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소리


김애선 ‘둥둥나루’ 원장

둥둥둥…. 북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북채와 가죽이 세게 맞닿는 소리, 너와 내가 만나 공중에서 교감하는 떨림, 온 세상에 가득하지만 아무나 들을 수 없는 소리. 함께여서 더 행복한 아름다운 만남을 보여주는 예일보습학원의 자원봉사 동아리 ‘둥둥나루’와 김애선 원장을 만나 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백기광

2001년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주인공 트레버(조엘 오스먼트)는 어느 날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받는다. 한 사람이 3명을 도우면 그 3명이 각각 다른 3명을 돕고, 그런 식으로 세상이 변화된다는 기상천외한 답을 내놓지만 사람들은 모두 실현불가능한 소리라며 비웃고 만다. 하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노숙자는 새로운 삶을 찾게 되고, 어떤 이는 참사랑을 얻게 되며, 진정 소중했던 것을 되찾기도 한다. 그 모든 기적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김애선 원장을 만나면서 이 영화가 불현 듯 떠올랐던 이유는 그녀 한 사람의 결심과 실천이 참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작은 변화는 보석 같은 땀을 흘리며 북을 두드리는 아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년 전 여름, 처음 북을 만나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예일보습학원의 학생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밤 10시, 학원 수업이 마칠 때 즈음이면 녹초가 될 법도 한데 오히려 생생해져서는 그 늦은 시간에 집이 아닌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아이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근처 성당의 작은 강당이었다. 북을 하나씩 잡고 앉은 아이들은 매일 펜만 쥐던 여리고 작은 손으로 두툼한 북채를 쥐고 가락을 배웠다.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어깨는 떨어져나갈 듯 아팠지만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북채를 다시 쥐었다. 수업을 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덩기덕 쿵덕.” 가락을 붙여주거나 힘내라고 독려해주는 이는 다름 아닌 학원 원장이었다.
예일보습학원의 김애선 원장이 한창 공부할 아이들을 데리고 새벽 1시까지 매일 북치는 연습을 한 것은 바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근처 복지관의 지체 장애인들에게 북을 가르쳐주는 봉사활동을 실천하기 위해 먼저 북 치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김 원장은 서초동에서만 20년간 학원을 운영해온 베테랑 학원 교육자다. 그녀가 이렇게 학원 재학생들과 함께 색다른 봉사활동을 시작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줄바꿈##]
“당시 고등학생이던 딸이 봉사활동 할 곳을 찾는데, 의미도 있고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아이가 봉사활동 하는 김에 저도 함께 하려고 열심히 찾다가 지적장애가 있어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다니엘복지관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죠.”
작은 일도 크게 판을 벌이는 것이 김 원장의 특기. 봉사활동의 기쁨을 멀리 전파하고 싶었던 그녀는 딸 친구들의 부모, 학원 재학생들의 학부모 등 150명을 모아 ‘주목회’라는 이름의 봉사단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이 모이니 할 수 있는 일도 많았어요. 크게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고, 노인 마라톤 대회에서 어르신들을 보시고 함께 달리는 일도 했고요. 그러다보니 봉사활동의 재미에 점점 빠져들게 됐지요.”
서울시 자원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강사 교육을 받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파고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강사 자격증까지 딴 김 원장은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 외에도 여러 종류의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다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어차피 우리 학원의 아이들도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악기를 배워서 가르쳐주는 봉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예요. 그렇게 2008년에 학원에서 ‘둥둥나루’라는 봉사동아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북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조용한 보습학원이 조금씩 시끌벅적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이 북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다
김 원장의 말마따나 ‘둥둥나루’는 특이하게 보습학원 내 봉사활동 동아리다. 1기는 벌써 졸업을 해서 대학생이 되었다. 현재는 2기 아이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둥둥나루’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복지관. 지체장애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학습, 예체능 교육 등이 실시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김 원장과 둥둥나루 아이들은 매주 목요일, 십 수 명의 지체장애 청소년들에게 북 치는 법을 개인교습하고 있다.
함께하기로 한 둥둥나루 멤버 6명 모두가 양재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런데 하필 이날 모의고사를 치르는 바람에 수업이 시작된 후 30분이 지나서야 허겁지겁 복지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체 장애 아이들도 또래 친구가 좋은지 나이든 선생님이 가르쳐줄 때보다 표정이 확실히 밝아진다니까요.”
김 원장의 귀띔을 듣고 보니 교복 차림의 친구들이 북채를 들고 곁에 서니 아이들이 신나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사실, 박자도 엉망이고 힘을 주어 북을 내리치는데 불과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북치는 시간은 다양한 친구들과 교감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다.
교복을 입은 둥둥나루 친구들은 겉보기에는 그저 공부 잘 하는 평범한 학생들로 보였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북치는 손놀림이 예사가 아니었다.
“북을 쳐본 것도 처음이고 이런 친구들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어요. 물론 처음엔 어려웠죠. 그런데 북을 가르치면서 점점 이해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장애우들의 환경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하게 되었고요.”
학원 원장님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했다가 북 연주와 봉사활동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는 소영이는 지난여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새벽까지 친구들과 연습하던 시간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한 이진이, 지현이, 소담이, 준우, 강일이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만 연습해도 팔이며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육체적으로 만만치 않은 북이었지만 ‘힘들어도 재미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둥둥나루에서 배워가게 된 것.
“학부모님들의 도움도 컸어요. 처음에 제가 제안을 했을 때 뭘 그렇게까지 봉사를 하나 싶은 어머님들도 분명 계셨을 거예요. 북을 한 시간 가르치기 위해서 연습하고 모이는 시간도 만만치 않은데 봉사시간은 딱 한 시간만 기록되니 효율적인 봉사활동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저를 믿고 따라주신 어머님들은 나중에 원서 쓸 때 큰 역할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제 말 듣기를 잘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특히 최근 들어 입학사정관제의 등장으로 봉사활동이나 동아리활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시점에서 둥둥나루의 색다른 봉사활동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행복나눔 자원봉사대회에서 동상을 받아 무려 100만원이나 되는 상금을 받기도 했다고. 그 전액을 사랑의 복지관에 기부한 것도 김 원장과 아이들의 자발적인 의지였다. 그동안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받은 상금을 모두 기부했는데 다 합치면 거의 1000만원에 이를 거라고 김 원장은 귀띔했다.

