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농촌의 논밭은 고요하고 황량했다. 이 메마른 땅 어디쯤에 다시 피어나 푸르러질 생명력이 숨 쉬고 있을까, 아연해질 무렵 어디선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웃음이 너무도 밝고 건강해서 삭정이마저도 새 움을 틔우게 할 것만 같다. 도시에서 함께 동문수학하던 세 여자가 건강한 농촌 여성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고 눈물겹다.

바로 전날 도시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남쪽의 농촌마을은 청명한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에 도착해 소희주 씨에게 전화를 하니 지금 하우스에서 피망을 따고 있다며 그리로 오란다. 허허벌판에 오가는 사람도 없어 어렵게 정자나무가 있는 삼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스스로 농촌을 택한 젊은 여자들

소희주 씨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작은 체구로 커다란 트럭을 모는 당찬 여성이었다. 활짝 웃으면 큰 눈이 실눈처럼 감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박하기도 했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비닐하우스 안은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햇빛의 온기만으로 훈훈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피망 밭 저편에서 소희주 씨 남편인 남성민 씨가 피망을 열심히 따고 있었다. “뭐 하세요? 큰 것부터 담고 위에는 작은 피망을 담아야 돼요. 너무 잘고 모양이 망가진 피망은 상품 가치가 없어요. 저쪽에 다 모아놓으세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갓 따온 피망들을 풀어놓는 희주 씨의 재촉에 넋을 잃고 광활한 밭을 둘러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새도 없이 손은 이미 정신없이 피망을 분류해 박스에 넣고 테이핑을 해 한쪽에 쌓고 있었다. 농촌에 오면 누구나 자기 먹을 몫은 하게 된다더니,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정신없이 빠져들어 도시에서 늘 얼고 굳어 있던 허리께가 살살 녹다 못해 후끈해졌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합천과 창녕에 사는 강선희 씨와 변은주 씨가 도착했다. “여 와 있는 것도 모르고 느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청소 싹 하고, 설거지 다 해놓고, 그래도 안 오기에 밥이라도 해놔야 되나 싶었다. 여기 접어놓은 박스 붙이면 되나?”

소희주 씨와 동갑인 변은주 씨는 함께 다큐멘터리를 찍은 뒤 자주 만나게 되면서 더욱 ‘절친’이 됐다. 은주 씨는 현재 창녕에서 남편과 함께 마늘 농사를 짓고 있다. 강선희 씨는 89학번 선배로 합천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다양한 농민회 활동도 펼치고 있다. 도시에 사는 여성들이 카페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만나 남편 얘기, 애들 교육 얘기에 열 올리는 것처럼, 농촌 여성들은 밭에서 만나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거들고 돕는 게 진한 소통 방법인 듯싶었다. 이들 셋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다큐 영화 <땅의 여자>는 농민이면서 아내이고, 엄마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농촌 여성의 진솔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으로 작년 9월 개봉 이래 전국을 돌며 공동체 상영을 진행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다 빠져나간 오늘날의 농촌에서 이들 젊은 여성들이 일부러 농촌에 들어가 고군분투하면서도 행복하게 삶의 터전을 일궈가는 모습은 참으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농촌에 사는 여자, 그 진한 삶을 해부하다

