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약속하고 방문한 유니버설 발레단의 연습실은 그 역사를 말해주듯 고풍스러웠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어디 갔는지,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하고 도도해 보였다. 곧 있을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은 한서혜 씨와 이승현 씨는 불과 지난해에 입단한 새내기. 그러나 입단 1년 만에 발레단 내 세 번째 서열인 ‘드미 솔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문훈숙 단장의 지도 아래 손끝부터 발끝까지 한 마리 백조가 된 한서혜 씨의 등에는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날 만나기로 한 또 다른 커플인 엄재용 씨와 황혜민 씨는 우리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최고의 발레 스타다. 둘은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2003년 이래 늘 함께하며 찰떡궁합을 자랑해왔다.
이렇게 최고의 발레 커플과 촉망받는 젊은 커플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발레를 하면서 지옥만큼 고통스럽다가도 어느새 천국처럼 행복해진다는 유니버설 발레단의 멋진 발레리나, 발레리노들.
시청자로서의 순수함과 발레리노로서의 자부심 사이

엄재용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1박2일> 팬이다. ‘발레리노는 예능 같은 거 안 볼 거 같다’고 하자,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쨌든 <1박2일> 시청자 투어 2탄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지가 뜨자마자 엄재용 씨는 준비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이유와 멀게는 발레의 대중화에 기여(?)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말이다. 발레단 측에서도 수석 발레리노의 이러한 취지를 기특하게 받아들여 흔쾌히 허락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발레리노들로만 구성해서 신청했어요. 사람들이 ‘발레’ 하면 모두 발레리나만 떠올리잖아요. 이참에 발레리노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은지원 씨가 ‘파드되(pas de deux, 남성과 여성이 함께 추는 2인무)’ 같은 거 추려면 발레리나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은근히 유도하더군요. (웃음)”

팀장인 은지원의 전화를 받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결국 참여를 원하는 발레리나 5명을 포함, 총 15명이 2박 3일의 시청자 투어에 함께하게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참 재미있었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 ‘리얼’이더라고요. 조금이라도 짜고 하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모두 가식이 없고, TV에서 보는 것과 똑같았어요. 2박 3일이었지만 정말 가족같이 지냈어요.”

가까이서 보니 더 대단했던 MC 강호동을 비롯해 천재인 듯 바보인 듯 묘한 매력을 지닌 은지원,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웃길 줄 아는 천생 개그맨 이수근 등등 TV로만 보던 <1박2일> 멤버들은 친근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처음 짐 싸서 내려갈 때는 마치 지방 공연이 있어 일하러 가는 기분이었어요. 단원들과 2박 3일 정도 출장 가는 일이 꽤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가니까, 정말 놀러온 느낌이 들어서 즐겁더라고요.”(이승현)

“정말 재미있게 놀았는데 프로그램 분량 때문에 잘린 부분이 많아 너무 아쉬웠어요. 저녁 게임에서 지는 바람에 고작 라면 5개가 할당됐어요. 우리 인원이 15명인데, 말이 안 되잖아요. 결국 이명한 PD님과 한 인간 제로게임에서 이겨 10개를 더 획득했죠.”(엄재용)

“발레리나는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아는 분이 많으시더라고요. 저희가 라면도 열심히 먹고, 먹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셨다는 반응이었어요. 어떤 분은 유니버설 발레단이 아니고 ‘유니버설 씨름부’ 아니냐며 놀리기도 하셨고요.”(황혜민)

이들이 대중 앞에 차려놓은 예술의 만찬
발레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달리 유니버설 발레단은 시종일관 친근하고 끼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메라를 보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먹을 게 걸린 게임에서도 의외의 실력을 보여줬다. 야외 취침 복불복에서도 멋지게 승리했지만 어르신이 많은 11남매 팀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유니버설 발레단이 빛났던 순간은 둘째 날의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그동안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발레단원들이 토슈즈를 신고 <백조의 호수>를 연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솔직히 그런 무대에서 춤을 춰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과연 공연이 가능할까 조심스러웠는데, 다리만 들어도 환호를 해주시니까 기분이 참 새로웠어요. 제가 발레 공연을 하면서 그런 함성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요.”

특히 흑조로 분해 32바퀴 회전 동작인 푸에테(Fouette)를 멋지게 선보인 한서혜 씨는 특유의 미모가 화제되어 프로그램이 끝난 후 열렬한 반응을 끌어내기도 했다. 개인적인 사진 등이 인터넷에 노출되고 뉴스로 나오면서 의도치 않은 유명세를 탄 것.