봉사활동으로 시작되는 작은 변화들
한 시간 남짓의 수업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은 아쉬운 듯 북채를 내려놓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둥둥나루 친구들은 잠시 남아 연습을 더 하기로 했다. 오는 토요일에 서초구청에서 주최하는 ‘세계1등 미래도시 상상화 그리기 경진대회’에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할 예정이란다. 자기들끼리 가락을 맞춰보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힘차게 내리치는 북 가락에 어깨가 절로 들썩거렸다.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북 앞에서는 기분 좋은 땀을 흘릴 줄 아는 멋쟁이 예인이 되는 듯했다. 오랜만에 맞춰보는 가락이라 그런지 자꾸 어긋나긴 했지만, 아이들은 서너 시간만 더 연습하면 된다며 공연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학교에서도 높은 성적을 유지한다며 김 원장의 자랑이 끊이지 않았다.
“둥둥나루 멤버 중에 한 아이는 동생이 1급 장애를 가지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이 활동을 하면서 서서히 밝아지더라고요. 올 초에는 한양대 공모수기에 자기 동생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어서 내기도 했는데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고요.”
이러한 변화는 가르치는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배우는 장애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작지만 소중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산만하고 소통이 전혀 안 되는 아이가 있었는데, 북을 배우면서 집중력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해요. 이제는 북채를 스스로 정리할 줄도 알고요. 이러한 변화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 봉사의 묘미가 아닌가 싶어요.”
하루 가서 짧게 봉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오랜 기간을 들고 장기적으로 만남을 갖는 봉사는 실천하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도 서서히 변화를 겪는다는 데서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 원장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요즘처럼 바쁜 때가 없다. 20년간 운영해오던 학원을 막내 동생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요즘엔 사회복지학을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새로운 영역에 뛰어드는데 망설임이 없어졌다는 것 또한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생긴 새로운 버릇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배우고 싶은 건 더 많아지니 걱정이에요. 자원봉사를 하면서 제 삶이 이렇게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요?”
김 원장이 참여하는 자원봉사는 둥둥나루뿐만이 아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미술치료 동아리 ‘한아람봉사단’이 또 출동한다. 학부모 중에 미술치료 전문가가 있어 자문을 요청했단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만들어 보면서 심리적인 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또 김 원장 개인적으로는 서예를 배워 매주 큰사랑 노인전문병원을 방문해 몸과 마음이 아픈 어르신들에게 한글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고.
“제가 좀 일을 크게 벌이는 스타일이긴 한데, 그래서인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네요. 앞으로 시간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많은 일을 하려면 말이죠.”

나눔의 아름다운 전파력을 믿다
김 원장은 봉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학원교육의 현재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교육1번지인 강남에서 20년 넘게 학원을 운영해 온 베테랑이기에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지만, 자원봉사로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고.
“물론 지금은 이런 저런 규제나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원봉사를 하면서 학원교육이 담당해야할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이 생기는 것 같고요.”
김 원장에게 진정한 학원교육이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여건이 부족해서 못 가르친 부분이든,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이든 간에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함에도 배우지 못한 것을 학원이 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북을 만져본 적조차 없던 아이들이 우리 가락의 흥겨움을 알게 되고, 시험 성적에 일희일비하던 학생들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 동아리활동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 새벽까지 땀방울을 흘리며 좋은 일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배웠고, 모습과 말투는 조금 다르지만 만나보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지체 장애 친구들을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모두,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었다.
“점수만을 채우기 위한 봉사활동은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의 동아리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남을 돕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해주고 싶어요.”
작고 인자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카랑카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를 자랑하던 김 원장.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후 자연스럽게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여러 단체,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일을 진행하다보니 자신의 영리를 위해 음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어요. 봉사활동을 순수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자신이 대표가 되고 싶어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고요. 학원장이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니까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그러나 자신이 벌인 판에 뛰어들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성장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판을 늘려 갈 듯했다. 흔히들 봉사활동을 하거나 기부하는 것을 일컬어 ‘나눔’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김 원장의 말을 빌리면 ‘나눔의 전파력은 엄청나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눔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줄 알게 되는 법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리를 나눌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도 바로 나눔의 놀라운 전파력 덕분이 아니겠는가.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8

