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적 후 이틀 뒤인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됐다. 전날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조문객들로 그 넓디넓은 절 마당이 시장처럼 복작거렸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다비하여 주기를 바란 법정 스님의 유지대로 그 절차는 놀라우리만큼 간소했다. 다비장이라고 따로 마련한 것도 아니고 산속 움푹 들어간 공터에 나무를 쌓아 만든 연화단뿐이었다. 그 흔한 영결식도, 사전행사도 없었다. 지닌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무소유를 실천하며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다운 마지막이었다.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선각자
그는 수행자이자, 선승, 자연주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법정 스님이 법회를 통해, 혹은 글을 통해 이야기해온 무소유, 자유, 단순한 삶, 침묵, 홀로 있음의 진리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서서히 대중의 뇌리 속에 스며들었다. 우리 삶의 가치가 ‘성공’에서 ‘행복’으로 바뀌어간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던 그는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마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나중에 법정 스님은 출가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법정 스님은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하여 1956년에 송광사에서 당대 선승이던 효봉 스님의 문하에 출가했다. 그 후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했으며, 사미계를 받은 뒤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그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다가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한때는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대한불교신문> 논설위원을 맡는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정도로 현실 참여적이었다. 1971년 <불교신문> 칼럼 사건은 법정 스님의 이러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전 파병을 결정했을 때 불교계가 장병들의 무운을 비는 대규모 법회를 연 일이 있었다. 이때 법정 스님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가 전쟁을 하러 가는 군인들의 무운을 비는 건 웬 소리냐”며 크게 비판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같은 용기는 대단한 일이었다. 정병조 동국대 교수는 “한국 현대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 둘인데 한 분은 성철 스님이고 또 다른 분이 바로 법정 스님이다. 성철 스님은 수도자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고, 법정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언어로 나타냈다. 그는 한국 불교계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지만 모두 애정 어린 비판이었다”라고 불교사에서 스님의 가치를 평가했다.
그렇게 젊은 시절, 세속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법정 스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게 한 사건이 벌어진다. 1975년, 일명 ‘인혁당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으로 생때같은 젊은이 8명이 한꺼번에 사형을 당한 것이다. 이를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법정 스님은 수행승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수도하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뒤에 법정 스님이 그때의 일을 회고하며 말한 내용이다. 다시 출가 수행자의 위치로 돌아간 그는 철저히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호흡하기를 잊지 않았다.
“시골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나를 보더니 불쑥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아, 그 빨래판 같은 것이오?”라고 되물었다. ‘빨래판 같은 것’이라는 이 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꽂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전 에세이에서 이렇게 밝혔듯,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불가의 귀한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 쓴 저서가 바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명저, <무소유>다.
인생에 대한 성찰과 세상 사는 지혜를 담은 수필집, <무소유>는 1976년 발간된 이래 35년간 3백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최근까지도 매년 1만 부씩 팔려나가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에 대해 고 김수환 추기경이 “무소유를 강조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말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명실 공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필집이 되었다. 이 외에도 <산에는 꽃이 피네> <맑고 향기롭게> <텅빈 충만> <오두막 편지> <홀로 사는 즐거움>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어느 정도 인세가 모일 때마다 “이 돈은 수행자에게 지나친 재산이다”라며 필요한 이웃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작 본인이 중병에 걸렸을 때는 병원비가 모자랄 정도였다고.
70년대 불일암에서 수행 중이던 법정 스님의 젊은 시절
그리고 스님이 남긴 맑고 향기로운 흔적들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널리 알려온 법정 스님은 끝없이 정진하는 진정한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늘 무소유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일깨운 것처럼 자신도 청빈한 삶을 고집했다. 휴지 한 쪽도 절반으로 갈라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지병이던 폐암이 재발되어 돈이 많이 드는 수술이 필요해지자 치료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널리 알려온 법정 스님은 끝없이 정진하는 진정한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늘 무소유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일깨운 것처럼 자신도 청빈한 삶을 고집했다. 휴지 한 쪽도 절반으로 갈라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지병이던 폐암이 재발되어 돈이 많이 드는 수술이 필요해지자 치료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1994년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를 10만 장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고 대중 강연을 하며 본격적으로 사회 계몽운동을 펼치며 최근까지 모임을 이끌었다. 대원각 소유주인 고 김영한 여사에게서 아무 조건 없이 기증 받아 현재의 길상사를 지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는 창건 당시부터 지난해 병세가 심해지기 전까지 법정 스님이 대중들과 직접 만나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왔다.
그러다 지난 2007년, 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아간 스님은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았다가 폐암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인들의 강권으로 이때 미국 유명 암센터인 ‘MD 앤더슨’에서 수술을 받지만 결국 올 초 재발하고 말았다. 지난 1월 말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한 법정 스님은 체중이 45kg까지 줄어 보기에 처참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입적하는 순간까지 맑았다. 법정 스님의 속가 조카인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에 따르면 입적하기 이틀 전에 “내 소원은 하루빨리 다비장 장작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단다. 결국 3월 11일, 법정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 돌아와 그 올곧은 수행의 삶을 마쳤다. 육신에서 영혼을 떠나보내고서야 생전에 단 한 번도 하룻밤 이상 머문 적이 없던 길상사에 비로소 몸을 누인 것이다.
