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우물 길에희망의 색을 입히다

- 2007년 10월 13일 ,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야트막한 산의 능선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낮은 집들이 옹송그리고 모여 앉은 곳. 이 십정동에 향긋한 문화 나눔의 현장이 포착되었다는 제보가 입수됐다. 숨은 문화 나눔의 향기를 좇아 향기추적팀이 달려갔다.

am 11:13 불량배 아파트에 둘러싸인 조그만 동네?

십정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동네다. 그래도 명색이 광역시인 인천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네의 정경은 남루하다. 오랜 기간 주거환경 개선 사업 들먹임에 매년 귀를 기울여 보지만 이미 십정동 주민들은 몸도 마음도 지친지 오래다. 선거철마다 공론이 들끓다가도 당선만 되면 모른 척하는 식으로 10여년을 끌었던 재개발이 올초 확정됐고 동네에는 빈집이 더욱 늘었다.
게다가 동네 어디에서건 시야를 가로막는 아파트들에 이 키 작은 동네는 꼭 덩치 큰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이 되었다. 주거환경개선 지구 지정이 결정되지도 않은 시점에 서 고층아파트들이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동네를 포근히 감싸주었던 함봉산의 풍경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셈이다..

pm 1:40 버림받은 동네, 그래서 더 애틋한 -

6,70년대 근처에 공단이 생김과 동시에 기하급수적으로 주거민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네가 바로 이 곳 십정동이다. 울퉁불퉁한 골목과 다소 엉성해 보이는 가옥들 또한 과거 주민들의 손에 하나하나 희망으로 세워졌던 것이리라.
십정동, 열 개의 우물이 숨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위로, 아래로 꾸불꾸불하게 이어진 좁은 골목들을 따라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어디쯤 향기로운 우물 하나가 길 잃은 나그네를 맞아줄 법도 하다. 그러나 수십 년간 동네 주민들의 지친 발걸음을 견뎌냈을 골목길의 시멘트는 하나 같이 닳고 깨져 성한 곳이 없다. 십정동에서 20년을 살았다는 강숙자 할머니 또한 '동네에 정은 많이 들었지만 이젠 얼른 보상을 받고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사실, 가까운 장래에 아파트촌으로 변모할 동네의 운명을 받아들인 십정동의 많은 주민들은 이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조만간 이주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부서진 간판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무너진 시멘트 계단은 일어설 줄 몰랐다. 거대한 기중기와 포트레인 앞에 조각날 동네는 체념한 채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향기추적팀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대체 이런 동네에서 누가, 어떤 문화나눔을 펼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할머니, 이 벽화들은 다 누가 그린 거예요?”
“이거? 몇 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구청에서 그려주는지 어디서 그려주는지 난 잘 몰러. 오늘도 저기 아래에서 채 씨네 할머니 집 벽에다 그림을 그리던데?”

pm2:37 페인트붓을 잡은 천사들을 만나다
십정동의 중앙을 가르는 안성길로 나오니 어여쁜 벽화가 그려진 집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얼기설기 세워놓은 울타리를 따라 오색 빛의 나팔꽃이 그 자태를 뽐내고 빛 고운 코스모스와 잠자리가 회벽 안에서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양떼가 뛰노는 목장 벽화 곁에서 담소를 나누시는 두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들 품에서 오후의 한가로움에 마냥 젖어있던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보더니 무섭게 짖어댄다. 할머니 말로는 어디서 다쳤는지 만신창이가 된 것을 데려다 키웠는데 사람을 많이 경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할머니, 이 벽화들은 다 누가 그린 거예요?”

“이거? 몇 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구청에서 그려주는지 어디서 그려주는지 난 잘 몰러. 오늘도 저기 아래에서 채 씨네 할머니 집 벽에다 그림을 그리던데?”
할머니가 가르쳐 준 쪽으로 우리는 당장 방향을 틀었다. 한 집 건너 하나씩, 화사하게 그려진 벽화가 길을 안내하는 듯했는데 머지않아 우리는 비로소 온 몸에 페인트를 묻힌 채 벽화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천사의 무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골목에 향기로운 삶의 색깔을 입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나지막한 담벼락마다 많은 사람들의 부지런한 붓질로 벌써 거지반의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날 향기추적팀이 발견한 향기의 진원지는 '인천 희망 그리기', 한 포털의 동호회를 기반으로 하는 벽화 그리기 봉사단체다. 이들이 5년 째 진행하고 있는 열우물길 프로젝트는 매년 조금씩 무채색의 십정동에 희망의 빛깔을 입혀왔다. 이 날 벽화 그리기도 십여 명의 자원봉사들과 함께 아침 10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인천 희망그리기' 의 운영자, 이진우 씨가 그리는 해바라기는 오후 태양빛을 받아 작열하듯 빛났다. 지난 2002년, 십정동 주민이기도 한 이진우 씨가 동네의 환경을 정비하고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취지로 지역 동료 화가들과 벽화를 그린 것이 시작이었다. 지난 5년간 수백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프로젝트에 함께 하면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십정동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곤 한다.
열우물길 프로젝트는 벽화 제작뿐만 아니라 사진 전시, 지역 어린이들이 참여한 미술작품 전시 등으로 이뤄진다. 공예를 전공한 조현정 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열우물길 프로젝트에 참가해 아이들의 미술 수업을 지도해주고 벽화그리기에 동참했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과 자발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그 성취감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죠. 좋은 일도 좋은 일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무척 재미있고 보람찬 작업이었어요.”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서 아이들은 뛰놀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잠시 멈추기도 한다. 인천 희망그리기가 제안하는 나눔의 의미는 적극적으로 행복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앉아서 행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 그래서 결국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나눔이다.

짤막 인터뷰

민중미술 2세대 작가인 이진우 씨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나눔 미술을 실천해 왔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인천 희망그리기’와 ‘거리의 미술 동호회’의 운영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와의 짧은 인터뷰.

"벽화가 예뻐요. 그림체도 다양하고요."
"저희 동호회에는 미술을 전공한 회원들이 많으니까요. 각각 다른 분들이 시안을 해 오세요. 벽의 모양과 분위기에 맞게 그림을 정하죠. 그래도 대부분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많이 주려고 해요."
"5년 동안이나 이 작업을 해 오시면서 힘든 일도 많으셨을 텐데."
"왜 없었겠어요. 처음에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일을 벌이는 거냐면서 마땅치 않게 보시는 주민들이 많았어요. 재개발이 빨리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림까지 그리고 그러면 더 늦어질지도 모른다며 반대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자원봉사로 하는 일인데 주민들의 여론이 그랬다면 굉장히 힘이 빠지셨겠네요."
"말씀은 하시지 않아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삭막하던 동네가 그래도 하나씩 예쁜 그림으로 채워져 나가니까 그걸 신기해하시고 좋게 보시는 분들도 점점 늘더라고요."
"올해 십정동이 환경개선지구 결정이 났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수년 내로 동네가 사라진다는 얘긴데, 허무하지 않아요?"
"이 동네, 이 골목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사는 한은 계속 해나갈 거예요. 재개발이 결정됐다고 해서 사람들이 단숨에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 분들이 사시는 날까지는 그래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십정동을 사랑하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시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보람은 뭔가요?”
"저는 이게 봉사라고 생각 안 해요. 나눔이라고 생각하죠.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거라고요. 이 일로 주민 여러분들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고 참여해주신 자원봉사자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하잖아요. 그럼 된 것 아닌가요?"
(인천희망그리기 http://cafe.daum.net/10umulgil)

글_ 홍유진
사진_ 서희연, 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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