희망지기 - 숙명점역봉사회
손끝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교육

돈이 없어서 헌 교과서를 물려받고, 책이 없어서 한 권을 돌려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년에도 수백 종의 참고서와 문제집이 쏟아지는 요즘에도 어떤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여전히 불평등하기만 하다. 여기, 맹인 청소년을 위한 문제집을 만드는 수학 선생님들이 있다. 이들의 아름다운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희망적인 교육 이야기가 펼쳐진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차병곤

수학선생님들, 두 팔을 걷어 부치다
영화 ‘ET’에서 보면 지구의 어린이들이 외계 생명체와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 손끝과 손끝의 만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눈으로 서로의 다른 모습을 인지한 후 촉감으로 나와 통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명화 ‘천지창조’에서도 신과 인간이 손끝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손끝은 우리의 인체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감각을 자랑하는 부위이다. 무언가를 더듬는 손끝에는 ‘너에 대해 알고 싶다’는 대상에 대한 깊은 갈구가 담겨있다. 점자책을 읽는 맹인들의 손을 보면서 드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다.
보고 읽고 구경하고 흘깃거리고….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눈을 가진 우리로서는 차마 상상도 못할 일이긴 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란 어떤 모습일까? 어둡고 밝음조차 인식할 수 없는 캄캄한 암흑일까, 일그러지고 왜곡된 세상의 이면일까.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심정,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해 길을 잃은 듯한 상태…. 우리가 시각장애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를 대강만 떠올려보아도 이 정도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시각장애인들의 괴로움은 배우고 싶어도 길이 없다는 절박한 현실이다. 정보가 경쟁력이고 힘이 되는 이 시대에 배움이 모자라다는 것은 즉 성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로, 이제는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이용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되는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교육기회의 균등에 기여하고자 탄생된 수학정보공유사이트 ‘매스114’(www.math114.net)의 수학선생님들도 맹인 청소년들의 교육환경을 알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수학참고서 점역봉사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란다.
“맹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학책이란 게 달랑 교과서 한 권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눈 멀쩡한 아이들도 참고서에 수십 권의 문제집을 풀고서도 수학공부가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점자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수학교과서 한 권 가지고 공부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교육 강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열악한 교육환경이 존재한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해마다 수백여 종의 문제집이 출간되고 있음에도 맹인들을 위한 참고서나 문제집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어나 사회와 같이 텍스트만으로 이뤄진 교과서는 요즘 점역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서 불과 몇 분 만에 점자로 번역이 돼요. 하지만 수학, 과학 같은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그림과 도형, 각종 기호와 문자들 때문에 번역기를 돌릴 수가 없어서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합니다. 점역봉사자들이 있긴 하지만 수학, 과학은 전문 분야라 일정량의 교육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이런 사정을 듣고 봉사를 먼저 제안했던 것은 이형원 원장이었다. 교육 기회의 균등을 지향하는 매스114의 정신과 맞아떨어지는 일이라 생각한 것. 수학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작업을 하면 시간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훨씬 효율적일 거라 판단했다고.
“지난해 매스114 총회에서 이런 봉사에 대해 의견을 같이한 후 점자도서관에 뜻을 전달했어요. 그랬더니 그곳에서 숙명점역봉사회를 소개시켜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게 지난해 말이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주욱 봉사활동을 하고 있죠.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어요.”

