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낭암으로 투병 중이던 박완서 작가가 지난 1월 세상을 떠났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지만 늘 시대의 아픔 한가운데서 민중과 함께 호흡했던 작가. 때로는 따뜻하게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촌철살인의 어조로 현대인의 허위의식을 꼬집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아주 오랫동안 아련한 여운이 남는다.

1월 22일 새벽, 한국 문단의 살아 있는 역사인 박완서 작가가 영면에 들었다. 그녀의 장례식장 입구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평소 “내가 죽으면 찾아올 문인 중 가난한 이가 많으니 절대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한 고인의 뜻을 유족들이 따른 것이라 했다. 이처럼 박완서 작가는 유독 후배 작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했던 사람이다.

작가 박완서를 있게 한 근원적 힘

그녀가 담낭암 선고를 받은 것은 지난해 9월. 그 다음 달에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아 투병 중에도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심사를 맡아 병상에서 후보작을 읽을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심사 당일. 심사 장소에 나갈 수 없었던 그녀는 미리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문학상 심사였다. 그리고 끝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순 없었는지, 1월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흔히 작가들은 작품 속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킨다고 하지만, 공공연하게 사적인 삶을 드러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누구에게나 마음 한편에 존재하는 속물같이 질척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특히 민중 문학과 모더니즘이 격돌하던 1980~1990년대에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여성 소설가의 현대사 체험담은 ‘프티 브르주아’라는 평을 듣기 좋은 작품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럽다는 변명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비교적 솔직하게 소재로 활용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고, 나아가 자신의 유년의 삶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작품까지 발표하기에 이른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한 수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그녀의 문학이 ‘복수(復讐)로서의 글쓰기’ 혹은 ‘증언 문학’으로 표현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박완서 작가는 황해도의 시골 마을인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아비처럼 여기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실개천에서 물장구를 치고 풀과 꽃을 뜯고 산 열매를 먹으며 놀던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그녀와 그녀의 오빠를 데리고 상경하기에 이른다. 예닐곱 살 적에 이미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낄 만큼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울에 첫발을 내딛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과 시궁창 물이 흥건한 현저동 풍경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녀 적에 [삼국지]와 [수호지]를 읽고 그 내용을 술술 욀 정도로 박식했고 모성애 또한 남달랐다. 특히 반닫이 속에 가득했던 어머니의 책들을 그녀는 평생 기억했다. “나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 앉아 이야기를 졸랐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길로 믿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심심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 할 때도, 남과 같이 고운 옷을 입고 싶어 할 때도, 약아 빠진 서울 아이들한테 놀림 받아 자존심을 다쳤을 때도, 고향 친구가 그리워 외로움을 탈 때도, 시험 점수를 못 받아 기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이처럼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한테서 들은 숱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를 들으면서 직접 확인한 ‘이야기의 힘’은 박완서 문학이 존재하게 한 든든한 기둥이었다.

치열하게 살아낸 뒤 비로소 문학을 만나다

그녀가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때 박완서 작가의 나이 스물이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그녀는 학교 민청 조직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좌익에 가담했다가 의용군으로 떠나버린 오빠 때문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녀로 하여금 펜을 쥐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반공이 애국이 되고 복수와 밀고가 줄을 잇던 시절, 그 시대의 아픔은 그녀의 뇌리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시민증이 없는 오빠 때문에 피난 대열에도 합류할 수 없었던 일가는 처음에 자리 잡은 현저동에 몸을 숨긴다. 그러나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돼 오빠는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오빠는 어릴 적부터 명민하고 훤칠해 그녀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작은 영웅이었다. 그러한 오빠를 앗아간 전쟁에 대한 악의(惡意)는 박완서 소설의 가장 커다란 화두가 된다. 벌레와 같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들. 그녀가 언젠가 글을 써 증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인년 꽃다운 20세에 6. 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그녀의 이러한 증언 욕구와 복수 의지는 등단작 ‘나목’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났다. 박완서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은 ‘대체 소설의 경계가 어디인가’를 되묻게 할 정도로 흡사하다. 1950년 겨울 서울을 무대로 삼은 이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스무 살을 되돌아보듯 여주인공을 스무 살로 설정하고 전쟁통에 목숨을 잃은 오빠들과 그로 인해 생의 의지를 놓은 어머니를 담담히 그려냈다. 실제로 그 시절 그녀는 오빠의 죽음으로 반송장처럼 지내는 늙은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 둘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젊은 남자만 보면, “왜 저 사람은 살아 있냐?”, “왜 하필 내 아들만 죽었냐?” 라며 애통해하며 세상을 증오했다고 한다.

