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일찍 피었다 사그라지다 처음엔 작은 오만 같은 거였다. 조금만 머리를 잘 쓰면 백일장 장원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3년 내내 전국대회 규모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휩쓸었다. 경기고 근방 10km 이내 학교에서 ‘김연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여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하교할 때면 “쟤가 이번 성대 백일장에서 장원한 김연신이래”라는 속삭임과 동경의 눈빛이 따라다녔다. 다 지난 일이지만, 뭐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조기 발화’를 하고 보니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 금세라도 들킬 것 같은 조마조마함이었다. 내가 진정 시인일까? 어쩌다 우연히 상을 탄 게 아닐까? 내가 과연 엘리엇의 ‘황무지’ 같은 시를 쓸 수 있나? 진짜라면 이 정도 시는 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오만함과 두려움의 경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지러운 시절이기도 했다. 고대 재학 시절에는 긴급조치 7호를 유발한 주동자로 찍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고, 군대를 갔다 오니 대학에서 받아주지도 않았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자발적인 가난으로 시인입네 행세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원대한 꿈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대우조선에 입사해 20여 년간 철저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다. 회사 밖에 있을 때는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는 시인으로 살았다. 꿈속에서도 시를 썼다. 새벽같이 출근해 8시가 되기 전까지 시상을 정리하는 시간은 그지없이 달콤했다. 그러나 8시 정각이면 시인인 나를 무서우리만큼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덕분에 직장에서는 남들보다 빨리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다. 대신 아주 가끔, 1년에 한 번 정도 술을 아주 많이 마실 때면 뭐가 그리 서러운지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동료들은 ‘저거 일 때문에 힘들어서 주사 부리는구나’ 생각했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분리된 자아로부터 오는 강렬한 스트레스가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부하 직원들을 앞에 열 지어 앉혀놓고 ‘왕년에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무용담을 태연히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조금은 서글픈 심정으로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라고 되뇌었다. 피었다 진 자리를 바라보다 결국 나는 그동안 써놓은 시 몇 편을 들고 20년 지기이자 소설가인 이인성을 찾아가 선언했다. “나 이제 시집 좀 내야 되겠다” 인성이는 “등단을 해야 하는데…” 하며 난감해했다. 왕년에 잘나갔던 ‘문청’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조심스러웠을 게다. 다행히 정과리 교수의 추천으로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할 수 있게 됐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문단으로 돌아온 나를, 많은 지인이 “너 어디 갔다 돌아왔냐?”며 반겨주었다. 시인 황지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땡중이라면 넌 저잣거리의 머리 긴 중”이라고. 그러나 시집을 내고 나서도 한동안 ‘내가 시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답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첫 시집 <시를 쓰기 위하여> 이후 <시의 바깥에서>, <시인,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나의 존재론적 고민은 계속되었다. 밖에서 나는 여전히 그저 시를 좀 쓰는 ‘CEO’일 뿐이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내면으로는 이렇듯 존재론적인 고민에 사로잡혀 방황하고 있었지만 회사에서의 내 모습은 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철저한 기업인의 모습이었을 테니. 그런 사람이 갑자기 등단을 하고 시집을 냈으니 별난 CEO의 외도쯤으로 보였으리라. 그들에게 나는 절대 시인일 수 없었다. CEO가 아니었다면, 절대 주목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상 첫 시집이 나왔을 때도, 기쁘지 않았다. 2004년 시집 <시인, 시인들>의 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책이 (내가 쓴 글들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섭다. 내 몸속에서 나온 것들끼리 여기저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무섭고, 그들의 치켜뜬 눈이 당신을 쳐다보기 시작하는 것이 무섭다.” ![]() 다만, 꽃의 마음으로 살 뿐 최근 출장을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김덕규 시인의 ‘772천안함 수병은 귀환하라’는 시를 읽으며 울었다. 좋은 시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시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다 보니, 이제는 어떤 결론에 서서히 도달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이 따로 없고 잘 쓴 시와 못 쓴 시가 없다는 것,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는 진솔한 시와 그렇지 못한 시가 있을 뿐이라는 것. 낙원상가에서 조잡하게 만들어 파는 2만원짜리 바이올린이라고 해서 악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음악에 대한 절실함을 안은 이가 켜는 싸구려 바이올린 소리가 아무렇게나 켜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보다 못할 리 없다는 말이다. 이제는 CEO의 자리에 올라 비교적 여유가 생겨서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철저히 이중으로 쪼개지 않는다. 시인으로서의 교만과 시인 아님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마음도 비로소 편안해졌다. 돈을 버는 요령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남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먼저 도와주면 돈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단지 남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필요로 하는지 볼 줄 아느냐 모르냐의 차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기업에도, 사회에도 통용되는 개념이다. 내가 하고 있는 금융조선업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선박을 만들 돈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투자처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을 연결해준 ‘선박 펀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투자를 받아 선박을 만들고 선박을 운용한 수익금을 투자자들에게 분배하는 펀드로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실물 펀드의 모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또 개인적인 꿈도 이루었으니 충분히 행복한 삶 아니냐고. 그러나 누구에게나 캄캄함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각자의 문제다. 일하는 재미에 취해 그저 하루만 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러다가도 가슴속 깊이 묻었던 꿈을 다시 꺼낼 용기 있는 이가 될 것인가 그 차이일 뿐이다. 요즘 나는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도는 리듬의 예술이다. 밀고 당기고, 적재적소에 힘을 주고, 상대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비록 늦은 나이지만 전국 대회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수학의 정석>을 한 권 사서 책상 한쪽에 두고는 생각이 막힐 때마다 한 문제씩, 천천히 풀어본다. 수학은 정신의 요가라고 생각한다. 학교 다닐 때는 점수에 집착하느라 몰랐는데, 정말 매력 있고 재미난 학문이다. 한 문제를 붙들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포기하지 않고 풀다가 기어코 정답을 찾아냈을 때의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앞으로는 또 무엇을 할지 즐거운 고민이다. 오토바이를 살까,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할까?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재미있게 생겨먹지를 않았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라도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살아야 한다. 당신이 시인이든, 직장인이든, 어머니든 간에 한정된 삶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찾기를 바란다. 가슴속 깊이 넣어두었던 뜨거운 꿈을 다시 찾기에 늦은 나이란 없으니까.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욤베이커리 에릭 오세르 제과장 (0) | 2010.08.18 |
---|---|
김치명인 강순의 여사 (1) | 2010.07.23 |
패션칼럼니스트 심우찬 (0) | 2010.07.02 |
유니버설 발레단 - 엄재용, 황혜민, 이승현, 한서혜 (0) | 2010.04.25 |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스티브 김 (0) | 2010.04.25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