이들 셋은 부산 동아대 재학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소위 ‘전대협’ 세대라 자처하는 강선희 씨는 당시 노동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선배로 통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철학에 심취해 다들 ‘강선희는 졸업한 뒤 분명 노동자가 될 것’이라 믿어 마지않았다고. “어느 날 철학 공부를 하다 동기들 사이에서 논쟁이 붙었어요. ‘노동자와 농민 중에서 어느 계급이 더 중요한가’가 주제였어요. 농민이 가장 기본적인 먹을거리와 생산성을 제공하는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저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다 노동자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 이후 농민이 더 중요한 계급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내는 촌에 갈란다’ 선포하고 후배들을 설득하고 다녔죠.” 조금은 치기어린 결심이었지만, 언제나 한다면 하는 그녀였다. 마침 우루과이라운드로 농촌 문제가 심각하게 정치적 도마 위에 오를 때였다. 그녀를 주축으로 농촌 문제를 고민하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세미나도 하고 농활도 적극적으로 다녔다. 그 모임을 함께했던 11명은 공교롭게도 현재 모두 농촌에 들어가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단다. “20대 초반에는 누구나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꿈도 꾸지만, 살다 보면 그게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대학 시절 함께 공부하고 농활 다녔던 친구들이 모두 농촌에 있네요. 청춘의 빛나는 황금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모두 곁에 있는 덕분에, 단 한 번도 다른 삶을 꿈꾸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문제는 강선희 씨가 스스로 밝혔듯이 농사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거였다. 결국 그녀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고 청소년 활동을 이끄는 간사로 또 다른 형태의 농촌 여성의 삶을 살아가게 됐다. 그녀가 이렇듯 조금 남다른 농촌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농사와 집안 살림을 도맡아주는 시어머니 덕분이었다. 시어머니는 그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고,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적 활동의 든든한 동지이자 지지자이기도 했다. <땅의 여자>를 연출한 권우정 감독이 맨 처음 강선희 씨를 주인공으로 점찍은 것도 2006년 홍콩에서 있었던 WTO 반대 시위에 참가한 그녀와 그녀의 시어머니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바깥일에 바쁜 선희 언니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언니 대신 농사와 가사를 책임지는 권순남 씨는 고부관계를 뛰어넘어 오래된 여성 동지이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를 찍게 된 것도 홍콩에서 만난 이들의 독특한 고부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다큐멘터리 &lt;땅의 여자&gt;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이라는 고부간일지라도 같은 농촌 여성이라는 동지애로 이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거였다. 덕분에 선희 씨는 살림에 대한 부담과 당뇨병으로 앓아누운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나 대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2007년 지방자치선거에 민주노동당 합천 대표로 출마하기도 했다. 선거에 출마한 며느리를 위해 함께 띠를 두르고 합천 곳곳에서 홍보물을 나누어주는 노모의 모습은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제작 기간, 그녀의 남편 김정호 씨는 결국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충격이 더했다. 다큐멘터리는 오열하는 주인공들을 묵묵히 잡아냈다. “애기 아빠를 먼저 보내서 다들 ‘저 가정은 불행할 거다’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어차피 행복은 만들어가는 거기 때문에 사는 건 똑같아요. 다큐에 장례식 장면이 다 담긴 건 오히려 좋았어요.

감독이 나중에 장례식 때 찍은 것만 편집해서 시디로 만들어줬는데, 너무 소중한 선물이었고요.”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각별한 고부 사이를 자랑했던 시어머니는 바로 짐을 싸서 독립해 나갔다. 선희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뜻이라면 그것을 존중해드리는 게 옳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란다. 그녀와 시어머니는 여전히 농촌 여성이라는 동지애로 함께 나란히 걷고 있다.

희생정신으로부터 즐거운 인생까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 부산에서 나고 자란 희주 씨가 이렇게 농촌 토박이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녀조차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농사는 꿈도 꿔본 적이 없다. “제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가장 고되고 어려운 곳에 가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게 굶주리는 나라의 오지 같은 데 들어가서 선교사로 일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독문학을 전공한 것도 못사는 나라에서 많이 쓰는 언어라기에….” 그런데 우연히 동아리연합회 차원에서 간 농촌 봉사활동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농사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되고 힘들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힘들게 일한 게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땀을 흘리는 감동을 처음 받아본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 농촌이 가장 힘든 곳일 수도 있다는 것을.” 힘든 곳이었지만 가장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늘 웃는 얼굴에 해맑은 성격, 작은 체구로 일을 찾아서 하는 그녀를 농촌의 어르신들 누구나 예뻐했다. 선희 씨와 은주 씨 모두 “쟤는 농민들에게 제일 사랑받았던 애”라며 입을 모았다.

가장 힘든 곳에서 살겠다는 그녀의 희생정신은 이곳에서라면 인정받고 행복하고 즐겁게 일하며 살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힘든 가운데서도 땀이 주는 감동이 있다는 것을 농사가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희주 씨와 마찬가지로 농사일이라곤 농활이 전부였던 남편 남성민 씨와 함께 생면부지 농촌에 자리 잡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급기야 성민 씨는 2년간 품삯도 받지 않고 농가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익혔다. 그 기간 동안 얻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농사의 1년 흐름, 어려움과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이었다고.

