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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아주 특별했던 일주일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

아주 특별한 일주일이었다. 학교도, 학년도 제각기 다른 청소년 62명이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도 찍었다. 가르쳐주는 선생님도, 프로그래머도 따로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까지 아이들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면 충분했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이한마루



지루한 장마가 걷히고 오랜만에 여름다운 태양이 내리쬐던 8월의 어느 날, 인천 부평구에 위치한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을 찾았다. 크고 작은 행사가 지나간 뒤 사무실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흥분과 이런저런 흔적으로 어수선했다.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은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두잉’과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다. 청소년들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이곳에 와서 책도 읽고, 다른 한 편에서는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부르고, 또래 친구들과 사귀기도 한다. 20평 남짓,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파스텔 톤의 원목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모양이 아늑하고 포근하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다
내일의 터줏대감인 이금남 사무국장은 약 20년 전 고교생으로 처음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졸업 후 간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다른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하기도 하다가 지금은 다시 내일에 돌아와 사무국장 겸 청소년 인권 교육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 다시 부활한 내일의 청소년나눔문화학교 ‘해를 캐는 아이들’은 이미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방학이면 비교적 큰 규모로 진행해오던 연례행사였다. 최근 몇 년간은 청소년 인권 교육 및 각 단위학교 동아리 지원활동에 집중하다가 이번에 6년 만에 처음으로 부활시켰다.
“예산도, 인력도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었지만 올해만큼은 꼭 아이들을 위해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일을 통해 봉사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들을 모아 함께 계절학교 준비를 시작했죠.”
청소년나눔문화학교에서는 6~10명 내외의 학생들이 한 반을 이뤄 각각 특기적성 교육 및 실습을 하고, 이를 활용한 봉사활동을 실천하는 창의적 체험학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모자란 인력은 대학생자원봉사자나 현직 강사들로부터 재능기부를 받았고, 부평구청, 부평1동주민센터, 부평문화재단 등으로부터 장소협찬도 받았다.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준비팀’이란 이름으로 모인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전문가들에 의해 미리 완성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신들이 프로그램을 짜고, 사회를 봐야 하는 만큼 주인의식이 남달랐던 것.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자발적으로 거리홍보도 나가고 나눔문화학교가 진행되는 동안 늦게까지 남아서 뒷정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한 열정에 감화되었던 것일까. 처음에는 봉사점수나 따볼까, 하고 이곳의 문을 두드렸던 아이들 사이에서도 차츰 분반끼리 경쟁심도 불태우고, 서로 뜨겁게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청소년나눔문화학교에서는 디자인반, 노래반, 영상반, 연극반, 요리반, 댄스반 이렇게 6개 분반으로 나뉘어 일주일동안 각각의 주제에 맞는 활동을 진행했어요.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매일 또래친구들과 만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뭔가를 함께 주도적으로 만들어간다는 느낌만으로도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거죠.”
방학 때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체험활동이나 캠프 프로그램이 넘쳐나지만 나눔문화학교 프로그램이 이들과 다른 것은 아이들이 결과가 아닌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한 청소년회관에서 연극동아리를 운영하셨던 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분명히 결과만 놓고 보면 나눔문화학교 아이들이 더 모자란데 만족도는 훨씬 더 큰 것 같다고. 마지막에 발표회를 할 때 보이잖아요. 전문적으로 선생님들한테 트레이닝 받으면서 연습 열심히 해놓고서도 막상 무대에 올리고 보면 부족한 점이 왜 안 보이겠어요. 그럴 때 보통 아이들은 네가 못 했니, 누가 실수했니, 하면서 후회만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이래요. ‘아,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짜 잘했을 텐데. 그래도 재미있었어. 잘했어.’ 자기들끼리 지나치게 만족스러워 해요(웃음).”
사실, 우리 십대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청소년회관이나 복지센터 같은 곳에서도 숙제와 그것을 잘 해내야만 하는 의무를 부여받을 뿐 무엇이든 하고 싶은 걸 해도 좋은 권리를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러나 청소년나눔문화학교에서는 이미 완성된 수업의 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결과가 엉망진창이더라도 아이들이 만들어나가는데 의의를 두었다. 간사나 강사들은 아이들이 조언을 필요로 할 때 그저 거들 뿐이었다. 그 과정 자체에서 너무도 많은 성취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청소년나눔문화학교는 단순한 특기적성활동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자신들이 익힌 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으로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를테면 디자인반은 회색빛 산동네에 멋진 벽화를 남겼고, 댄스반이나 노래반은 자신들이 준비한 춤과 노래로 복지센터같은 곳에 찾아가 공연을 할 수도 있을 터이다. 이러한 활동은 공식적인 봉사점수로 환산돼 기록된다. 억지춘향 식으로 시간만 때우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특기적성도 키우고, 성취감도 맛보는 데다 봉사점수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인 셈이다. 아이들은 나눔문화학교가 끝난 뒤에도 계속 후속 모임을 이어가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실천할 예정이라고.