배려와 관심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인연
숙명점역봉사단은 숙명여대 출신의 동문들이 모여 만든 봉사회 안에 있는 동아리 형식의 단체로, 지금은 일반에 개방되어 많은 이들과 함께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숙명점역봉사단의 권순인 회장 역시 학원장 출신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은퇴 후 봉사단을 창단,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봉사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희 봉사단은 숙명여대 재학생들로 이뤄진 점역봉사동아리와 동문들이 주축으로 되어 있었어요. 다른 텍스트들은 문제가 없는데 수학, 과학 참고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느 정도 전문성을 필요로 하다 보니 늘 일손이 부족했죠. 그러던 차에 수학선생님들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거예요. 처음에는 세금 환급이나 다른 목적을 가진 게 아닌가 조금은 걱정도 했는데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시간을 쪼개 일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이형원 원장님과 처음 만난 날이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요.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었나 싶어요.”[##줄바꿈##]
이형원 원장을 비롯한 매스114의 선생님들이 처음 도전한 수학참고서는 ‘개념원리 고등수학’이었는데 처음에는 점자가 익숙지 않아 한 문제를 치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에 돌아가 새벽 3~4시까지 점역작업을 하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자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 한 권의 참고서를 완성했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비로소 맹인 청소년들이 생애 첫 수학참고서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모의고사 문제집을 작업하고 있어요. 일반학생과 마찬가지로 시각장애인 학생들도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 수학 실력이 쑥쑥 늘지 않겠습니까? 양이 어마어마해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이로써 더 많은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는 아이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번쩍 힘이 납니다.”
“물론 아직도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장애물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는 학생도 있지만, 그래도 시각장애인들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교육혜택으로부터 가장 소외 받고 있는 사 람들이 아닌가…. 비록 소수를 위한 혜택이라고 해도, ‘모두’를 위한 교육을 지향한다면 공교육 쪽에서 이 사람들을 포용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봉사로 시각장애인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는 주경수 원장의 한 마디가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점자도서관 창립, 점자 교과서 발간 등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외에 꼭 필요한 책에 대해서는 90% 이상이 점역봉사자들의 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수시, 특목고 입시 등 학력만을 강조하는 입시 풍토에서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말이었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다시 시작되는 희망
권순인 회장의 안내로 서울맹학교를 방문했다. 교문 옆 담장에는 ‘나는 00가 되고 싶어요’ 라는 맹학교 학생들의 장래희망과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아이들이 이렇게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꿈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문득 눈물겹게 느껴졌다. 이 중 많은 아이들이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 결국 굴복당한 채 자신의 특기와 장기를 채 펼치지도 못하고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권 회장이 맹학교를 찾은 것은 동진이와 민태에게 수학 과외를 해주기 위해서다. 학원은 엄두도 못내는 아이들에게 사교육의 기회란 이렇듯 좋은 뜻으로 먼저 다가와주는 봉사자들에 의해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동진이는 전맹이라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스스로 공부하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자, 동진아, 1차 함수가 뭐였지? 고무줄로 한번 그려봐.”
그녀가 다트판에 압정을 꽂아 손수 만든 함수판이 이 날의 수업도구였다. 연필과 펜 대신, 촉감으로 보고 그릴 수 있도록 그녀가 고안한 색다른 함수 공부 방법이었다. 곧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면 동진이도 매스114 수학선생님들이 만들어준 수학참고서를 활용하게 될 것이었다.
이전에는 맹학교 학부모들로 이뤄진 ‘시각장애인 가족회’에서 많은 도서들을 점역해왔으나 최근 숙명점역봉사회를 비롯한 여러 점역봉사단체들이 생기면서 학생들도 읽고 싶은 책을 점역 의뢰해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수학 참고서가 한 권도 없었는데, 올해부터는 크게 달라졌죠.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걸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수학실력도 일취월장하지 않을까요?”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전맹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약시인 아이들 경우에는 글자만 크게 해주면 얼마든지 읽고 배울 수 있는데 학원에서 아예 받아주지도 않을 때 서럽더라고요. 시각장애우들을 조금만 더 배려해주는 문화가 확산되면 좋겠어요.”
여름철 습기가득한 반지하 사무실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가족회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좀 더 누리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들의 바람은 아이들이 많이 배워서 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평범한 학부모들의 바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퍼져나가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리라.
“가뜩이나 어려운 수학을 점자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정도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수학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수학 참고서를 점역해주시니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시각장애인 가족회를 이끌고 있는 이란경 회장은 이러한 작은 손길들이 모여, 아이들이 공부할 기회를 갖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엄마와 함께 사무실을 찾아온 9살 성태는 머리에 물이 차는 ‘수두병’ 때문에 수술을 받다가 시력을 잃은 케이스였다. 아직 점자를 완전히 익히지 못해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엄마들과 선생님들이 사랑으로 만들어준 책들을 한 권, 한 권 섭렵해 나가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러나 모든 것을 담은 듯한 큰 눈망울이 불현듯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점자라는 것은 여섯 개의 올록볼록한 점으로 이뤄져 있어요. 그 여섯 개의 점을 통해 이 학생들은 세상의 지식을 배우죠. 가녀린 손끝이 더듬거리며 점자를 읽는 모습이 이 변화무쌍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 나가보겠다는 절박한 의지로 보여서 마음 아플 때가 많아요. 진정한 교육 균등을 지원한다면 진정 손길이 필요한 곳은 이런 아이들이 아닐까요?”

숙명점역봉사회 소개

공부가 하고 싶어도 점역된 학습도서가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창립된 숙명점역봉사단은 가장 최근에 출판된 학습서를 중심으로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한 책들을 골라 점자로 번역하고 있다. 현재 숙명여대 대학생 100여 명과 매스114 수학선생님 20여 명, 서울맹학교, 한빛맹학교 학부모 교정팀 10명으로 이뤄져 있다. 숙명점역봉사단의 권순인 회장은 “앞으로 학원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진다면 1대1 교육 봉사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해가 필요한 과목인 과학과 수학의 경우 1대1로 하나하나 짚어주는 교습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원장님들이나 선생님들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는 능력은 누구나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거든요. 더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문의_ 031-793-6683 l 후원계좌_ 343601-04-056756(시각장애인 가족회)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7