“처음에 농촌으로 간다고 했을 때 집에서 결사반대를 했어요. 저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지로 떠나는 것 같은 비장함 같은 게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사는 건 다 똑같아요. 어디에서 살아도 부지런하고 야무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잖아요. 그때는 왜 그렇게 갈등했는지…. 정말 왜 그랬지?” 지난해 태어난 막내 단비를 품에 안고 어르며 멋쩍게 웃는 지금의 그녀에게 농촌 여성이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모두 옛 추억이 된 듯했다. 처음 왔을 때는 도시에서 살던 버릇이 잘 없어지지 않아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도시에서는 다 각자 살잖아요. 처음에는 집에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문간에서 ‘어떻게 오셨어요?’ 물어보고 별 용건 없어 보이면 그냥 보내고 그랬는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닌 거야. 농촌에서는 다 같이 사는 거예요. 낯선 사람이라도 맨입으로 보내지 않아요.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죠. 왜냐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거든.” 처음엔 일이 서툴러 사고도 많이 쳤다는 희주 씨는 10년 넘게 진주에 살면서 누구보다도 야무지고 단단한 농촌 여성으로 다져진 듯했다. 무엇보다 농사짓는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갈 때는 몸이 천근만근이어도 힘든 농사일을 마칠 때쯤이면 오히려 활기가 돈다는 그녀는 영락없는 농촌 아낙의 모습이었다. 주위를 생각하는 인심, 나눠주는 기쁨을 알게 됐다는 건 농촌에 사는 덤이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처음 다큐를 찍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세 사람 모두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고 했다. 농촌에서의 삶이란 게 실상 단조로움과 반복의 악순환이어서 ‘매일 온다고 찍을 게 뭐 있겠나?’ 싶었단다. 그러나 연출을 맡은 권우정 감독은 몇 주 단위로 세 사람의 집을 돌면서 함께 먹고, 함께 농사를 짓고, 남는 시간에 조연출과 교대로 촬영을 했다. 늘 일손이 부족한 그녀들로서는 점점 반가운 식구가 되어갔다. “그게 다 수였는가 봐. 나중엔 카메라가 돌고 있어도 의식도 못하는 거예요. 처음 시사회를 할 때는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겠더라고. 나는 내가 쓰는 사투리가 그렇게 심한지도 몰랐어요.”

변은주 씨는 10년 만에 시댁으로부터 분가하면서 겪은 갈등, 남편과의 사소한 말다툼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담담하게 독백하듯, 친한 친구와 수다 떨 듯 그녀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여느 며느리, 여느 아내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다가왔다. “신랑은 자기를 속 좁은 사람처럼 그려놨다며 ‘상영중지 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벼르더라고. (웃음) 그런데 나중에 희주 이야기를 듣고 뭔가 깨달음이 왔어요. 이 영화가 우리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로 인해 농촌 여성들의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거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젠 안 부끄러워요.”

사실 농촌에 사는 사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밀짚모자를 쓴 중년 남성 혹은 땡볕에 그을린 피부의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가 이제 농촌에서 젊은 여성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이제 농촌에는 우리가 마지막 세대예요. 특히 제가 사는 창녕에서는 저희 바로 윗세대랑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소통하기도 어렵고 함께 맘을 모으기도 쉽지가 않아요. 뭔가 변화와 발전을 꿈꾸고 싶어도 사람이 없으니까 외롭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열아홉 살 때 농촌 총각에게 시집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게 후회된다는 말을 농담 삼아 하는 그녀지만, 소위 ‘일등 농사꾼’이라는 남편 김창수 씨에 대해 말할 때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농사일이란 게 내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하늘이 반이에요. 그래도 얘가 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느 때 주는 걸 좋아하는지, 온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도 다 알고 신경 써줘야 해요. 신랑이 일등 농사를 짓거든요. 전날 아무리 술에 취해 들어와도 다음 날 새벽에 물 줘야 하는 게 있다, 그러면 다시 자더라도 귀신같이 일어나 일을 나가요. 그런 정성을 들이지 않고 섣불리 농사를 시작하면 백 프로 다 망해요.” 은퇴 후 귀농을 꿈꾸는 도시 사람들이 물정 모르고 시작했다가 3년 안에 손 털고 나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다는 이들의 말에서 녹록지 않은 농촌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지 않았겠느냐’며 소탈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머지않은 듯했다.

분명 평범한 주부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사는 여성들임에 틀림없었다. 일상의 편리함 대신 땀 흘리는 노동의 희열을 더 사랑하고, 아이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닦달하는 대신 소여물도 주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게 키우며, 내 가족의 부귀영화보다는 함께 사는 이웃, 더 잘사는 농촌을 꿈꾸는 여자들. 그녀들이 굳건하게 디딘 땅에는 이들의 건강한 삶을 품어주는 소중한 에너지가 스민 듯했다. 우리가 잠시 잊어버린 진정한 행복까지도 말이다.

진행 홍유진(프리랜서) 사진 조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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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러 2011. 2. 27. 22:54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걸레를 하나씩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줬는데, 모든 아이가 그 준비물을 갖추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숙제를 이해하지 못해 아이에게 물티슈를 들려 보낸 엄마도 있고, 아예 챙겨주지 못한 엄마도 많았다. 이윽고 반의 모든 아이가 걸레 하나씩을 준비하고 나자 선생님은 매일 점심시간 전에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각자의 책상을 닦으라고 시켰다. 당연히 처음에는 다들 투덜대면서 걸레 빨기와 책상 닦기에 질색했다. 그런데 매일 반복되는 작은 습관에 아이들이 점점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기 전에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할 작은 의식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깨끗한 책상에서 식사하는 청량감, 깨끗한 걸레에 묻어나는 얼룩과 먼지를 보면서 청소하는 재미는 덤이었다.