“예쁘다고 해주시니 기분은 좋죠. 그런데 거기에도 악플은 달리더라고요. 악플의 단골 메뉴인 성형 의혹까지…. 저 정말 자연산이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좀 당황스러웠어요. 하지만 길거리에서 ‘한서혜다!’ 하면서 알아봐주시는 경험을 처음 했는데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한서혜)

발레 공연이 끝난 후 은지원의 노래인 ‘사이렌’에 맞춰 발레 동작을 접목시킨 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현장의 열광적인 반응은 물론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도 ‘발레는 우아하지만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몰입할 수 있었다.

“방송이 나간 뒤 미니홈피 방문자 수가 확 늘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이런 글을 남기셨더라고요. ‘<1박2일>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발레 공연을 예매했어요.’ 그걸 보고 우리가 방송에 출연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구나 생각했어요.”(엄재용)

사실 발레라는 예술 장르의 이미지는 견고하게 둘러싸인 성벽처럼 단단해서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다. 고상하고 우아한 음악, 가녀리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애절한 표정, 희디흰 스타킹에 클래식 튀튀, 1백 마디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다채로운 춤사위…. 그 자체로 예술의 최고점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반대로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발레도 뮤지컬만큼 재미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발레에도 언어가 있어요. 말이 아니라 몸짓 언어지만 ‘나’, ‘너’, ‘사랑해’, ‘함께 가요’ 등등 몇 가지만 알아두면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가 되거든요. 이번 방송 출연을 통해 발레가 어렵다는 편견을 조금이라도 깬 것 같아 뿌듯해요. 하지만 저희가 일부러 망가진 건 아니에요. <1박2일>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저희도 ‘리얼’이었어요.”(엄재용)

세기의 ‘지젤’로 손꼽혔던 문훈숙 씨가 단장으로 있는 유니버설 발레단은 세계에서 더 유명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발레단이다. 그러나 고급 예술 영역에서 벗어나 좀 더 대중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공연을 할 때마다 단장이 직접 나와 공연에 얽힌 이야기와 발레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거나, 꼭 큰 무대가 아니더라도 백화점 문화센터 등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이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몸의 예술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비록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볼거리 위주로 그려지긴 했지만, <1박2일>은 적지 않은 사람에게 발레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들은 예술이라는 견고한 성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비상하고,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발레, 그 매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늘도 이들은 연습실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네 사람의 이야기
유니버설 발레단은 1984년에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발레단이다. 그 이름 때문에 외국 발레단 아니냐는 오해를 종종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총 70여 명의 무용수가 소속되어 있고 지금까지 약 4백10회의 해외 공연과 약 1천2백 회의 국내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한국 발레를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날 만난 황혜민 씨와 엄재용 씨는 유니버설 발레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용수로 8년 동안이나 유수의 공연을 통해 서로 짝을 맞춰왔다. 반면 이승현 씨와 한서혜 씨는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신예 무용수로, 어린 나이에도 우아하고 성숙한 연기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차기 유니버설 발레단의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
발레의 운명을 타고난 남자_ 엄재용
엄재용 씨에게 발레는 운명과도 같다. 거창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를 찬찬히 살펴보면, 발레리노가 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발레리나 출신인 어머니와 살면서(그의 어머니는 김명회 서원대 무용과 교수다) 무의식적으로 발레를 보며 익히고, 긴 팔다리와 작은 얼굴의 서구형 체형을 갖춘 우월한 유전인자에, 왜 너는 발레를 안 하냐며 부추기는 주위에 사람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꽂히기 전까지는 발레에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에게 발레는 운명이었다.

“정말 신기한 것이요, 갑자기 발레가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중 2 때까지는 아이스하키 같은 남성적인 스포츠에만 끌렸거든요. 물론 지금도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를 좋아하긴 하지만 발레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보다 저를 사로잡은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 우연히 <지젤> 공연 동영상을 본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우아하고 고혹적인 매력에 그는 완전히 사로잡혔고, 이윽고 발레를 배울 결심을 하게 된다. 동작 하나하나를 익히고, 최고의 연기를 위해 몸을 만들고, 그렇게 점점 빠져들었는데 우연처럼 그의 첫 무대도 <지젤>이었다.

“늘 이야기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바람은 은퇴 공연을 <지젤>로 하는 거예요. 저를 발레의 길로 이끌어준 작품이니만큼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유니버설 발레단을 대표하는 수석무용수, 무용협회 연기상, 발레협회 당쉐르 노브르상 수상자. 엄재용 씨는 이미 정상의 자리에 선 발레리노지만 처음 발레를 시작할 때처럼 늘 한 동작 한 동작을 더 잘하기 위해 끝없이 애쓰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예술에는 끝이 없으므로 그의 발레에 대한 열정도 좀처럼 식지 않을 듯하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백조의 화신_ 황혜민
처음 발레를 시작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공주 옷 같은 예쁜 의상은 소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발레를 할 때만큼은 이 작은 어린 소녀도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될 수 있었고,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 공주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고 입시가 시작되면서 크고 작은 슬럼프가 오갔고, 순수했던 열정은 사그라지다 불타오르기를 반복했다.

