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닌자 어쌔신> 기자회견장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9개국, 2백여 개 매체, 5백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그만큼 월드스타 비, 한국인 최초로 할리우드 영화의 원톱 주연을 맡은 그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닌자 어쌔신>은 워쇼스키 형제가 할리우드 명제작자 조엘 실버와 손잡고 10년을 준비한 액션 블록버스터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극중 비는 자신을 살인병기로 키운 닌자 조직에 복수하는 암살자 ‘라이조’ 역을 맡았다. 조연으로 출연한 <스피드 레이서> 때부터 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 워쇼스키 형제는 일찌감치 주인공으로 비를 점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쇼스키 형제의 신작, “주인공은 바로 너”

“<스피드 레이서>를 촬영할 때 워쇼스키 형제가 닌자 관련 영화를 준비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제가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촬영 없는 날에도 현장에 나가 눈도장을 찍고 열심히 이들 곁에 붙어 다녔죠. 그러던 중에 ‘레인이 액션을 잘한다더라’는 소문이 났고, 워쇼스키 형제가 액션을 보고 싶다고 해 보여줬어요. 그랬더니 일주일 뒤에 닌자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고 하더라고요.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으니 ‘바로 너’라고 하지 뭡니까? 번개에 한 방 맞은 느낌이었어요.”

이것은 비에게 엄청난 기회였다. 한국에서 가수 생활을 할 때도 특유의 악바리 근성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그였다. 할리우드 배우 생활의 초석이 될 이번 작품에 남다른 각오로 덤빈 것은 당연지사. 워쇼스키 형제도 그에게 주문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고 한다. “팝스타 비는 잊어라, 인간 정지훈을 잊어라. 너는 격투기 선수고 킬러다”라는 것. 그리고 그는 영화에 참여한 8개월 동안 꼭 그렇게 살았다.

“평소에도 늘 이 악물고, 정말 죽기 살기로 했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정말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느꼈던 것 같아요. 스턴트 장면도 90% 이상 제가 다 했고요. 특히 몸을 가볍게 만들고 체지방을 다 빼야 했는데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그는 소금과 설탕을 전혀 먹지 않는 식이요법으로 체지방을 거의 0%에 가깝게 뺐고, 상상을 초월하는 운동량으로 근육을 키웠다. 몸에 지방이 생기지 않고 몸속 노폐물을 그대로 배출하도록 채소는 무조건 데쳐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 와인에 절인 닭가슴살을 먹었고, 2주에 한 번 아무 양념도 하지 않은 채 물에 삶은 순살코기를 먹었다. 심지어 외식할 때도 ‘소금이나 후추, 설탕 다 빼달라’고 별도로 주문할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했다.

“근육 만들기와 무술 연마를 8개월간 집중적으로 하다 보니 늘 정신적으로 화가 많이 난 상태였던 것 같아요. 길을 가다 누가 째려봐도 시선을 피하지 않을 정도로 전투적으로 변했죠. 촬영이 끝나면 진짜 격투기 대회에 나가야 될 것 같더라고요.(웃음)”

이전에도 몸이라면 자신 있던 비였다. 그런 그를 뼈를 깎는 다이어트 요법과 운동으로 진정한 조각 몸매로 변신시킨 일등 공신은 영화 <300>의 무술팀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네 몸이 매우 달라질 테니 단계별로 사진을 찍겠다”고 선포(?)하며, 지옥 훈련을 시켰다. 트레이닝팀은 “맷 데이먼, 브래드 피트도 우리가 트레이닝했는데 네가 제일 못하는 것 같다”며 비를 살살 약 올려, 오기로 더 열심히 하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10단계에 걸쳐 변한 비의 몸은 그야말로 ‘서프라이즈’였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면, 가난 때문에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힘들 때마다 이끌어준 그리운 어머니

육체적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이다 보니 정신적인 한계를 느끼는 순간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좋아하는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드라마나 영화도 찍고 싶었다.

‘이대로 계속해야 할까?’ 8개월간 수도 없이 스스로 던진 질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마음을 다잡은 것은 첫째가 ‘팬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진출하기 전에 팬들에게 ‘아주 좋은 스태프들과 함께 작품을 해서 세계 시장에 내놓겠다’고 장담한 기억이 났다. 두 번째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만둘 수 없었다.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아침마다 미국 진출에 관해 쓴 왜곡 기사나 안티 팬들의 글을 스크랩해놓고 읽으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겠다는 의지도 불태웠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까지 계속 레슨을 받고 운동하는 생활을 하며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자정에 들어오곤 하셨거든요. 어머니나 가족을 떠올리면 ‘이것도 못 견디다니 배가 부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배고프던 시절을 생각하기도 하고요.”

지난해, 비는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내 삶의 원동력은 어머니’라고 밝힌 바 있다. 심각한 당뇨병을 앓고 있던 비의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치료에 필요한 인슐린을 살 돈이 없어 결국 2000년,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당시 아픈 어머니를 위해 어떤 것도 해드릴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무척 힘들었다는 비. 투병을 하면서도 부은 몸을 이끌고 노점상 일을 하던 어머니를 기억하기에, 그는 잠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이번 <닌자 어쌔신>을 찍을 때도 힘들 때마다 동기부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이렇듯 지독하게 힘든 시절을 거쳐 왔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러한 그의 열정에 조엘 실버도 “앞으로 엄청나게 큰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될 것”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유수의 영화 관계자들은 이소룡, 성룡, 이연걸 등의 뒤를 이을 ‘넥스트 액션 히어로’로 그를 점찍어두고 있다.