정리 첫 단계, 미련 없이 버리기
“책상을 매일 닦는다는 작은 습관 하나로도 아이들은 위생적인 식사 환경, 청소하는 즐거움, 친구들과 함께 같은 의식을 치른다는 동지애 등등 많은 것을 얻었어요. 이게 바로 정리의 힘을 보여주는 아주 간단한 예죠.” 국내 1호 정리 컨설턴트 윤선현 씨는 이처럼 작은 실천으로 삶의 질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정리’의 중요성을 이곳저곳에 전파하고 있다. 세상에, 정리가 직업이 될 수 있다니, 우리는 참으로 신기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또한 나름대로 프로페셔널한 세계다. 미국에서는 전미정리전문가협회(NAPO)에 가입된 회원 수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직업이다. “정리란 시간과 공간, 나아가 인생의 질서를 잡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정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죠. 하지만 대부분이 막상 정리를 하려고 하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뭐든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하나예요.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고 ‘선택’하는 것.” 정리 초보자의 첫걸음은 바로 ‘버리는 일’이다. 한 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거나 한 직장을 오래 다니다 보면 알게 모르게 부산물이 쌓이기 십상이다. 필요 없는 물건이나 쓸데없는 데 소비하는 시간이 무엇인지 판단해 그것을 버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찌꺼기가 많이 끼어 있는 삶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죠. 버릴 건 버려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라야 진정 가치 있는 기준을 찾고 나만의 삶의 목표를 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첫 단계로 저는 일단 서랍을 모두 뒤집었다가 다시 넣어보라고 권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거든요.” 윤선현 씨는 매일 15분씩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잡다한 쓰레기를 치우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명상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정리력’은 사실 사소한 습관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쉬워 보이지만, 사실 오랜 기간 익숙해진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 습관을 만들어주는 일이 바로 정리 컨설턴트의 몫이다. 그래서 윤선현 씨는 ‘정리력’을 기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100일 정리력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다. 하루에 한 가지씩, 100일간 윤선현 씨가 제시하는 ‘미션’을 수행하는 프로젝트로 이는 100일 만에 끝낼 수도 있고 1년, 2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를테면 ‘지갑을 정리해보세요’, ‘서랍 하나를 정해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의 목록을 적어보세요’와 같은 쉬운 미션이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성공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 94가지를 실천하신 분이 있어요. 현재까지는 그분이 최고죠. 처음에는 정리력을 키워볼까 하고 오셨는데 지금은 정리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양성 과정을 듣고 계세요. 저의 든든한 동지가 되었죠.”
두 번째 단계, 정리의 연쇄작용 경험하기
요즘 그는 한 아카데미를 통해 주부들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정리력 강의를 하고 있다. 매달 새로운 기수를 선발하며, 현재 10기까지 그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조금씩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어떤 미용실 원장님은 소비 습관에 변화가 생겼다고 해요. 돈이 있으면 다 쓰고 보는 스타일이었는데 꼭 필요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습관을 들이면서 소비 패턴을 바로잡게 된 거죠. 또 늘 책상이 난장판이었던 직장인에게는 ‘프린트하는 습관을 버리라’는 조언을 드렸죠. 서류 정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책상이 어지러운 경우가 많거든요. 꼭 필요한 자료만 한 곳에 두고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해요.” 공간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리된 공간을 얻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의식이 생기고 나아가 삶의 질도 높아진다는 것이 윤선현 씨의 주장이다. 단적으로 집 안이 어지러우면 필요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쓸데없는 시간을 소비하게 되고, 손님을 초대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니 이는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맥이 모두 하나로 얽혀들어가는 것. “정리의 핵심은 시간, 공간, 인간(인맥)의 삼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소한 습관이랄 수 있는 정리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거고요. 따라서 처음 시작하시는 분에게 매일 한 가지씩 미션을 정해 정리를 하시되 최대 15분을 넘지 말라고 말씀드려요. 15분이 넘으면 은근히 스트레스로 다가오거든요. 즐거운 일이어야 매일 하고 싶어지잖아요.”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국내 1호 정리 컨설턴트’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갖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였다. 사회 초년생 때 우연히 읽은 <단순하게 살아라>라는 책을 통해 새로운 삶의 형태를 알게 된 것이다. 그 책의 저자인 로타르 J. 자이베르트가 미국에서 정리 전문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사람이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원래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해주는 일이잖아요.” 정리 컨설턴트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앞으로 딱 10년만 직장생활을 하자’고 결심했고, 결국 그 결심을 실현했다. 직장생활 10년째인 올해 5월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베리웰 정리 컨설팅’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철저한 시간 관리의 의지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아직은 1인 기업에 불과하지만, 점점 제 이야기에 공감하는 동료가 늘고 있어요. 10년 전 꿈을 실현시켰듯이 지금 꾸는 10년 후 꿈도 반드시 이뤄질 거라 믿습니다. 제가 몸소 ‘정리력’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드리고 싶어요.”
윤선현 정리 컨설턴트 추천!
주부들이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정리 미션
정리란 단순히 공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청소의 일환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 더 나아가 삶의 질을 높이는 일종의 훈련이다. 윤선현 씨가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정리 미션을 추천했다. 한 달 동안 실천하면서 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해보자.

