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소리


김애선 ‘둥둥나루’ 원장

둥둥둥…. 북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북채와 가죽이 세게 맞닿는 소리, 너와 내가 만나 공중에서 교감하는 떨림, 온 세상에 가득하지만 아무나 들을 수 없는 소리. 함께여서 더 행복한 아름다운 만남을 보여주는 예일보습학원의 자원봉사 동아리 ‘둥둥나루’와 김애선 원장을 만나 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백기광

2001년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주인공 트레버(조엘 오스먼트)는 어느 날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받는다. 한 사람이 3명을 도우면 그 3명이 각각 다른 3명을 돕고, 그런 식으로 세상이 변화된다는 기상천외한 답을 내놓지만 사람들은 모두 실현불가능한 소리라며 비웃고 만다. 하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노숙자는 새로운 삶을 찾게 되고, 어떤 이는 참사랑을 얻게 되며, 진정 소중했던 것을 되찾기도 한다. 그 모든 기적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김애선 원장을 만나면서 이 영화가 불현 듯 떠올랐던 이유는 그녀 한 사람의 결심과 실천이 참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작은 변화는 보석 같은 땀을 흘리며 북을 두드리는 아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년 전 여름, 처음 북을 만나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예일보습학원의 학생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밤 10시, 학원 수업이 마칠 때 즈음이면 녹초가 될 법도 한데 오히려 생생해져서는 그 늦은 시간에 집이 아닌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아이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근처 성당의 작은 강당이었다. 북을 하나씩 잡고 앉은 아이들은 매일 펜만 쥐던 여리고 작은 손으로 두툼한 북채를 쥐고 가락을 배웠다.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어깨는 떨어져나갈 듯 아팠지만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북채를 다시 쥐었다. 수업을 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덩기덕 쿵덕.” 가락을 붙여주거나 힘내라고 독려해주는 이는 다름 아닌 학원 원장이었다.
예일보습학원의 김애선 원장이 한창 공부할 아이들을 데리고 새벽 1시까지 매일 북치는 연습을 한 것은 바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근처 복지관의 지체 장애인들에게 북을 가르쳐주는 봉사활동을 실천하기 위해 먼저 북 치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김 원장은 서초동에서만 20년간 학원을 운영해온 베테랑 학원 교육자다. 그녀가 이렇게 학원 재학생들과 함께 색다른 봉사활동을 시작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줄바꿈##]
“당시 고등학생이던 딸이 봉사활동 할 곳을 찾는데, 의미도 있고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아이가 봉사활동 하는 김에 저도 함께 하려고 열심히 찾다가 지적장애가 있어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다니엘복지관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죠.”
작은 일도 크게 판을 벌이는 것이 김 원장의 특기. 봉사활동의 기쁨을 멀리 전파하고 싶었던 그녀는 딸 친구들의 부모, 학원 재학생들의 학부모 등 150명을 모아 ‘주목회’라는 이름의 봉사단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이 모이니 할 수 있는 일도 많았어요. 크게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고, 노인 마라톤 대회에서 어르신들을 보시고 함께 달리는 일도 했고요. 그러다보니 봉사활동의 재미에 점점 빠져들게 됐지요.”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강사 교육을 받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파고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강사 자격증까지 딴 김 원장은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 외에도 여러 종류의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다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어차피 우리 학원의 아이들도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악기를 배워서 가르쳐주는 봉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예요. 그렇게 2008년에 학원에서 ‘둥둥나루’라는 봉사동아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북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조용한 보습학원이 조금씩 시끌벅적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이 북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다
김 원장의 말마따나 ‘둥둥나루’는 특이하게 보습학원 내 봉사활동 동아리다. 1기는 벌써 졸업을 해서 대학생이 되었다. 현재는 2기 아이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둥둥나루’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복지관. 지체장애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학습, 예체능 교육 등이 실시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김 원장과 둥둥나루 아이들은 매주 목요일, 십 수 명의 지체장애 청소년들에게 북 치는 법을 개인교습하고 있다.
함께하기로 한 둥둥나루 멤버 6명 모두가 양재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런데 하필 이날 모의고사를 치르는 바람에 수업이 시작된 후 30분이 지나서야 허겁지겁 복지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체 장애 아이들도 또래 친구가 좋은지 나이든 선생님이 가르쳐줄 때보다 표정이 확실히 밝아진다니까요.”
김 원장의 귀띔을 듣고 보니 교복 차림의 친구들이 북채를 들고 곁에 서니 아이들이 신나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사실, 박자도 엉망이고 힘을 주어 북을 내리치는데 불과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북치는 시간은 다양한 친구들과 교감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다.
교복을 입은 둥둥나루 친구들은 겉보기에는 그저 공부 잘 하는 평범한 학생들로 보였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북치는 손놀림이 예사가 아니었다.
“북을 쳐본 것도 처음이고 이런 친구들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어요. 물론 처음엔 어려웠죠. 그런데 북을 가르치면서 점점 이해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장애우들의 환경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하게 되었고요.”
학원 원장님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했다가 북 연주와 봉사활동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는 소영이는 지난여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새벽까지 친구들과 연습하던 시간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한 이진이, 지현이, 소담이, 준우, 강일이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만 연습해도 팔이며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육체적으로 만만치 않은 북이었지만 ‘힘들어도 재미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둥둥나루에서 배워가게 된 것.
“학부모님들의 도움도 컸어요. 처음에 제가 제안을 했을 때 뭘 그렇게까지 봉사를 하나 싶은 어머님들도 분명 계셨을 거예요. 북을 한 시간 가르치기 위해서 연습하고 모이는 시간도 만만치 않은데 봉사시간은 딱 한 시간만 기록되니 효율적인 봉사활동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저를 믿고 따라주신 어머님들은 나중에 원서 쓸 때 큰 역할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제 말 듣기를 잘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특히 최근 들어 입학사정관제의 등장으로 봉사활동이나 동아리활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시점에서 둥둥나루의 색다른 봉사활동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행복나눔 자원봉사대회에서 동상을 받아 무려 100만원이나 되는 상금을 받기도 했다고. 그 전액을 사랑의 복지관에 기부한 것도 김 원장과 아이들의 자발적인 의지였다. 그동안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받은 상금을 모두 기부했는데 다 합치면 거의 1000만원에 이를 거라고 김 원장은 귀띔했다.