때는 1951년 겨울.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녀는 수없이 발품을 판 끝에 미국 PX 초상화부 점원이 된다. 당시 서울에 그만한 일자리도 없었다. 다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사족을 못 쓸 정도였다고. 하지만 말이 근사해 초상화부지,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간판장이 대여섯 명이 앉아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몇 푼 버는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녀가 평생 잊지 못한 중요한 일화가 탄생한다. 바로 화가 박수근을 만난 것이다. 어느 날 덩치만 크고 어수룩해 뵈는, ‘박씨’라고만 알고 있는 화가가 화집 한 권을 들고 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평소에 공용 허드레 붓을 안 쓰고 자기 붓으로만 초상화를 그리는 박씨를, 그녀는 그렇잖아도 속으로 비웃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박씨가 자기 그림이라며 가리킨 시골 여자 둘이서 절구질하는 그림 밑에는, 박수근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제야 박씨의 이름을 알게 된 그녀는 간판장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너무 버르장머리 없이 군 게 더없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박수근뿐 아니라 PX에는 서울대 출신이나 재학생도 있었고, 청소 아줌마 중에 중학교 교사 출신도 있었다. 전쟁은 인간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걸, 그녀는 뒤늦게 깨닫게 된다. 박수근이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될 줄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유명 화가가 될 줄 알았다면, 그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박수근의 그림 몇 점쯤은 손쉽게 얻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8호 정도의 초상화가 단돈 6달러, 그것도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절반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겨우 목숨줄이나 이어가는 정도랄까. 박수근은 가난했지만 의젓했다. 모두 돈! 돈! 돈! 하며 한 푼에 치를 떨 때도 박수근은 돈에 비교적 미적지근했다.

“훗날 박수근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매우 기뻤지만, 그의 생전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그녀 나이 마흔 살이었다.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으나 마음 같지가 않았다. 논픽션에는 사실이라야 한다는 족쇄가 따랐기 때문이다. 자기표현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전환한다. 이렇게 대학 노트에 촘촘히 기록해가며 완성한 작품이 바로 데뷔작 ‘나목’이다. ‘나목’은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그해 11월호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래도 글쓰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현대문학]에 단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실렸다.

운명의 아픔과 정통으로 맞닥뜨리다

그녀가 비로소 ‘작가’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신동아>에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가 실리면서부터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얼마 있다가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되기도 했다. 연이어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녁의 해후’, ‘아저씨의 훈장’, ‘엄마의 말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이때 작품들은 한결같이 소위 분단의 문제라고 하는 주제를 다뤘으며, 이를 통해 비통한 그녀의 가족사를 줄기차게 내비쳤다.

