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감옥에 갇혀 서서히 자신의 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참혹함.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고 하는 루게릭병. 그것을 10년째 함께하고 있는 부부가 있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오래된 아파트 외관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한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분주하게 일행을 맞는 아내 이희엽씨 뒤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듯 앉아 원고를 다듬고 있는 이원규씨의 옆모습이 보인다.
올해 나이 쉰.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원규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발가락으로 마우스를 컨트롤하며 기자가 미리 보낸 질의서에 답변을 쓰는 중이었다. 몸이 성한 사람도 힘들 것 같은 발 마우스가 그에게는 묘하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왼손에서 발가락으로 그의 병이 진행되는 속도에 쫓겨 지금의 위치로 이동해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혹자는 루게릭병을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고 한다. 지적 기능과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기관은 죽는 순간까지 명료하게 남아 있는 반면, 육체에서는 매일 근육세포가 사라져간다. 말 그대로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의 육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참혹한 것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점점 더 악화될 뿐, ‘언젠가는 나으리라’는 한 줄기 희망마저도 가져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말기암 환자라도 수술이나 각종 치료약을 통해 ‘투병’할 수 있지만 루게릭병 환자는 그저 병세의 진행이 조금이라도 늦춰지기를 바랄 뿐이다.
1999년 겨울에 처음으로 진단을 받았으니, 루게릭병 환자로 오롯이 10년을 살아낸 이원규씨. 일반 루게릭병 환자들이 발병한 지 5년 이내에 사망한다는 정설에 비하면 그의 병세는 무척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병마는 더딘 속도로 야금야금 그의 육체를 갉아먹고 있다. 72kg의 건장한 육체는 50kg도 안 되는 앙상한 몸으로 변했고, 교편을 잡고 카리스마 넘치게 학생들을 지도하던 두 손은 미동도 없이 그저 팔걸이에 놓여 있을 뿐이다.

아내의 도움 없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이원규씨. 그러나 사람 좋게 웃는 표정과 사려 깊은 눈빛을 보니 아직 그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발로 마우스를 컨트롤하여 다음 카페 ‘루게릭병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그가 운영자로 있는 인터넷 카페다.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언론 소개’ 게시판에서 2004년 인터뷰 기사를 보여준다. 그 당시, 루게릭병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몸으로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고, 굳은 손가락으로 자판을 쳐서 박사 논문을 따내, 큰 화제를 모은 그였다. 거기엔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의 지난 10년이 자료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처음 루게릭병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문도 모른 채 사형대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이원규씨에게 루게릭병이 나타난 시점은 1999년. 워낙 희귀병이라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몰랐다고 한다. 암 판정을 받을 때 세상이 모두 끝나버린 느낌이라면 루게릭병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사형대를 향해 암흑 속을 걷는 느낌일 것이다.
그의 책에는 “그래,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거야. 절망하기엔 아직 일러”라고 마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고 되어 있지만,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자유롭게 자판을 치던 두 팔이 마치 남의 팔인 양 축 늘어져버릴 때, 가족에게 하고 싶은 천 마디 말을 뱉지 못하고 희미한 미소만 지어야 할 때, 그의 절망감을 우리가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남자 나이 마흔, 사회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쳐야 할 때 끔찍한 선고를 받아들여야 하던 이원규씨. 그러나 그에게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한 문장은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해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는 단순히 생명을 이어가는 데 삶의 목적을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꿈꾸고 희망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병 전에 다니던 대학원을 계속 다니며 석사 학위를 따고 또 곧바로 박사 과정에 돌입했다. 병세가 더 심해지기 전에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조급증도 크게 작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사 학위를 따는 3년여 동안 자유롭게 책장을 넘기던 두 팔을 거의 쓸 수 없게 되었고, 키보드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손가락도 기능이 떨어져 마우스로 화상 키보드를 하나하나 찍는 식으로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렇게 쓴 논문으로 발병 6년차인 2004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와 같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바로 다름 아닌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리라. 그런 병을 앓고 있는 그가,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공부를 끝까지 해냈다는 건 엄청난 의지력과 노력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틈틈이 시를 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박재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어엿한 시인이다. 내년쯤 그동안 적어놓은 시들을 모아 시집으로 묶어낼 계획이다.
