선배들 또한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주기보다는 알아서 보고 배우라는 식이어서 그 딱딱한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기필코 뉴욕에 빵집을 내고 말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아냈다. 그러면서 점점 빵 만드는 재미에 빠져들게 됐다.

“빵 만드는 일이 참 재미있어요. 지금은 이 생활에 푹 빠져서 다른 생각을 못하겠어요.”
매일 10시간 이상 작은 빵집에 붙어 있는 게 전부인 한국 생활이지만, 한국과 빵의 매력에 빠져 뉴욕 입성은 잠시 뒤로 미뤄둔 상태다. 곧 백화점에도 입점하고, 다른 지역에 지점도 낼 계획이란다. 그렇게 조금씩 꿈을 펼쳐가며 도쿄 스타일 빵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어떤 손님이 저희 멜론빵을 거래처에 선물했는데 그 덕분에 계약이 성사됐다고 인사하러 왔어요. 또 한 아름 멜론빵을 사가셨고요. 손님들이 행복해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참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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