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지기 - 숙명점역봉사회
손끝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교육

돈이 없어서 헌 교과서를 물려받고, 책이 없어서 한 권을 돌려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년에도 수백 종의 참고서와 문제집이 쏟아지는 요즘에도 어떤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여전히 불평등하기만 하다. 여기, 맹인 청소년을 위한 문제집을 만드는 수학 선생님들이 있다. 이들의 아름다운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희망적인 교육 이야기가 펼쳐진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차병곤

수학선생님들, 두 팔을 걷어 부치다
영화 ‘ET’에서 보면 지구의 어린이들이 외계 생명체와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 손끝과 손끝의 만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눈으로 서로의 다른 모습을 인지한 후 촉감으로 나와 통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명화 ‘천지창조’에서도 신과 인간이 손끝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손끝은 우리의 인체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감각을 자랑하는 부위이다. 무언가를 더듬는 손끝에는 ‘너에 대해 알고 싶다’는 대상에 대한 깊은 갈구가 담겨있다. 점자책을 읽는 맹인들의 손을 보면서 드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다.
보고 읽고 구경하고 흘깃거리고….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눈을 가진 우리로서는 차마 상상도 못할 일이긴 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란 어떤 모습일까? 어둡고 밝음조차 인식할 수 없는 캄캄한 암흑일까, 일그러지고 왜곡된 세상의 이면일까.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심정,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해 길을 잃은 듯한 상태…. 우리가 시각장애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를 대강만 떠올려보아도 이 정도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시각장애인들의 괴로움은 배우고 싶어도 길이 없다는 절박한 현실이다. 정보가 경쟁력이고 힘이 되는 이 시대에 배움이 모자라다는 것은 즉 성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로, 이제는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이용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되는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교육기회의 균등에 기여하고자 탄생된 수학정보공유사이트 ‘매스114’(www.math114.net)의 수학선생님들도 맹인 청소년들의 교육환경을 알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수학참고서 점역봉사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란다.
“맹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학책이란 게 달랑 교과서 한 권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눈 멀쩡한 아이들도 참고서에 수십 권의 문제집을 풀고서도 수학공부가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점자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수학교과서 한 권 가지고 공부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교육 강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열악한 교육환경이 존재한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해마다 수백여 종의 문제집이 출간되고 있음에도 맹인들을 위한 참고서나 문제집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어나 사회와 같이 텍스트만으로 이뤄진 교과서는 요즘 점역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서 불과 몇 분 만에 점자로 번역이 돼요. 하지만 수학, 과학 같은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그림과 도형, 각종 기호와 문자들 때문에 번역기를 돌릴 수가 없어서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합니다. 점역봉사자들이 있긴 하지만 수학, 과학은 전문 분야라 일정량의 교육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이런 사정을 듣고 봉사를 먼저 제안했던 것은 이형원 원장이었다. 교육 기회의 균등을 지향하는 매스114의 정신과 맞아떨어지는 일이라 생각한 것. 수학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작업을 하면 시간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훨씬 효율적일 거라 판단했다고.
“지난해 매스114 총회에서 이런 봉사에 대해 의견을 같이한 후 점자도서관에 뜻을 전달했어요. 그랬더니 그곳에서 숙명점역봉사회를 소개시켜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게 지난해 말이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주욱 봉사활동을 하고 있죠.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어요.”