평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바칠 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이 이원규씨의 생각. 그의 가장 간절한 숙원은 무엇보다 다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발병 전,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삼던 그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가르침을 얻고 사회로 나가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비록 병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학생들 앞에 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안구마우스와 음성변환장치 등의 보조 공학기기가 있다면 불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자판으로 적어 넣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의 곁에는 늘 아내 이희엽씨가 있다. 사실, 아픈 남편 대신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네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고, 남편의 병수발에 현재 고등학교 1학년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두 아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한다. 인터뷰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종종거리며 남편 이원규씨를 눕혀주고 앉혀주고, 식사를 도와주느라 분주했다. 병구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올 초에는 위염에 식도염까지 겹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남편과 아이들 식사를 챙겨주는 게 일이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남편을 컴퓨터 앞에 앉혀놓고, 소변 줄 끼워주고 저도 출근을 해요. 그동안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집에 오셔서 집안일을 도와주시기는 하는데, 남편은 제가 올 때까지 거의 꼼짝도 못하고 있어요. 밤에 잘 때는 몸을 뒤척이지 못하니까 2시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줘야 해요.”
누가 보아도 초인적인 힘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그녀는 잘 웃었다. 그녀가 힘든 내색 없이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남편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언어 장애가 더욱 심해져 신음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이희엽씨는 사소한 의견 하나하나를 이원규씨에게 물어가며 결정한다.
이희엽씨는 모든 일을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는 이원규씨의 심정은 오죽하랴. 그가 가장 최근에 썼다는 시 ‘내 사랑 크리스티나’에는 그런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크리스티나는 이희엽씨의 세례명이다.
앞으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남편이 예전처럼 건강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거죠. 하지만 그게 힘들다는 건 아니까 지금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좋겠어요.”
그녀는 아직도 ‘기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다행히 최근 근육세포의 퇴화를 막아준다는 ‘유스뉴로솔루션’이라는 의약품이 개발되어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주고 있다. 이미 죽은 세포를 살릴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의 죽음만은 미뤄준단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루게릭병 환자를 전면에서 다루고 있다. 배우 김명민이 20kg을 감량해가면서 실감나는 연기를 해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개봉하면 남편과 함께 보러 가려고 하는데 주위에서 루게릭병 환자 역을 맡은 김명민이 결국 죽으면서 끝난다고, 보지 말라고 권하더라고요. 남편에게도 말했더니 ‘원래 다 그런 거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네요. 하긴 10년간, 먼저 간 환자분들을 많이 봐와서인지 이제 어느 정도는 그런 문제를 초월하게 된 것 같아요.”
영화뿐만 아니라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며 베스트셀러가 된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등 언젠가부터 루게릭병은 극적인 이야기 소재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삶은 누구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이원규씨는 그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참 잘 살아냈다.
“저도 루게릭병에 걸린 이후,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소외감 등으로 많이 괴로웠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고통의 끝이 결국 ‘죽음’뿐일지도 모른다는 캄캄한 절망을 마주할 때입니다. 사실,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기대는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와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이렇지만 마음만은 허물어지지 않고 미소를 띠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5년 출간한 자서전 <굳은 손가락을 쓰다>는 진솔한 문체와 내용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며 알음알음 팔려나가 벌써 8쇄까지 찍었다고 한다. 특히, 루게릭병 환자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건강한 사람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살아 있는 한 절대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그의 눈빛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남편을 믿고 의지하며 함께 병에 맞서나가는 아내 이희엽씨도 한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 나와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안다면, 세상 근심의 반은 덜어지지 않을까요? 저희요? 그저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일본 ALS(루게릭병)협회 하시모토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루게릭병을 20년째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장애인들을 위한 쾌적한 환경과 설비를 갖추고 있는 일본이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일는지도 모르지만, 병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얼마든지 내적인 평화를 지닐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원규씨 부부도 10년째, 루게릭병을 함께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점점 악화되는 병세 앞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이 부부가 바라고 소원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기사제공 우먼센스ㅣ진행 홍유진 기자ㅣ사진 전호성
by 트래블러 2010. 1. 10.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