REPO & DOCU 희망지기
우리동네 희망학원

척박한 땅에서 틔워내는 간절한 희망

조금 지능이 모자라더라도, 지나치게 산만하더라도, 남보다 좀 뒤떨어지더라도 따돌림 받지 않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과연 어디에?’ 라고 묻는 학부모들에게 오아시스와도 같은 세상 유일의 학원. 우리동네 희망학원에 다녀왔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이한마루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주)우리동네’라는 사회적 기업의 대표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무척 인상에 남았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늘 따돌림만 당하고, 학원에 다니고 싶어도 결국 쫓겨나고 마는 애들이 있어요. 지능이 낮아서 수업 따라가기도 힘들고 소위 ADHD 때문에 산만해서 다른 친구들 공부까지 방해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들이 특수학교에 가야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게 더 문제예요. 대체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요?”
정신과의사이기도 한 안병은 대표는 장애 수준은 아니지만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만을 위한 학원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참 좋은 취지의 학원이구나, 하고 듣고 넘겼는데 되새겨볼수록 대체 어떤 학원의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번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

정상과 비정상, 그 경계에 선 아이들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평범해 보이는 주택가 2층에 알록달록하게 창문을 장식해놓은 우리동네 희망학원을 만날 수 있었다. 학원 내부에 들어선 순간, 원목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마치 유치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화사하고 앙증맞은 분위기였다.
“현재는 초등학생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나이보다 성장이 늦다보니 그에 맞는 학습과 프로그램이 필요하지요. 그래도 처음엔 3학년 과정을 배우던 12살 아이가 1년만에 5학년 책으로 배우게 됐으니 많은 발전을 했어요.”
현재 사회적기업 (주)우리동네의 사회복지사이자, 희망학원의 부원장을 맡고 있는 정희영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로부터 학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에 이런 학원이 있구나’ 하는 신기함과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 해 오픈한 우리동네 희망학원은 앞서 언급한 대로 지능이 낮거나 ADHD 등의 장애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초등학생을 위한 학원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양한데 학년에 상관없이 나이별로 세 반을 구성했다. 한반에 5명씩 총 15명이다. 처음에는 의욕에 차서 서른 명까지 학생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신입생은 받지 않고 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평균 아이큐는 높게는 80부터 낮은 경우에는 30밖에 안 된다. 대부분 ADHD가 있지만 극도의 산만함과 공격성을 가진 아이도 있는 반면 자폐에 가까울 정도로 표현을 하지 않는 아이도 있단다.
“대부분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들이에요. 지능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눈만 마주쳐도 괜히 시비를 건다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아무 때나 막 던지죠. 이런 아이들은 약이 없으면 수업시간에 1분도 제대로 못 앉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일반 학원에서는 도저히 감당해내질 못하죠.”
우리동네 희망학원의 특징은 이런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선생님들이 학과 과목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월, 수, 금 주 3일 수업 체제로 운영되며 하루 수업은 총 3교시로 되어 있다. 두 시간은 국어와 수학 같은 학교 교과목을, 나머지 한 시간은 미술치료, 음악치료, 요리와 같이 치유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치시킨다. 치료 프로그램이 일반 상담센터에서도 시간당 3~10만 원 정도인 걸 감안하면 한 달에 20만 원이라는 교육비는 파격적으로 저렴한 가격임에 틀림없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의 경우에는 그마저도 50% 감면을 해준다고 한다.
“아무래도 또래보다 지능도 낮고 행동이 어리다보니 어머니들이 입학을 늦추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 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드문데, 아이로서도 힘들 수밖에 없죠.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 친구들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이상한 행동을 하니까 계속해서 따돌림을 받게 되고….”[##줄바꿈##]
학교에서는 ‘도움반’이라는 것을 만들어 학습 능력이 부진한 아이들을 위한 수업을 따로 시행하기도 한다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못되는 형편이라고. 모자란 학습량을 보충하기 위해 학원에도 보내 보지만, 아이가 학원 수업을 방해한다는 이유, 혹은 다른 학부모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기 십상이다. 가뜩이나 학습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교육적인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형국이다.

마음이 아픈 아이와 가슴이 아픈 엄마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영미(가명)의 부모는 직장도, 보금자리도 버리고 아이를 위해 시골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의 증세가 치료를 통해 낫는 질병이 아니라 장애라는 것을 인식한 이상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심에서는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받고 소외당해야 했던 아픔이 그토록 컸던 것이다.
“아이나 부모님이나 참 불쌍한 경우가 많아요. 남에게 폐를 끼칠 때는 물론이고, 굳이 그런 것도 아닌데 당당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거든요. 제가 아는 어떤 어머니는 일부러 학교의 온갖 궂은일을 다 맡아 하시더라고요. 그래야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혼나지 않겠냐면서 말이죠.”
그런 학부모들이나 아이들에게 우리동네 희망학원은 그 자체로 ‘희망’에 다름 아니었다. 수업시간은 3시에 시작되지만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는 수요일엔 1시 반부터 학원에 서둘러 달려온다. 학교보다 즐겁고 집보다 더 편안한 곳. 아이들에게는 학원이 그런 곳이다. 우리동네 희망학원은 ‘욕하고 싸우는 행동’만 아니면 어떤 일을 해도 제지를 받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기에 아이들은 학원에서만큼은 최고로 자유롭다. 학부모들은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만들어 학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 아이가 살면서 겪어가야 할 고통, 그 이상을 미리 감내하고 있는 부모님들이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이 남들보다 못하기를 바라겠어요? 모두들 더 남보다 뛰어난 아이로 키우기 위해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하는 거겠죠. 하지만, 저희 학원 학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예요. 그저 남들만큼만 하는 것. 그조차도 바랄 수가 없으니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겠지요.”
우리동네 희망학원의 학부모들은 정기 모임을 통해 서로의 고통을 나누기도 하고, 상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일반 아이들보다 배 이상 돌보기 힘든 아이들이기에 월, 수, 금요일만큼은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되기도 한단다.
“많은 학부모님들이 힘들어하시는 이유는 아이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에요. 비록 아이가 지금은 모자라지만 좀더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도 엄마도 힘들어지죠.”
붙잡고 아이를 닦달하면 할수록 고통의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것이다. 정희영 선생은 조금씩 아이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부모가 먼저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동네 희망학원에서는 셔틀버스를 운영하지 않고, 아이들이 혼자 버스도 타고, 정해진 시간에 혼자 오는 훈련을 하도록 하고 있다.