법정 스님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무소유’라는 철학적인 단어가 함께 떠오른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신선 같은 언어를 가져보았던가. 이렇듯 법정 스님이 낸 수십 권의 대중서는 불가의 교리와 영혼의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쉽게, 그러나 깊숙이 간직하게 해줬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제 더 이상 길상사의 고즈넉한 절 마당에서 법정 스님의 고요하고 맑은 법문을 들을 수 없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바란다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주옥같은 저서도 더 이상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법정 스님의 모든 저작권을 위임받은 시민 모임 ‘맑고 향기롭게’의 김자경 사무국장은 “절판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며 사무국에 항의 전화를 하는 분들도 많다. 스님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또한 무척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어쨌든 스님이 유언을 남기신 만큼 출판사들과 함께 해법을 찾고 최선을 다해 유지를 받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제 그의 목소리도, 그의 책도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게 됐지만, 그가 우리 마음속에 남긴 족적은 맑고, 향기롭게 퍼져나갈 것이다.
법정 스님의 소중한 인연
종교를 넘어선 향기로운 우정, 고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은 타 종교와의 경계를 무너뜨린 선구적인 역할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수십 년 동안 맺은 인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층과 종교를 초월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1984년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 2백 주년 기념미사. 법복을 입고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스님이 십자가 아래 제단에 선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이 낯선 풍경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신도들을 향해 법정 스님은 초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2백 주년 천주교 기념 미사에 저 같은 미약한 사람을 이 제단에 세워주신 천주님 은혜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 후 법정 스님은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해 종교를 뛰어넘는 향기로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각 사찰에서는 성탄절에 플래카드를 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있다.
스님과 수녀님의 은은한 인연,
이해인 수녀
두 사람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해인 수녀가 출간한 첫 시집 <민들레 영토>를 친구의 권유로 법정 스님에게 보냈고, 법정 스님은 이에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수필을 쓰는 스님과 시를 쓰는 수녀님은 이 일을 계기로 이따금 왕래하며 친분을 다졌다.
“자신의 수행에는 엄격했지만, 좋은 문장을 지닌 수필가였고, 가끔 유머감각을 보이실 때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소년 같기도 하셨죠. 어느 날 편지로 ‘성베네딕도 규칙서’를 보내달라시기에 그리 해드렸더니, ‘내 지령에 즉각 응답해줘서 고맙소’라는 답장을 보내신 거예요. ‘지령’이란 단어에서 장난기가 느껴져 웃고 말았죠. 산에 사셔서 새 이름을 많이 아시던 스님은 ‘수녀님은 뻐꾸기밖에 모르시지요?’라는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놀리신 적도 있어요.”
법정 스님은 이해인 수녀를 세례명(클라우디아)에서 연상한 ‘구름수녀님’이란 별명으로 곧잘 부르곤 했다고 한다.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 모임 10주년 때는 이해인 수녀가 기념 축시를 썼고, 2005년 음악회에도 초대받았다. 이해인 수녀는 스님을 찾아갈 때마다 “공양 주세요”라고 했고, 법정 스님은 “성찬을 즐기십시오” 하면서 서로의 종교 용어를 쓰곤 했다
.
늘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모신 조카,
현장 스님
대원사 주지인 현장 스님은 법정 스님의 속가 조카이자 절집 조카로 늘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보필했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 혼자 살면서도 부처님처럼 쉰다섯이 될 때까지 시봉승(시중을 드는 제자 스님)을 곁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또, 사소한 물건이라도 두 개 이상을 소유한 적이 없을 정도로 청빈의 도를 지켰다.
투병 중에 현장 스님이 “앞으로 스님 뵈려면 어디로 갈까요?” 하고 물었더니 “불일암으로 와”라고 하더란다.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는데요”라는 현장 스님의 말에 “그럼 길상사로 와. 거기 오면 나 볼 수 있지”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위트 있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일곱 제자들 상좌스님들에게 남은 숙제는 무엇?
다비식에서 법구를 운구하는 상좌스님들
덕조에게는 10년 수행에 정진…….
덕진에게는 ‘신문배달부를 찾아라’ 특명
법정스님의 유지를 철저히 받들어 간소하고도 정성스럽게 치른 다비식이 훈훈한 화제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법정스님이 가르친 일곱 명의 상좌스님이 있다. 바로 덕조,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스님이다. 상좌스님들은 길상사의 주지를 맡고 있는 덕현 스님을 비롯, 길상사의 크고 작은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덕문스님은 재무를 맡고 있으며 덕진 스님은 총무, 덕일 스님은 포교를 맡고 있다.
3월 17일 초재일에 공개된 법정스님의 유언장에는 상좌들에게 당부하는 몇 가지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첫 번째는 덕조스님에게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하라는 당부였다. 덕조스님은 창건 당시부터 지난해까지 12년 동안 길상사를 이끌어온 주지스님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3월, 임기를 3년 남겨둔 채 주지소임을 내려놓게 되었다. 덕조스님은 ‘인연이 다하여 홀가분하게 산속으로 정진하러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이라며 절을 떠났고 후임으로 넷째 상좌인 덕현 스님이 주지를 맡아왔다. 초재가 끝난 직후 덕조스님은 법정 스님의 당부대로 바로 불일암으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주의를 끄는 점은 여섯째 상좌인 덕진 스님에게 맡겨진 소임이다. 법정스님은 유언장을 통해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전에 이에 대한 언질이 전혀 없었기에 신문을 배달한 이가 누군지, 머리맡의 책은 또 무엇인지 확실치가 않아 상좌스님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많은 이들은 1972년 출간된 법정스님의 저서 ‘영혼의 모음’ 한 구절에서 단서를 찾고 있다.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글을 쓸 당시 법정 스님은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고 있었는데 신문을 배달하던 꼬마는 지금쯤 5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다래헌의 신문배달 꼬마가 유언장의 ‘그 사람’인지도 분명하진 않다. 그러나 법정스님으로부터 직접 부탁을 받은 이상 덕진 스님은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신문배달부를 찾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by 트래블러 2010. 4. 25. 0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