1 쇼핑- 합리적인 소비 습관 만들기
쇼핑 전 리스트 작성하기 / 물건 구입하기 전 ‘꼭 필요한 물건일까?’ 3번 질문하기 / 쇼핑하는 시간과 돈에 대한 규칙 정하기
2 수납 -수납장 하루 한 칸씩 정리하기
모두 비우고 하나씩 집어넣으며 분류하기 / 보관 및 옮길 것, 버릴 것, 고민되는 것을 구분해 임시 보관함에 넣기 / 서랍 속 물건 재고조사표 작성하기
3 청소 - 우리 집 청소 문화 만들기
일주일에 1회, 20분간 가족 대청소 시간 갖기 / 개인별 담당 구역 정하기 / 청소 후 가족과 함께 청소 소감 나누기
4 잡동사니 버리기 - 집 안에 여유 공간 만들기
외출할 때 하루 1개씩 물건 버리기 / 쇼핑 1개당 1개씩 버리기 / 책과 옷 등의 물건에 유효기간 정하기
by 트래블러 2010. 12. 8. 15:43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닮아간다. 오래된 기와집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할머니나,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를 오가는 검은 슈트의 도시인들 모습이 하나의 풍경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벤자민 주아노 씨의 작은 별장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리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 프랑스식(?) 한옥은 프랑스에서 성장한 뒤 한국에 와 17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벤자민 씨와 아주 똑같이 닮은 공간이었다. “서울은 멋진 도시예요. 공원과 산, 강이 있어 답답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나는 늘 자연이 그리웠어요. 한국에서 생활하는 내내 별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우연처럼, 운명처럼 이 집과 만나게 됐죠.”
한국의 공간_ 하나뿐인 아늑함과 만나다
벤자민 주아노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통이다. 1996년 군복무차 교환 교사로 오면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이태원에서 프랑스 가정식 전문점을 내는가 하면, 아리랑 TV에서 한국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여행 책자를 내기도 했고, 현재 프랑스의 한 대학원에서 한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가 좀 더 한국 문화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 계기가 생겼다. 바로 3년 전 경기도 양평에 그동안 꿈꿔왔던 한옥 별장을 마련한 것이다.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한옥 스타일의 뼈대만 남기고 그가 구상한 대로 새로 리모델링을 했다. 주말마다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면서 조금씩 지금의 형태를 만들어온 것. 그의 집은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있어 도로변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한 좁은 길을 굽이굽이 달려야 했다. 어떻게 이 집을 만났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양평에 놀러왔을 때 탐험하는 마음으로 산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쓰러져가는 낡은 집을 발견했단다. 정말이지 운명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하다. “공간이 주는 느낌이 무척 좋았어요. 가까운 부동산에 찾아가 혹시 내놓은 집이 있느냐고 물어봤죠. 그런데 딱 제가 본 이 집이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겠어요.” 그의 별장 이름은 ‘La Songerie’, 프랑스어로 ‘낮꿈’이란 뜻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와 흙으로 지은 평범한 한옥이다. ‘별장’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우리가 별장에 대해 갖고 있는 으리으리한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벤자민 씨는 오히려 한국식 별장에 대해 많은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이 집을 지을 때 한국 친구들은 별장이니까 더 크고 멋지게 지어야 한다고 조언했어요. 하지만 큰 집은 그만큼 관리를 해줘야 해요. 하지만 자주 와서 관리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 별장에 가면 너무 크기만 하고 온기가 없어서 마치 귀신집 같아요. 나는 이 집을 지을 때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오두막 같은 곳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제가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적당한 크기지만, 한 8명 정도는 와서 놀고 자고 갈 수 있어요.” 벤자민 씨가 이 별장을 지을 때 상상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숨바꼭질을 하고 놀던 작은 오두막이었다. 크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보물들을 다 모아놓은 곳,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곳. 이 별장을 처음 봤을 때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그의 이미지가 투영되었기 때문이리라. 평범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묘한 위화감에 이리저리 둘러보게 된다. 소위 프로방스풍이라 불리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주방과 조선시대 부엌에나 있을 법한 오래된 한국식 찬장이 너무도 친숙하게 잘 어울렸고, 모던한 아일랜드 식탁과 스틸 의자, 그리고 다다미가 깔린 좌식 공간 옆 원목 사다리가 마치 산장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퓨전도 뭐 이리 오묘한 퓨전이 다 있나 싶다. 벽 곳곳에 걸린 민화나 여기저기 놓인 고풍스러운 소품들 모두 그가 직접 돌아다니며 구입한 골동품들이란다.
한국의 음식_ 역사와 다양성의 문화
16년 전 군복무를 대체하기 위해 교환 교사로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이렇게 한국과 오랜 인연을 맺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 가지 분야에 깊이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다. 참기름 냄새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한국 음식도 점점 그 매력을 알게 되고, 늘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한국 친구들도 생겼다. 자신이 한국 문화에 대해 조금씩 배웠듯이, 한국 사람들에 프랑스 문화를 알려주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가 다른 세계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먹을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람들에게 진짜 프랑스 문화를 보여주겠다며 이태원에 프랑스의 가정식 전문점 ‘르 생텍스’를 연 것도 그래서다. “처음 ‘르 생텍스’를 오픈했을 때는 이태원에 외국 음식점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33개나 돼요. 하지만 제대로 된 프랑스 음식이나 이탈리아 음식을 하는 곳은 거의 없어요. 퓨전이 나쁜 건 아니지만, 진짜 음식을 모르는 채로 퓨전 음식만 먹게 되면 그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요.” 