서로의 마음과 손길로 새로운 희망을 틔워내
오후 2시쯤,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대여섯 명이나 나타났다. 근처 아주대 아동심리학과에 재학 중인 자원봉사 선생님으로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진행되는 프로그램들도 미술치료나 음악치료 선생님의 무료 자원봉사 덕분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이와 같은 여러 도움이 없으면 우리 동네 희망학원은 사실상 유지되기가 힘들다.
“지난 해 아동임상심리소학회 활동을 하다가 선배의 소개로 시작하게 됐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어요. 하지만 하다보니 정도 들고 아이들 증세가 나아지는 과정을 보니 보람도 느껴지더라고요. 처음엔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친해졌어요.”
우리동네 희망학원이 설립된 초기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는 아주대 아동심리학과 신혜원 학생은 벌써 1년 넘게 아이들과 친분을 쌓아왔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우리 동네 희망학원의 수업 풍경도 다른 곳과 사뭇 다르다. 아이가 수업 중에 이상한 질문을 해도, 떠들거나 돌아다녀도 선생님은 소리를 지르거나 강제로 막지 않는다. 우리동네 희망학원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룰은 단 한가지뿐이다. ‘욕하지 않는다’, ‘친구와 싸우지 않는다’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셈이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고도 불리는 ADHD(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는 사실, 유아기 또는 학령기 아동들에게 가장 흔히 관찰되는 질환들 중의 하나로 약 5%의 아동이 이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 중 약 50%정도는 만 4세 이전에 발병되지만 대개는 유치원이나 학교 입학과 함께 행동상의 문제가 뚜렷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유난히 산만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아이가 있다면 반드시 ADHD를 의심해 봐야 한다. ‘아이가 좀 산만할 수도 있지’, ‘크면 나아지겠지’하면서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면 성인기까지 그 증상이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희영 부원장은 ‘ADHD는 결코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뇌 발달의 불균형으로 일어나는 뇌 질환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따라서 적절한 약물치료와 양질의 교육을 통해서 스스로를 절제하는 법을 익히게 되면 사회성도 기를 수 있고, 자신만의 장점을 발견해 자아실현을 할 수도 있다. 흔히 ADHD를 극복한 사례로 수영선수 펠프스의 예를 든다. 펠프스는 7세 때 ADHD 판정을 받은 이후 이를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대로, 그대로 방치한 채로 성인이 된다면 폭력성을 제어하지 못해 온전한 성인으로서 역할을 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ADHD를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동네 희망학원과 같은 배움터의 역할은 절실해 보인다. 아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까 말이다.

장애를 극복하게 만드는 교육의 힘
그렇다면 왜 그동안 이런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걸까. 첫 번째 이유는 운영상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현재 우리동네 희망학원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원생들로부터 걷는 학원비로는 교사 2명의 인건비도 나오기 힘들어보였다. 적자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저희 학원은 도저히 이윤이 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주식회사 우리동네의 독특한 인력구성과 자원봉사 선생님들의 도움 덕분이죠.”
(주)우리동네는 정신과의사인 안병은 대표가 창립한 사회적 기업으로 지체장애나 정신 질환이 있는 환자들이 직업을 갖게 해줌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곳이다. 편의점 사업, 운동화 빨래방, 세탁소 등 많은 시도를 해왔고 지금은 수원의 여러 대학가 근처에 ‘우리동네 커피집’을 운영하고 있다. 정희영 부원장도 사회복지사 출신으로 처음에는 세탁소 등에서 장애인들의 재활과 독립을 돕다가 학원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해 노동부에서 진행했던 ‘소셜벤처전국경연대회’에 이런 학원이 있으면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수익성이 없다는 점이 큰 문제요소로 지적되긴 했지만 저희만의 독특한 인력 운영 방식 덕분에 통과가 되었죠. 다행히도 경인 지역 최우수상을 탄 덕분에 이자 없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학원을 오픈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사회적 기업 (주)우리동네는 그 안에 있는 병원, 카페, 학원 등이 인력을 공유하고 있다. 정희영 부원장도 수업이 없는 날이면 병원에서 업무를 보기도 하고, 카페 직원이 자원봉사를 하러 학원에 오기도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도 따로 없다. 정신 병력 때문에 직업을 갖지 못했던 환자에게 취업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고, 현재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직업활동의 장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실제로, 우리동네 커피집의 경우 다섯 곳의 프랜차이즈 지점이 있는데요. 조건은 저희 환자분들이 만든 와플과 커피콩을 쓸 것과 가능하다면 환자 분을 직원으로 채용해주기를 권하고 있어요. 강요 사항은 아니지만 다행히 많은 사장님들이 환자 분들을 채용해주셨고, 또 일을 잘 하고 있고요.”
사실, 정신 병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동네 희망학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학원이 다른 학원과 또 다른 점은 학업을 위해 잠시 거쳐 가는 곳이 아니라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서 직업을 갖고 정착할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진다는 점일 것이다.
“저희 학원의 최종 목표는 지금 다니고 있는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이 가진 소질을 개발해 건강한 성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으로 중학생이 나오는 내년부터는 조금씩 직업 체험을 시켜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탐색해볼 예정이에요.”
한 때 그들이 속해야 할 사회에서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적절한 교육의 힘으로 다시 사회에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동네 희망학원의 ‘희망찾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주) 우리동네