“20년 넘게 발레를 했으니 그동안 찾아온 슬럼프야 수도 없죠.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 때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극복해내고, 정신적으로 우울해질 때는 열심히 몸을 움직여 털어내곤 해요. 가장 난감할 때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동시에 찾아올 때인데, 가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하죠. 이럴 땐 별수 없어요.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수밖에.”

선화예중 재학 중 유학길에 올라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와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2002년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하기까지….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밟았던 그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 글 몇 줄로 설명할 수 있으랴.

“매일 몸이 아파요. 그렇게 오랫동안 연습하고 훈련했는데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전신에서 통증을 느낀다니까요. 비 오는 날은 무릎이 아프고, 다음 날은 허리나 어깨가 아프고…. 무슨 애늙은이 같죠?(웃음)”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몸, 금세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청초한 눈매, 그녀는 순수하고 우아한 백조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올해 나이 서른셋, 발레리나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다. 열한 살 때부터 최고의 발레를 위해 길들여진 몸이니 이곳저곳 고장이 안 나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의 세례를 받은 그녀의 몸이 그려내는 아라베스크나 에튀티드는 발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현현하고 있다. 최고의 무용수로 인정받기까지 가녀린 몸이 감당해야 했던 혹독한 훈련의 흔적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그녀는 우아한 백조, 그 자체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차세대 발레 스타_ 한서혜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백조의 호수> 공연 준비를 위해 문훈숙 단장으로부터 특훈을 받고 있는 한서혜 씨의 얼룩진(?) 등이었다. 마치 허리 부상으로 붕대 투혼을 보여줬던 김연아 선수의 그것처럼, 그 가녀린 등에 빽빽이 붙어 있는 파스를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3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죠. 주연을 해본 적이 몇 번 있지만 <백조의 호수>만큼 큰 공연은 처음이어서 긴장이 많이 돼요. 나이도 어린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그런데 몸이 정말 천근만근이네요.”

한서혜 씨는 아주 자연스럽게 발레의 길로 들어선 경우다. 어머니가 발레리나 출신인 데다 고모는 성악가고, 오빠와 언니는 클래식 악기를 연주한단다. 그녀도 주위의 권유에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발레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 길만 걸어왔다. 스스로의 적성과 주위 환경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경우라 하겠다. 덕분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조기 졸업해 남들보다 2년 빨리 프로 발레리나로 입성할 수 있었다.

“다른 발레단에 비해 유니버설 발레단은 세대교체가 빨리 되는 편이에요. 나이 차도 크게 나지 않아서 위압적이기는커녕 친구처럼 선후배 사이가 좋아요. <1박2일>에 나온 것처럼 서로 장난도 많이 치고 재미있게 지내죠.”

짝꿍인 이승현 씨와 함께 올해 드미 솔리스트가 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프리마돈나를 향한 행보를 시작할 전망이다. 한 번의 방송 출연으로도 폭발적이었던 대중적인 인기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발레리나 한서혜 씨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때를 기대하며 연습을 멈추지 않는 그녀. 이마에 맺힌 땀마저도 곧 피어날 꽃봉오리 같았다.
한국의 빌리 엘리어트가 떴다!_ 이승현
이제 갓 소년 티를 벗은 듯한 앳된 얼굴, 반항기와 장난기를 동시에 머금은 인형 같은 눈매. 아직은 미완성인, 그러나 머지않아 무지막지한 폭발력을 보여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하는 발레리노 이승현.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빌리 엘리어트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물론 그 시작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지만.

“사실 저는 키가 크고 싶어 발레를 시작했어요. 중학교 때 키가 150㎝밖에 안 되었거든요. 무용을 하면 키가 클 수도 있다는 말에 처음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게 고 1 때였는데 그때부터 거짓말처럼 1년에 10㎝씩 커서 지금은 180㎝가 됐어요. (웃음)”

주위에 발레에 대해 아는 사람도,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도 없었기에 그에게 발레는 낯설고 이질적인 저 너머의 예술이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게 부끄러웠다. 쫄쫄이 타이츠를 입는 것도 민망해서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부쳤다. 그러나 다른 발레리노들이 그랬듯이 그도 곧 발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발레를 한다는 그의 고백을 들은 친구들은 “너, 게이가 된 거냐?”며 비웃음 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막상 그의 발레를 보고 나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키로프 발레아카데미, 세종대학교를 졸업하고 지난해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올해 드미 솔리스트로 승급됐는가 하면 생애 처음으로 <백조의 호수> 주연까지 꿰찼다. 이제는 쫄쫄이 바지가 오히려 편하고 자랑스럽다는(?) 발레리노 이승현 씨의 두 어깨에는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by 트래블러 2010. 4. 25.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