그의 식당이 ‘프랑스의 가정식’을 표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자신이 한국 음식을 통해 한국을 배운 것처럼, 한국 사람들에게 프랑스를 알려줘야겠다는 의무감의 발로였던 것. 그러나 대중적인 입맛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진짜’ 프랑스 음식이 처음부터 사랑받은 것은 아니다. “제가 고집을 좀 부렸어요. 손님들이 ‘너무 짜요’ ‘느끼한데 왜 김치가 없어요’ 하고 항의도 많이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해주는 식당이 많으니 다른 데로 가시라고 했어요. 저희 식당만큼은 프랑스식 그대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고집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프랑스 음식의 진정한 묘미를 아는 미식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첼리스트 양성원 씨 등 프랑스 유학파 예술가들 사이에서 ‘프랑스 비스트로의 분위기와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입소문을 탔다. 또 2000년대 들어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세계 음식이 대중화 바람을 타면서 ‘르 생텍스’는 그야말로 줄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대박 식당으로 거듭났다. “음식 문화를 빼놓고 어떻게 프랑스를 말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호텔의 프랑스 음식은 정말 아니에요. 그건 그냥 유럽 음식을 모든 이의 입맛에 맞게 섞어놓은 것이죠. 그런 음식을 매일 먹을 수는 없잖아요. 기내식으로 나오는 비빔밥도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맛있다고 할 테지만 그게 진짜 한국의 맛은 아니잖아요.” 다양한 음식 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와 한국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특히 불고기나 비빔밥 같은 단품 요리보다는 나물과 고기, 밥과 국 등 여러 가지 음식이 한 번에 나오는 한 상 차림이야말로 한국이 자랑해야 할 훌륭한 식문화라는 것.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디로 여행을 가든 늘 스파게티만 먹어요. 이건 들은 얘기가 아니고 직접 본 걸 말씀드리는 건데, 정말 삼시 세끼 스파게티만 먹더라고요.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나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 음식을 먹고 삽니까. 음식 문화가 풍요롭다는 것은 전체 문화의 폭과 깊이도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에서 친구들이 오면 그는 늘 가장 먼저 정갈한 한정식집에 데려간다. 커다란 상 한가득 나오는 오색창연한 상차림에 먼저 놀라고, 그 음식에 깃든 전통과 역사성에 두 번 놀라면서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맛보는 낯선 음식이 무조건 입에 맞을 리는 없겠지만, 음식은 단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보기 위한 첫 단추라는 게 벤자민 씨의 생각이다.
한국의 자연_ 모든 것을 품에 안는 풍요로움의 상징
얼마 전 프랑스로 약 한 달간 휴가를 다녀온 벤자민 씨. 매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한두 달 정도 프랑스에 다녀오는데 점점 외국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면서 웃었다. 그에게 프랑스는 그리움이 느껴지는 옛 고향으로 남아버린 것일까. “프랑스에 가면 옛날 친구들도 만나고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아요. 하지만 이제는 왠지 먼 나라로 느껴져요. 특히 파리는 거의 외국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파리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이젠 나도 수많은 관광객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재미있는 건 말이죠, 그렇지만 제가 한국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제가 한국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고민과 체념이 묻어났다. 사실 한국에서 살아온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 아무리 다가가도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느낌에 때로는 자신이 왜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기도 했고, 한국을 떠날까 말까 하는 고민도 수없이 했다. “저는 다양한 삶을 살아왔어요. 고향에서도 오래 살았고, 외국에서 현지 사람들과 완전히 동화된 삶도 살아봤죠.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가 어디인가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인 것 같아요. 사실은 어디에서 살든, 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모두 자기 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비록 한국 사람은 될 수 없겠지만 몸속이나 마음속에 영원히 씻기지 않을 한국적인 요소가 스며들었겠죠?” 그가 서울에서 살면서 느낀 허무함을 달래준 것이 이번에 집을 얻으면서 텃밭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자주 들르지 못하는 탓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지만, 나름 구획이 있고 밭고랑을 만들어놓은 모양새도 그럴듯했다. 장화를 신고 수확물을 담을 라탄 바구니를 옆에 낀 벤자민 씨의 모습은 영락없는 프랑스 농부였다. 호박, 가지, 오이, 배추, 포도, 복숭아, 밤 등등 그의 손으로 가꾼 채소의 종류만도 20여 가지에 이른다. 지난주에는 수확한 오이로 물김치와 소박이를 만들었다며 보여주기도 했다. 새콤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게 흔히 먹던 물김치와는 사뭇 달라 ‘프랑스식 물김치’라고 부르면 좋을 듯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아주 멋있는 정원을 가꾸셨어요. 계절마다 갖가지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정원이었죠. 도시 생활을 동경했던 저는 시골이 마냥 싫었지만 말이죠. 그런데 교육의 힘이 참 놀라워요. 서른 즈음에 느꼈어요. 도시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에 보고 경험한 것들, 집에서 먹던 어머니가 해준 음식의 맛 같은 것이 숨어 있는 모양이에요.” 그의 인생에서 이제 한국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동반자가 되었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제대로 된 한식 레스토랑을 차려 외국 손님은 물론 한국인의 입맛까지 사로잡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농사를 짓고, 한국의 이웃들을 위해 프랑스 가정식을 만들고, 더 나아가 음식으로 서로 다른 문화가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프랑스식 한국 라이프는 당분간 계속 될 듯하다.
by 트래블러 2010. 12. 8. 15:39
지난달, KBS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을 통해 방송된 ‘직장인 밴드 도전기’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멋지게 날아오르는지를 보여줘 많은 시청자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그 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쥔 실력파 직장인 밴드가 있다. 그들을 흥분하게 하는 건 승진도, 월급 인상도 아닌 Funk & Groove!