늦은 나이에 등단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박완서 작가는 등단 이후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 정력적으로 글을 썼다. 작가로 살았던 40년간 책을 내지 않은 해를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역이었다. 그러나 문학성과 대중적 인기를 양손에 거머쥔 그녀의 작가로서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88년. 그해 5월, 남편 호영진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편이 죽기 전 마지막 1년을 간병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 이때의 절절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매일 밤 남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소설의 모티브인 여덟 개의 모자는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제 때문에 남편에게 탈모가 생기자 하나둘 사 모은 것이다. 간병하면서 느낀 절망과 짜증, 슬픔과 애정뿐만 아니라 모자에 얽힌 신혼 때의 추억까지 그대로 작품에 녹여냈다. 그러나 그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지독한 슬픔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은 지 불과 3개월 만에 스물다섯밖에 안 된 외아들 원태마저 먼저 보내야 했던 것이다. 딸 넷을 내리 낳고서야 볼 수 있었던 귀한 아들이었다.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아들은 마취과 의사가 꿈이었다. 그러면서도 연극을 사랑해 연극 [세일럼의 마녀]에서 주연을 하고 [코뿔소]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아들의 묘비명을 직접 썼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 남편을 보내고 자식마저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부산 분도수녀원으로 들어간다. 20여 일을 하느님과 대결하며 산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였다. 남편과 아들이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쓴다는 게 사치요, 욕심이지 싶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 글은 그녀에게 공기였다.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공기.

“내 기억력 말고는 아들이 존재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낯설고 싫다. 그런 세상과는 생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처넣는 어미라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 끔찍하고 징그럽다.

” 어려서 잃은 아버지와 젊은 시절 먼저 보낸 오빠, 그리고 남편과 아들까지 집안의 남자들을 차례로 앗아가는 운명의 심술에 그녀는 통곡했다. 그녀는 슬픔을 잊기 위해 소설에 집착했다. 잠시 서울을 떠나 부산의 수녀원에서 한동안 기거하다가 막내딸이 있는 미국에 머물기도 했다. 당시 잡지에 연재하고 있던 ‘미망’을 6개월 정도 쉬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절망하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한동안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의미를 곱씹어본 끝에 나온 작품이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와 중편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한편, 휴재했던 대작 ‘미망’을 힘겹게, 그러나 끈질기게 마무리한 후 90년대에 들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라는 두 자전적 장편을 통해 자신을 소설가의 길로 이끈 첫 자리를 차분히 돌아보았다.

늘 주위를 어루만진 어머니 문인의 삶

작가 박완서의 삶을 되돌아볼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늦깎이 데뷔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섯 아이를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이라는 나이에 등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40년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써온 글이 바로 그녀를 영원한 현역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소설은 늘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삼았다. 마치 저잣거리에 나가 찬거리를 마련하듯 그렇게 소설을 쓰지만, 실상 뼛속의 진까지 다 빼는 고통이 따랐다.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나 사춘기에 섭렵한 문학 작품 그리고 애통한 가족의 슬픔과 응어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녀를 소설로 밀어냈기에, 쓰지 않았으면 지레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전쟁의 상처와 가족의 문제, 소시민의 의식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언어의 조탁도 탁월해 “유려한 문체와 빈틈없는 언어 구사는 가히 천의무봉”이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다. 등단은 늦었으나 작품 활동은 왕성했다. 덕분에 생전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보관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휩쓸 정도로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또한 후배 작가들에게 한없이 다정한 어머니 같은 존재로, 한국 문학의 대모라 불렸다. 박경리 작가가 곧고 카랑카랑한 여장부 엄마였다면, 그녀는 수줍은 소녀를 마음속에 간직한 자상한 엄마랄까. 그녀가 후배 작가들 가슴속에 심은 엄마의 초상은 신화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었다. 그것도 전통 농경사회의 엄마가 아니라 도시 중산층의 엄마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자식들을 낳고 기르느라 삶을 희생하다가 자식 세대와 소통하기 어려운 옛날 엄마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에 의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거덜이 나 이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넌더리를 냈다. 그런 만큼 균형감각을 가지고 현실과 사회를 고민했다. 그녀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당시 협의회 소속이었던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박완서 선생이 수백만 원씩 도와줘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85년에 문예지 [창작과 비평]이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을 때도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3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문화공보부에 내기도 했다. 평론가 김화영 씨는 “고인은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중간에 섰던 분이다. 우리 문단에 이런 분이 다시 없다”며 애통해했다.