배려와 관심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인연
숙명점역봉사단은 숙명여대 출신의 동문들이 모여 만든 봉사회 안에 있는 동아리 형식의 단체로, 지금은 일반에 개방되어 많은 이들과 함께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숙명점역봉사단의 권순인 회장 역시 학원장 출신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은퇴 후 봉사단을 창단,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봉사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희 봉사단은 숙명여대 재학생들로 이뤄진 점역봉사동아리와 동문들이 주축으로 되어 있었어요. 다른 텍스트들은 문제가 없는데 수학, 과학 참고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느 정도 전문성을 필요로 하다 보니 늘 일손이 부족했죠. 그러던 차에 수학선생님들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거예요. 처음에는 세금 환급이나 다른 목적을 가진 게 아닌가 조금은 걱정도 했는데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시간을 쪼개 일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이형원 원장님과 처음 만난 날이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요.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었나 싶어요.”[##줄바꿈##]
이형원 원장을 비롯한 매스114의 선생님들이 처음 도전한 수학참고서는 ‘개념원리 고등수학’이었는데 처음에는 점자가 익숙지 않아 한 문제를 치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에 돌아가 새벽 3~4시까지 점역작업을 하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자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 한 권의 참고서를 완성했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비로소 맹인 청소년들이 생애 첫 수학참고서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모의고사 문제집을 작업하고 있어요. 일반학생과 마찬가지로 시각장애인 학생들도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 수학 실력이 쑥쑥 늘지 않겠습니까? 양이 어마어마해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이로써 더 많은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는 아이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번쩍 힘이 납니다.”
“물론 아직도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장애물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는 학생도 있지만, 그래도 시각장애인들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교육혜택으로부터 가장 소외 받고 있는 사 람들이 아닌가…. 비록 소수를 위한 혜택이라고 해도, ‘모두’를 위한 교육을 지향한다면 공교육 쪽에서 이 사람들을 포용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봉사로 시각장애인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는 주경수 원장의 한 마디가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점자도서관 창립, 점자 교과서 발간 등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외에 꼭 필요한 책에 대해서는 90% 이상이 점역봉사자들의 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수시, 특목고 입시 등 학력만을 강조하는 입시 풍토에서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말이었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다시 시작되는 희망
권순인 회장의 안내로 서울맹학교를 방문했다. 교문 옆 담장에는 ‘나는 00가 되고 싶어요’ 라는 맹학교 학생들의 장래희망과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아이들이 이렇게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꿈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문득 눈물겹게 느껴졌다. 이 중 많은 아이들이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 결국 굴복당한 채 자신의 특기와 장기를 채 펼치지도 못하고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권 회장이 맹학교를 찾은 것은 동진이와 민태에게 수학 과외를 해주기 위해서다. 학원은 엄두도 못내는 아이들에게 사교육의 기회란 이렇듯 좋은 뜻으로 먼저 다가와주는 봉사자들에 의해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동진이는 전맹이라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스스로 공부하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자, 동진아, 1차 함수가 뭐였지? 고무줄로 한번 그려봐.”
그녀가 다트판에 압정을 꽂아 손수 만든 함수판이 이 날의 수업도구였다. 연필과 펜 대신, 촉감으로 보고 그릴 수 있도록 그녀가 고안한 색다른 함수 공부 방법이었다. 곧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면 동진이도 매스114 수학선생님들이 만들어준 수학참고서를 활용하게 될 것이었다.
이전에는 맹학교 학부모들로 이뤄진 ‘시각장애인 가족회’에서 많은 도서들을 점역해왔으나 최근 숙명점역봉사회를 비롯한 여러 점역봉사단체들이 생기면서 학생들도 읽고 싶은 책을 점역 의뢰해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수학 참고서가 한 권도 없었는데, 올해부터는 크게 달라졌죠.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걸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수학실력도 일취월장하지 않을까요?”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전맹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약시인 아이들 경우에는 글자만 크게 해주면 얼마든지 읽고 배울 수 있는데 학원에서 아예 받아주지도 않을 때 서럽더라고요. 시각장애우들을 조금만 더 배려해주는 문화가 확산되면 좋겠어요.”
여름철 습기가득한 반지하 사무실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가족회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좀 더 누리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들의 바람은 아이들이 많이 배워서 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평범한 학부모들의 바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퍼져나가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리라.
“가뜩이나 어려운 수학을 점자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정도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수학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수학 참고서를 점역해주시니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시각장애인 가족회를 이끌고 있는 이란경 회장은 이러한 작은 손길들이 모여, 아이들이 공부할 기회를 갖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엄마와 함께 사무실을 찾아온 9살 성태는 머리에 물이 차는 ‘수두병’ 때문에 수술을 받다가 시력을 잃은 케이스였다. 아직 점자를 완전히 익히지 못해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엄마들과 선생님들이 사랑으로 만들어준 책들을 한 권, 한 권 섭렵해 나가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러나 모든 것을 담은 듯한 큰 눈망울이 불현듯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점자라는 것은 여섯 개의 올록볼록한 점으로 이뤄져 있어요. 그 여섯 개의 점을 통해 이 학생들은 세상의 지식을 배우죠. 가녀린 손끝이 더듬거리며 점자를 읽는 모습이 이 변화무쌍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 나가보겠다는 절박한 의지로 보여서 마음 아플 때가 많아요. 진정한 교육 균등을 지원한다면 진정 손길이 필요한 곳은 이런 아이들이 아닐까요?”

숙명점역봉사회 소개

공부가 하고 싶어도 점역된 학습도서가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창립된 숙명점역봉사단은 가장 최근에 출판된 학습서를 중심으로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한 책들을 골라 점자로 번역하고 있다. 현재 숙명여대 대학생 100여 명과 매스114 수학선생님 20여 명, 서울맹학교, 한빛맹학교 학부모 교정팀 10명으로 이뤄져 있다. 숙명점역봉사단의 권순인 회장은 “앞으로 학원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진다면 1대1 교육 봉사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해가 필요한 과목인 과학과 수학의 경우 1대1로 하나하나 짚어주는 교습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원장님들이나 선생님들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는 능력은 누구나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거든요. 더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문의_ 031-793-6683 l 후원계좌_ 343601-04-056756(시각장애인 가족회)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