늦여름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지난달의 어느 일요일, 메리고라운드를 만나기 위해 홍대의 한 연습실을 찾았다. 한두 명씩 멤버들이 모이다 보니 어느새 7명. 지난 아시아컴퍼니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거머쥔 실력파 밴드 메리고라운드는 보컬 한수희와 조현상, 키보드에 유승혜와 박용준, 기타 정지민, 베이스 김정수, 드럼 최용석으로 이뤄져 있다. 메리고라운드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내 밴드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중 뜻이 맞는 이들끼리 모여 만든 팀이다. 지난달, KBS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을 통해 대상을 타는 모습이 방송되면서 보컬을 비롯한 멤버들도 회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잘 봤다며 사인을 받아가는 직원도 있었을 정도. 그러나 메리고라운드는 이미 다른 밴드 대회에서도 수많은 상을 받았고, 홍대 클럽 무대에 설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밴드다. 최근에는 대상 수상곡인 ‘달려! 미스터 Funk’를 비롯해 자신들이 작사, 작곡한 음악들로 자신들만의 음악 색깔을 뿜어내고 있다. 여자 보컬을 맡고 있는 한수희 씨와 기타의 정지민 씨는 밴드 활동을 하면서 연을 맺은 부부 사이다. 즐거운 취미생활을 통해 인생의 짝까지 만났으니 이들에게 밴드 활동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번 수상은 더욱 의미가 깊다고 했다. “우리도 우리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곡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자작곡으로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대회에 도전하게 된 거죠. 제가 곡을 만들고 보컬 조현상 씨가 가사를 붙였는데 너무 괜찮은 거예요.”(유승혜)

