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쪽빛, 장인의 손길에

하늘마저 빛을 내주네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 정관채

훈기를 머금은 북풍이 불어온다. 쪽빛의 명주천이 정신없이 흩날리는데 그 가운데 선 장인의 손길은 가만가만, 정갈하기 그지없다. 자연에서 색을 뽑아내는 사람, 정관채 염색장의 여여한 색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Edit. Hong you-jin |Photo. Oh choong-seok

손에 손을 거쳐 쥐어진 쪽씨 한 움큼

장인의 안내로 나주천연염색문화관을 둘러본 후 근처에 있는 그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공방 한 편에서 그의 부인 이희자 여사가 단아하게 앉아 쪽수건을 다림질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집채만 한 항아리들이며 재료를 쓰일 조개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작업장 바로 뒤에는 장인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황토집이 정겹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이 무서운 기세로 먹구름에 뒤덮이나 했더니 황톳집 뒤편을 아늑하게 감싼 대숲에서 잎사귀 부딪는 소리가 분주하게 들려왔다.

“나주 샛골은 예전부터 쪽 염색으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쪽풀이 홍수에 강해요. 영산강 물이 해마다 범람을 해서 쪽 외에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거든. 온 마을 사람들이 길쌈을 하고 목화 농사나 쪽 농사를 지었다고 해요.”

‘샛골나이(샛골에서 무명 짜는 일을 통칭하는 말)’라는 고유명사가 생겨날 정도로 그의 고향인 나주 샛골은 길쌈과 천연염색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어린 시절 그도 길쌈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베틀 아래서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았다던 쪽풀은 60년대 무렵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성염료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70년대에 들어서고 좀 먹고살만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다시 찾기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셨던 예용해 선생님께서 어렵사리 쪽씨를 구해 오셨어요. 전통 천연염색기법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수자를 찾으시다가 당시 저의 대학 스승이셨던 박복기 선생님을 통해 저에게까지 온 거죠.”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쪽씨가 손에 들어왔을 때 느낀 장인의 사명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쪽 농사를 시작했고, 그게 삼십 년 천연염색 한 길을 걷게 된 시작이었다.

“주위에서는 모두가 반대했지. 옛날에는 염색쟁이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옛날 어른들도 염색을 하긴 했지만 먹고 살기위해 한 것이었으니 내가 갖고 있던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시작하긴 했으나 당시엔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다, 무엇보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염색한다는 게 육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무척 힘들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간 쪽물이 손끝에서 빠질 날 없이 한길만 걸어온 것은 아름다운 색을 만드는 일이 너무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시간과 햇빛과 바람의 힘으로 완성된 쪽빛

이른 새벽, 쪽밭에 나가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풀을 베어 담는다. 소쿠리에 가득 담은 쪽풀의 빛은 일반 풀의 초록색과 다르지 않다. 장인의 정성과 기술을 담아야 비로소 남색과 하늘빛을 섞어놓은 듯한 오묘한 쪽색이 탄생한다.

“수많은 색 중에서도 쪽은 천연염색의 꽃이라 할 만큼 염색과정이 까다롭습니다. 보통 물에 넣고 끓이면 그 색이 올라오거든요. 빨간색을 내려면 빨간 홍화를 물에 넣고 끓이면 되고 보라색을 내려면 자초나 포도껍질을 끓이면 되죠. 그러나 쪽은 달라요. 그 특별함 때문에 쪽색에 더욱 애착이 가는 걸지도 모르지요.”

쪽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의 힘이 필요하다. 정성 들여 잘 길러낸 쪽풀을 따다가 물을 부어 항아리에 담가놓고는 이틀 동안 기다려야 한다. 긴 시간 우려낸 색소 물에 석회가루를 넣고 또 오랫동안 저어야 한다. 그 다음엔 ‘발효’, 즉 미생물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콩대나 쪽대를 태워 만든 잿물을 넣어 발효시켜야 비로소 염료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햇빛’과 ‘바람’의 힘.

“쪽색을 환원색이라고 해요. 천을 염료에 막 적셨을 때는 연한 초록색을 띱니다. 그런데 햇빛 아래 널어놓고 자연이 불어주는 바람을 쐬어야지만 천이 마르면서 천천히 쪽색으로 바뀌지요.”

수줍은 새색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운 낯을 보여주듯, 장인의 정성어린 손길에 자연의 힘이 보태지면 그제야 비로소 맑은 쪽빛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쪽색을 내기 위해 장인이 흘렸던 피와 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번은 새벽에 쪽풀을 베다가 낫에 손가락이 절단된 적도 있었다며 상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왼손 중지를 보여주었다. 잘린 손가락을 주워서 병원에 가면서도 ‘그래도 쪽 일하다가 다쳤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니 그 열정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세상을 쪽빛으로 물들일 청출어람을 꿈꾸다

하늘을 뒤덮는 푸른 천이 바람에 휘날린다. 묵묵히 염색에 몰두하는 장인의 모습 뒤로 거대한 염색천이 고운 쪽빛을 자아낸다. 지난 해 세간에 화제가 된 한 증권사의 기업이미지 광고의 한 장면이다. 대목장 최기영 선생과 주철장 원광식 선생에 이어 정관채 장인도 자신만의 철학과 정신을 묵묵히 지키는 장인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미지 광고 모델을 물색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나, 잘 살펴보았을 것인데 내가 그런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기뻤지요. 무엇보다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염색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준 것 같아 더 뿌듯했고요.”

처음 시작할 때 비하면 천연염색의 저변이 많이 확대된 것도 사실이다. 도시에서도 천연염색으로 된 조각보나 공예품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화학염료보다 건강에 더 좋다고 해서 천연염색으로 된 옷만 고집하는 소비자도 늘었다. 그러나 쉽게 달아올랐다 빠르게 식는 한국 사람들의 특성상 금세 관심이 사라질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천연염색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늘었어요. 하지만 6개월을 못 버텨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못 됩니다. 염색 기술이야 머리 좋은 사람들은 금방 배울 수 있죠. 하지만 진정한 천연염색은 쪽을 다루는 마음과 자세에서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장인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배움이지요.”

‘청출어람’(쪽보다 쪽에서 나온 색이 더 푸르다)이라는 속담이 진정한 명언이라는 것을 보여줄 후계자가 아쉽다는 정관채 장인. 그는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훗날, 쪽으로 염색한 청바지를 개발해 명품브랜드로 세계에 선보일 꿈을 갖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쪼이는 햇빛 한 줄기가 쪽빛 천에 닿아 푸르게 빛났다. 농사와 작업으로 거칠고 뭉툭해진 장인의 손. 쪽빛으로 물든 손끝이 작업을 마친 천을 어루만질 때마다 햇빛도, 쪽빛을 바라보는 마음도 푸르러진다.

by 트래블러 2011. 3. 25.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