봉사활동으로 시작되는 작은 변화들
한 시간 남짓의 수업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은 아쉬운 듯 북채를 내려놓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둥둥나루 친구들은 잠시 남아 연습을 더 하기로 했다. 오는 토요일에 서초구청에서 주최하는 ‘세계1등 미래도시 상상화 그리기 경진대회’에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할 예정이란다. 자기들끼리 가락을 맞춰보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힘차게 내리치는 북 가락에 어깨가 절로 들썩거렸다.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북 앞에서는 기분 좋은 땀을 흘릴 줄 아는 멋쟁이 예인이 되는 듯했다. 오랜만에 맞춰보는 가락이라 그런지 자꾸 어긋나긴 했지만, 아이들은 서너 시간만 더 연습하면 된다며 공연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학교에서도 높은 성적을 유지한다며 김 원장의 자랑이 끊이지 않았다.
“둥둥나루 멤버 중에 한 아이는 동생이 1급 장애를 가지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이 활동을 하면서 서서히 밝아지더라고요. 올 초에는 한양대 공모수기에 자기 동생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어서 내기도 했는데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고요.”
이러한 변화는 가르치는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배우는 장애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작지만 소중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산만하고 소통이 전혀 안 되는 아이가 있었는데, 북을 배우면서 집중력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해요. 이제는 북채를 스스로 정리할 줄도 알고요. 이러한 변화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 봉사의 묘미가 아닌가 싶어요.”
하루 가서 짧게 봉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오랜 기간을 들고 장기적으로 만남을 갖는 봉사는 실천하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도 서서히 변화를 겪는다는 데서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 원장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요즘처럼 바쁜 때가 없다. 20년간 운영해오던 학원을 막내 동생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요즘엔 사회복지학을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새로운 영역에 뛰어드는데 망설임이 없어졌다는 것 또한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생긴 새로운 버릇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배우고 싶은 건 더 많아지니 걱정이에요. 자원봉사를 하면서 제 삶이 이렇게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요?”
김 원장이 참여하는 자원봉사는 둥둥나루뿐만이 아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미술치료 동아리 ‘한아람봉사단’이 또 출동한다. 학부모 중에 미술치료 전문가가 있어 자문을 요청했단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만들어 보면서 심리적인 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또 김 원장 개인적으로는 서예를 배워 매주 큰사랑 노인전문병원을 방문해 몸과 마음이 아픈 어르신들에게 한글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고.
“제가 좀 일을 크게 벌이는 스타일이긴 한데, 그래서인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네요. 앞으로 시간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많은 일을 하려면 말이죠.”

나눔의 아름다운 전파력을 믿다
김 원장은 봉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학원교육의 현재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교육1번지인 강남에서 20년 넘게 학원을 운영해 온 베테랑이기에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지만, 자원봉사로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고.
“물론 지금은 이런 저런 규제나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원봉사를 하면서 학원교육이 담당해야할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이 생기는 것 같고요.”
김 원장에게 진정한 학원교육이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여건이 부족해서 못 가르친 부분이든,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든 간에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함에도 배우지 못한 것을 학원이 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북을 만져본 적조차 없던 아이들이 우리 가락의 흥겨움을 알게 되고, 시험 성적에 일희일비하던 학생들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 동아리활동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 새벽까지 땀방울을 흘리며 좋은 일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배웠고, 모습과 말투는 조금 다르지만 만나보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지체 장애 친구들을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모두,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었다.
“점수만을 채우기 위한 봉사활동은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의 동아리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남을 돕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해주고 싶어요.”
작고 인자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카랑카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를 자랑하던 김 원장.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후 자연스럽게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여러 단체,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일을 진행하다보니 자신의 영리를 위해 음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어요. 봉사활동을 순수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자신이 대표가 되고 싶어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고요. 학원장이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니까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그러나 자신이 벌인 판에 뛰어들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성장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판을 늘려 갈 듯했다. 흔히들 봉사활동을 하거나 기부하는 것을 일컬어 ‘나눔’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김 원장의 말을 빌리면 ‘나눔의 전파력은 엄청나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눔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줄 알게 되는 법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리를 나눌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도 바로 나눔의 놀라운 전파력 덕분이 아니겠는가.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