"참 안타까운 게 언젠가부터 십대 아이들을 보면 발랄하게 통통 튀는 젊음의 에너지가 아니라 혹독한 현실에 지쳐 무기력해진 모습이 더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아이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신나게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사회적 약자가 겪는 비정한 현실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청소년 인권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소년노동인권’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혹은 그 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일찍부터 사회에 뛰어드는 청소년 인구가 전국적으로 20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처음으로 겪는 사회의 쓴맛은 상상 이상이다. 어리기 때문에, 혹은 약자이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도 항의 한 번 못하고 억울함을 삼켜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언젠가는 성인이 되어 이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될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 맛본 사회의 일면이 ‘부조리’, ‘비리’, ‘폭력’과 같은 것들이라면 어떻겠어요?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노동현장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금남 사무국장은 매년 인천 시내의 중고등학교 50여 곳을 돌아다니며 인권에 대한 강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하나다. ‘너희들이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어. 누가 너희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한다면 그것을 참아 넘기지 마. 예민하게 대처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 마음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한단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감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인권 감수성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아야 해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분노할 줄 알아야 돼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잘못된 것을 시정해 달라, 요구할 줄 알아야 하는 거죠.”
그러나 현실이 말처럼 쉬울 리 없다. 법정 최저시급을 챙겨주는 곳을 찾아보기도 힘들 지경이고, 적으나마 주기로 한 급여를 떼이는 일도 다반사다. 일하다가 사고가 나도 보상은커녕 치료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내일은 이렇게 억울한 상황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몇 안 되는 곳 중에 하나다. 일대일로 이뤄지는 청소년노동상담이나 교사, 노무사 등 전문 인력과 연계한 노동인권네트워크 등을 통해 아이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직접 시정을 요청하거나 도움을 준다.
“청소년기에 땀 흘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은 분명 참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에요. 이 때 쌓인 경험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보살핌 받는 데만 익숙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스스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남보다 일찍 험한 사회에 발을 디딘 거잖아요. 얼마나 기특해요? 이런 아이들을 돌봐주지는 못할망정 무시하고, 못살게 구는 것은 어른의 할 도리가 아니죠.”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은 청소년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인권 강사 아카데미를 열어 인권 감수성의 확대를 위해 애쓰고 있다.

"언젠가는 성인이 되어 이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될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 맛본 사회의 일면이 ‘부조리’, ‘비리’, ‘폭력’과 같은 것들이라면 어떻겠어요?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노동현장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다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은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두잉과 같은 공간을 나눠 쓰고 있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은 부산에 있는 인디고서관과 같이 청소년들이 삶을 고민하고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독서 프로그램과 동아리를 운영하는 작은 단위의 사립도서관이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두잉은 2009년에 설립된 인천의 유일한 인문학도서관으로 약 4200여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인천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찾아와 무료로 책을 빌려갈 수 있고, 편하게 앉거나 누워 책을 읽다 갈수도 있다.
“학교에서는 점점 독서를 강조하며 책을 읽으라고 아이들을 내몰아요. 하지만 정작 학교에서는 그만한 도서관을 구비해놓지는 못하고 있죠. 엄마들도 애들한테 책을 많이 읽히는 게 좋다는 건 알지만 막막하기만 해요. 무조건 전집을 사다놓고 읽으라고 강요하는 일까지 벌어지죠.”
두잉의 운영을 맡고 있는 강미옥 운영위원은 장서 관리뿐 아니라 여러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아이들이 책과 함께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단순히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이슈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좋은 노래가 있으면 함께 기타를 치고 따라 부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과 만나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공간에 책이 있는 것이다.
“작년부터 재일교포 고등학생들과 청소년 교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지난해에는 우리 아이들이 일본에 갔고, 이번에는 재일교포 아이들이 인천에 와서 2박3일간의 캠프를 함께했죠.”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역사문화탐방을 함께하고, 책을 가지고 이야기도 나누는 가운데 우정도 싹트고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지난해 처음 만났을 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던 한 재일교포 학생이 있었어요. 그런데 올해 다시 만났을 때는 웬일로 더듬더듬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 거예요.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거죠. 한국 학생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세상이 더 넓어지고 마음의 문도 열린 거예요.”
두잉이 인문학을 모티프로 삼는 것은 인문학이 세상과 만나고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점점 외로워지고 고립되어가는 요즘 청소년들이 서툴게나마 세상에 손을 내미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은 예산도 거의 없고 인력도 모자란 상황이라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해나가지는 못해요. 하지만 인천에 이런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청소년들이 많더라고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청소년만큼 힘든 세대가 또 어디 있을까. 성장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고 혼란스러운데 사람들의 기대치는 너무나도 높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다. 현재의 행복과 욕망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모두 뒤로 미뤄놓아야만 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나중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 때. 그 때가 바로 청소년기가 아닐까.
“참 안타까운 게 언젠가부터 십대 아이들을 보면 발랄하게 통통 튀는 젊음의 에너지가 아니라 혹독한 현실에 지쳐 무기력해진 모습이 더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아이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신나게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사무국장의 말대로 내일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가지고 활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행복해보였다. 어쩌면 이 모습이야말로 십대 청소년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야 할 시기에 입시지옥에서 고통 받고, 어른들로부터 소중한 인권을 위협받는 게 우리 아이들. 그 현실을 잘 알기에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이 20년 가까이 늘 청소년 곁을 함께 해온 것일지 모른다. 책과 함께, 사람과 함께, 세상과 함께 더 많은 것을 나누고 누리는 아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
인권친화적인 가치와 문화에 기반한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비영리민간사단법인으로 1993년 설립되었다. 청소년들이 공동체의 가치를 느끼고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참여활동과 특기적성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할 줄 아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청소년뿐만 아니라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지향한다. 2009년에는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두잉을 설립, 책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다채로운 독서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청소년 리더십 교육, 공정여행프로그램, 청소년인권지킴이사업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문의 www.youth.incheon.kr, 032-528-3669
후원계좌 농협 137-01-3800831(예금주: 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by 트래블러 2011. 11. 22. 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