“사실 제약 사항이 무척 많았어요. 일단 저희 부부가 오랫동안 계획하고 있던 여행이 대회 일정과 딱 겹치는 바람에 못 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애초에 기타와 여자 보컬이 없어도 가능한 곡으로 썼어요. 하지만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천안함 사고 때문에 모든 행사 일정이 뒤로 미뤄졌어요. 여행을 다녀온 뒤 합류할 수 있게 됐죠.”(한수희)

최고의 회사를 다닌다는 자부심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더 자랑스럽다는 메리고라운드 멤버들. 이 젊은 직장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듣는 사람의 피까지 뜨겁게 달구는 힘이 있었다.
Interview
-이번에 대상 받은 것을 축하한다. 상금은 어떻게 썼나?
정지민 : 생각보다 상금이 많아서 우리도 깜짝 놀랐다. 이런 부수입이 대회에 도전하는 묘미가 되기는 하지만(웃음). 상금 5백만원은 일단 저축해두었다. 나중에 우리 자작곡으로 싱글앨범을 낼 계획인데 그때 녹음비로 쓸 거다.
-KBS <남자의 자격> 팀과 함께 도전했는데, 실제로 보니 실력이 어떻던가?
유승혜 : 직장인 밴드라고 해도 이전에 조금씩 배운 경험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남자의 자격> 팀은 거의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으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무대 매너도 좋았다. 역시 끼가 있는 사람들이 다르긴 다른 것 같다.
-곡을 직접 들어보니 흥겹고 신나는 리듬이 인상적이다. 아마추어가 작곡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도 있는 듯하다.
한수희 : 이 곡을 만든 유승혜 양이 바로 유재하가요제 은상 수상자다. 우리 밴드의 음악적 지주라고 할까? 우리 밴드의 색깔을 가장 잘 녹여낸 곡인 것 같다. 다른 무대에서도 불러봤는데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유승혜 : 원래 음악을 했는데, 여러 가지로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취직을 했다.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살다시피 했는데 대학교 선배이기도 한 정지민 씨가 ‘직장인 밴드 한번 해볼래?’ 하고 가볍게 권유하기에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 이렇게 죽자 사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일 줄 몰랐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다시 음악을 하면서 전보다 사는 게 재미있는 것은 확실하다.
-회사 업무가 많을텐데, 연습 시간 맞추기가 쉬울 것 같지 않다.
한수희 : 야근이나 출장이 많아서 일요일 외에는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하지만 다들 의욕이 있어서인지 매주 한 번씩은 꼭 연습하자는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다. 이제는 일요일마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왠지 섭섭하다.
-직장인 밴드라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
유승혜 : 우리는 스스로 회사 소속을 밝히지 않는다. 물론 회사에서 밀어주면 더 편하고 좋은 건 있겠지만 우리 이름으로 인지도를 얻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인 밴드여서 좋은 점은 늘 가까이에 함께 있다는 것?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사내 메신저로 즉시 주고받을 수도 있고, 쉬는 시간에 잠깐 만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 이건 회사에 비밀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잘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면?
최용석 : 다들 어느 정도 악기 연주 경험이 있는 반면 김정수 군은 베이스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밴드에 들어왔다. 그런데 엄청난 연습벌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연습하는 걸 보고 나머지 멤버들도 많은 자극을 받았다.
김정수 : 처음에는 뭘 모르고 시작했는데 점점 실력이 느는 게 보이니까 재미있었던 것 같다. 재미있으니까 더 몰입하게 되고, 더 잘하고 싶었다.
-요즘 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직장인 밴드가 많이 늘고 있는데, 대부분 자기만족 수준에서 끝나거나 몇 년 안 돼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많다.
한수희 :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음악적인 욕심이 굉장히 큰 편인 것 같다. 웬만한 밴드 대회는 다 나가는 편이다. 일단 목표가 생기면 연습할 때도 더 의욕과 결속력이 생기는 것 같다.
정지민 : 맨 처음 대회에 나갔을 때는 우리도 예선에서 꼴찌를 했다.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아무튼 너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만약 거기서 그쳤다면 우리도 흐지부지됐을지 모르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많이 배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었던 것 같다.
-밴드 멤버들 간의 팀워크도 음악적 성취만큼이나 중요할 거라 보는데.
유승혜 : 클럽 공연 가서 보면 인디밴드들도 공연 끝나고 내려오면 마치 남처럼 흩어지더라. 팀워크 없이 프로젝트로 엮인 팀이 종종 있더라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연습 때건 공연 때건 끝나면 무조건 뒤풀이를 해 노는 게 반이다.
한수희 :그런 프로 인디밴드보다는 우리가 더 신나게 공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그게 직업이 되면 힘들어진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우리에게 음악은 일이 아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낙원이다.
-마지막으로 공식 질문을 던지겠다. 나에게 메리고라운드란?
정지민 : 또 하나의 가족?(일동 야유) 회사 홍보하려는 게 아니고,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조현상 : 놀이다. 우리가 여기 아니면 어디 가서 놀겠나. 우리 직장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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