박완서 작가와 아름다운 인연을 만든 이해인 수녀 또한 추모시를 써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엄마의 미소처럼 포근한 눈꽃 속에 / 눈사람 되어 떠나신 우리 선생님/ 고향을 그리워한 선생님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흙 속에/ 한 송이 꽃으로 묻고 와서 우리도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을 더 깊이 사랑하는 꽃/ 선생님의 인품을 더 곱게 닮고 싶은/ 그리움의 꽃이 되었습니다.” 1년에 몇 번씩 혼자 기차를 타고 역시 암 투병 중이었던 이해인 수녀의 수도원을 찾아갈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지난해 11월 초였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저녁도 먹고, 기도도 해드렸어요.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도 이리 힘든데 수녀님은 더 힘들지 않으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따님이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는 제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만나면 이별의 아픔, 언젠가는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잘 죽는 것이 과제라고, 어떻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고 죽을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하며 기도해야겠다고.”

1982년 그녀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도 늦깎이였다.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것 이상으로 매일매일 탄탄한 신앙을 쌓아갔다. 물론 아들을 잃었을 때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몇 달을 극도로 화를 내며 싸우기도 한 그녀다. 물론 상대는 하느님이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길어 올린 그녀는 스스로의 삶과 신앙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한다. 가톨릭 신문, 문화 및 시사 칼럼 등을 통해 신앙적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고, 서울주보에 연재한 글은 묵상집으로도 엮어냈다.

평소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 선배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데도 쉼 없이 내달린 작가였다. “내 눈으로 보고 어떻게 돕지 않을 수 있느냐”며 누구보다 먼저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작가였다. 1993년 3월 유니세프와 소말리아 난민촌을 방문해 현지의 열악한 상황을 돌아본 뒤 친선대사를 결심한 그녀는 같은 해 5월 영화배우 안성기와 함께 한국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위촉되었다. 그 후 유니세프 홍보사절 자격으로 몽골의 오지와 쓰나미 피해 지역인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등을 찾아가 어린이들의 상황을 살피고, 비극적인 현실을 글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 지구촌 어린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그 작은 체구에서 그런 힘이 어떻게 나올까 싶을 정도로 단호하고 날카로운 시선, 내면을 드러내는 글은 그녀를 1970년대를 풍미한 작가, 80년대 인기 절정의 작가를 넘어 평생 우리 곁에 남는 작가로 만들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도 손에서 종이와 펜을 놓지 않았던 그녀. 여느 작가들이면 진작 펜을 놓았을 시기인 70대에 펼쳐낸 창작 활동은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생전의 마지막 책이 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출간했다.

문학에도 세대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녀의 문학에 비교적 익숙한 40대 이상, 특히 여성들이 존재한다면, 그녀의 소설을 비교적 뒤늦게 알아챈 30대 이하 젊은 세대와 남성들도 대다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의 소설은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소화해내기에는 시대에 뒤처진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를 소설가의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 우리 부모, 때론 할아버지 세대의 용감한 증언자이자 한 위인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저작의 맨 앞날개나 뒷날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짤막한 이력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쉬운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세대가 경험했던 특별한 기억들, 특히 6. 25라는 비극이 가져온 삶의 변화를 남들이 침묵하고 숨기려 할 때 그녀는 여성의 관점에서 차근차근 증언해냈다. 그녀는 한국전쟁을 함께 경험한 동시대인들에게는 용기 있는 증언자였으며, 오빠나 남편을 잃은 여성들에게는 아픔을 공유한 소중한 동지였다. 또한 급속하게 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 마흔에 데뷔한 소설가로서의 삶은, 후배 여성들에게는 따라하고 싶은 성공 모델이 되었고, 각박한 경쟁 속 젊은이들에게는 따뜻한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험난한 삶을 결국 ‘살아냈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심장부터 발끝까지 떨리는 전율을 느끼듯 그녀의 삶에 많은 사람이 깊은 존경과 애도를 보내는 이유다.

진행_홍유진

출처_리빙센스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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