정신과의사인 안병은 대표가 2008년 건립한 사회적 기업이다. 사회적인 편견 속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정신질환자들을 위해 직업을 찾아주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재활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정신잘환자를 직접 고용하는 편의점 사업부터 시작해, 여러 사업을 거쳐 현재는 수원 대학가 곳곳에 ‘우리동네 커피집’사업을 활발하게 펼쳐나가고 있다. 그 중 학원사업은 일반학교를 다니고는 있지만 ADHD를 앓거나 지능 발달이 더뎌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작은 배움터다. 지난해, 노동부에서 주최한 소셜벤처전국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www.humanishope.com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4

REPO & DOCU 희망지기
농촌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다
청진기(청소년 진로 찾기 프로그램)

서울 마포의 세이브더칠드런 사무실에 경상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 나에게 맞는 진로를 찾기 위해 저 멀리 경남 합천에서 올라온 농촌 청소년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먼 여정을 떠나왔는지 속 얘기를 들어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오정훈

“인권을 보호하려면 어디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가까이에 있는 현실을 돌아볼까요?”
열댓 명 쯤 되는 중학생들이 인권수업을 듣는데 열중이다. 경남 합천 지역아동센터에서 ‘청진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박3일간 서울 캠프를 온 아이들이다. 원래 27명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구제역 파동 때문에 절반 정도로 확 줄어든 인원이었다. 그러나 힘겨운 농촌 현실을 딛고 더 넓은 세계로 용기있는 발걸음을 디딘 아이들의 표정은 희망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피부로 느끼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이 아이들이 ‘진로찾기’라는 주제로 모임을 가진 것은 벌써 제작년부터다. 경북 지역의 대학 탐방도 다니고, 특강도 들었다. 그 중에서도 방학 캠프는 가장 기대되는 이벤트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부산으로 2박3일 캠프를 다녀왔다. 이번에는 서울이다. 소위 ‘지하철도 못타는 촌놈’이었지만 몇 번 서울을 오가면서 이제는 제법 노선도 읽을 줄 알게 되었단다.
“피곤해도 재미있어 해요.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도 가보고, 남산타워에도 가봤거든요. 어제 밤에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며 ‘내는 여서 살란다’하더니 오늘 아침에 만원전철을 타보고서는 ‘사람 못살 동네다’하면서 오락가락 하고 있지요.”
경남 합천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강선희 간사의 설명이다. 2년 넘게 청진기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그녀와 녹색연합 출신의 박순애 간사가 주축이 되어 이번 캠프를 기획했다. ‘청진기’는 ‘청소년 진로 찾기 프로그램’의 줄임말로 각종 문화적 교육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농촌 청소년들을 위해 적극적인 방법으로 진로를 찾는 프로그램이다. 삼성 고른 기회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200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합천 지역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응도 뜨겁다고.
“다들 고마워하세요. 아시다시피 농촌 경제가 어렵잖아요. 일이 바쁘다보니 아이들에게 그리 신경을 못 써요. 다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주의죠. 어제 아이들과 함께 간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에서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꼬마 애들이 단체로 온 걸 보고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어요. 저희 애들 중엔 전시회를 한 번도 못 가본 애들이 수두룩하거든요.”
이번 캠프를 통해 아이들은 난타 공연도 보고 미술 전시회도 관람했다. TV에서나 보던 서울 명소 곳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더 넓고 복잡다단한 세상과 처음 조우했다. 농촌과는 달리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사는 것을 보면서 미래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농촌에 사는 청소년들은 문화적인 혜택에서 너무 멀어져 있거든요. 영화 하나 보려면 시외버스 타고 진주까지 나가야 하고요. 얘들은 불량해지고 싶어도 놀데가 없어서 불량청소년도 못돼요.(웃음) 중학생 중에 연극을 본 애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어제 버스에서 ‘다빈치가 뭐꼬? 담배이름 아이가?’ 하며 떠드는데 서울 승객 분들이 막 웃으시더라고요.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지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 아빠와 함께 각종 전시회, 음악회에 다니는 서울 아이들과는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단지 사는 환경이 다를 뿐인데 열려있는 교육의 기회나 문화 체험의 분야는 이렇듯 협소하다. 강선희 강사가 청진기 프로그램을 구상한 것도 바로 이러한 계기에서다.[##줄바꿈##]