“미국에서 이소룡이나 성룡을 모르면 액션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만큼 인지도가 대단해요. 제가 ‘넥스트 이소룡’ ‘넥스트 성룡’이라고 불린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죠.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액션 영화를 수도 없이 봤어요. 특히 이소룡, 성룡 영화를 보면서 연구하고 액션 동작들을 춤 동작 외우듯 달달 외워 몸에 익혔어요. 한편으론 ‘분명히 그들과 달라야 한다’고도 생각했죠. 라이조만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액션팀과 쉴 새 없이 연구했어요. 일단 닌자는 늘 숨어 있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낮은 포복, 기마 자세부터 연습했고요. 각국의 복싱, 가라테, 쿵후 챔피언뿐 아니라 텀블링 챔피언, 성룡, 이연걸 액션팀의 멤버에게서도 배웠어요.”

실제로 영화에서는 그가 전수받은 복싱, 가라테, 쿵후 동작들이 다채롭게 반영되고 칼, 체인, 표창 등 별별 무기가 화려하게 선보인다. 최고 스태프들이 모여 최선의 트레이닝을 제공했고, 또 비 특유의 성실함으로 완성된 라이조는 확실히 매력 있는 암살자 캐릭터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까지 지옥의 훈련을 받을 때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요. 어머니는 몸이 편찮으셔도 나와 동생을 위해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일하셨거든요. 어머니를 떠올리면 ‘이것도 못 견디다니 배가 부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초심으로 돌아가서 배고프던 시절을 생각하기도 하고요.”

이제, 세계 전역에 내리는 ‘Rain’

비가 본격적으로 미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 1백 인’에 올랐을 때부터였다. 드라마 <풀하우스>의 인기에 힘입어 홍콩에서 시작된 비 열풍은 아시아 전역으로 번졌고 일본과 멀리 유럽에서도 비 팬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 아시아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로 <타임>지에 유수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된 비에게 각종 러브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 미국에 진출할 때 <타임>지가 선정한 1백 인에 오른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내게 음반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사람들이 대부분 미국이 아닌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더라고요. 나를 미국 시장이나 세계 시장에 데뷔시키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기들 돈 벌 궁리만 한 거죠.”

그런 그가 <매트릭스>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영화 제작자인 조엘 실버와 인연을 맺은 것은 거의 천운과도 같았다. 조엘 실버가 할리우드 스타들을 데리고 도쿄 한 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로비가 수많은 팬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자신들 때문이 아닌 ‘Rain’이라는 한국 스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호기심이 일었다고 한다. 그는 비가 출연한 드라마와 공연 실황 DVD를 공수해 살펴본 후 <스피드 레이서>를 연출하는 워쇼스키 형제에게 즉시 추천하기에 이른다.

“사실, 미국은 동양인에 대한 편견의 벽이 매우 높은 곳이에요. 하지만 운 좋게도 워쇼스키 형제와 연이어 인연을 맺으면서 많은 미국 관계자들이 주목하게 됐죠. 심지어 제 미국 에이전트도 ‘워쇼스키가 왜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만큼 말이죠.”

<스피드 레이서>에서 비는 원래 일본인 역할이었으나 감독은 그의 입장을 배려해 캐릭터를 무국적의 동양인으로 바꿔주었다. 차기작 주인공으로 확정되면서 역할의 중요성도 좀더 강조되었다. 무명 동양인이 메이저 제작사가 만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피드 레이서>는 기대만큼 흥행 성적을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의 주조연으로 이름을 알린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그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다면 <닌자 어쌔신>의 주연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서 쉽게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저 엄청 뛰어다녔어요. 오디션을 보기 위해 열두 시간 동안 길거리에서 대기하다 스튜디오에 들어가 말도 안 되는 춤도 추고 무술, 태권도 등 나름의 장기 자랑도 선보이곤 했죠. 또 음반을 직접 돌리기도 하고, 밥을 사며 폭탄주를 ‘말아주는’ 등 한국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어요.”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사람들은 할리우드에서 아시아인의 성공 가능성은 10% 미만이라고 했다. 그러나 워쇼스키 형제가 옆에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눈여겨보게 됐고, 조엘 실버가 뒤에 있으니 다른 제작자들도 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 비는 그 첫 번째로 프로듀서 박진영을 만난 것, 두 번째가 워쇼스키 형제를 만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영화 <닌자 어쌔신>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을 꼽는다. 사실, 기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잡아끌기 위해선 본인만의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 세 번째 기회를 제대로 잡은 비는 이제 명실상부한 할리우드 액션배우로 자리 잡았다. 곧 음반 활동도 재개할 예정이라는 그에게 ‘세계 1등’이라는 목표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닌자 어쌔신>은 흥행과 관계없이 제게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진검 승부를 시작할 차례죠.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릴 거예요. 열 번이건 스무 번이건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 박스 오피스 1위의 영광을 안게 되지 않을까요?”

취재 홍유진

출처 우먼센스 12월호

by 트래블러 2011. 4. 7. 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