아이들,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나다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른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날에는 냇가에서 마음껏 수영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고, 겨울에는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놀기도 했다. 자연의 넉넉한 품에 폭 안겨 마음껏 뛰어다니고 떠들어댈 수 있었던 그런 자유로움을 떠올리면, 암담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유년기를 보내기엔 농촌이 더 제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농촌은 기성세대가 보낸 농촌과는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게 박순애 간사의 말이다. 경제적으로는 더 힘들어졌고, 젊은 세대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정체된 사회 구조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패배주의와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 예전과는 달리 TV나 인터넷 등 매체가 발달하면서 이에 중독된 아이들도 많이 늘었다. 그래서 이처럼 훌륭한 자연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정작 게임에 빠져 집안에서만 지내는 아이들이 대다수라고 했다.
“요즘 시골 아이들은 비록 자연 속에 살고 있어도 교감할 줄을 몰라요. 우리가 어릴 때 놀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거든요. 컴퓨터와 티브이가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놀 줄 모르는 것은 도시랑 똑같아요. 그래서 우포늪도 가고 철새도래지도 다니면서 우리가 사는 농촌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을 배우고자 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처음에는 환경수업을 위주로 프로그램을 짰다. 그 과정에서 박순애 간사는 아이들이 새로운 수업과 환경에 매우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 가면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투리가 튀게 들릴까봐 말도 제대로 못하고 뷔페에 가도 긴장해서 절반도 먹지 못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
“이 아이들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두려운 수준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구나, 이런 것을 느꼈어요. 농촌은 학교 단위도 매우 작고 유치원 친구들이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그대로 가거든요. 새로운 인간관계나 새로운 생활에 대해 배워볼 기회가 없었던 거죠.”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변경을 했고, 그렇게 지난해부터 시작된 진로찾기 프로그램은 꽤 긍정적인 반향을 얻었다.
“사실 농촌에서 접할 수 있는 직업군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가장 좋은 직업이 농협 직원이랑 공무원이에요. 아니면 선생님. 이도저도 못하면 부모님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하죠. 그러나 지역에 대한 고민이나 자연에 대한 애정이 없는 아이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어 농사를 지어야 한다면 얼마나 가겠어요?”
강선희 간사는 현재 농촌 아이들이 처한 환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위에 롤모델이나 성장동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자극을 받아 성장해야 하는 단계임에도 아이들에게 동력이 없기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생활방식에 그대로 젖어버린다는 것이다.
“농촌 아이들의 현실은 혹독해요. 도시에서 중학교 3학년은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서 고르는 정도의 선택을 앞두고 있지만 농촌의 중3들은 집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해요. 좁은 바닥에서 보고들은 것도 별로 없는데 갑자기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지는 거죠.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주위에 조언을 해줄 사람도 마땅치 않아요. 부모들은 ‘니 알아서 해라’식으로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부모들도 잘 모르니까요.”
아이 앞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미처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답답한 현실에 만족하며 살거나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아이들. 청진기 프로그램을 통해 이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스로가 선택하는 나의 미래
요즘 지방 중학생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우정학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120등까지의 우등생만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데 경쟁률이 치열한 이유는 시 예산으로 기숙사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역 차원에서는 우수한 인력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지만, 우정학사에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학생들의 박탈감이 커지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라고 두 선생님은 지적했다.
“그렇게 공부시켜도 나갈 애들은 다 나가거든요. 공부 잘하는 애들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아이들이 어떻게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지 방향성을 찾아주고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때 아닌 경쟁의식에 휩쓸려 중학교 때부터 야간자율학습에 시달려야 하는 평범한 중학생들의 고충이 만만치 않다는 거다.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은 포기 할 만도 하다. 즉, 지역 청소년들 1200여 명 가운데 1000명 정도의 아이들은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체념하며 산다는 거다.
“솔직히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끝났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우리 애들 지금 공부해봤자 도시 애들 따라가기 힘들거든요.(웃음) 근데 이 애들이 공부한답시고 방학에도 보충수업 때문에 매일 학교에 나가요.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많고 행복해질 수 있는데, 자꾸 공부만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방에서 강선희 선생님과 함께 공부해온 병우는 강 선생님의 권유로 청진기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됐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시작하게 됐지만 고 1이 된 지금은 적극적으로 모임을 끌어나갈 정도로 든든한 형이 됐다.
“처음엔 선생님이 하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됐어요. 수의사가 되겠다는 장래희망도 생겼고요.”
농촌소년다운 수줍음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지만 할 말을 끝까지 또박또박 해내는 모습이 여간 기특하지 않았다. 병우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합천에 남기로 했다. 3월, 합천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더 많은 친구들과 더 재미있는 일을 벌이기 위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이번에 고1 올라가는 아이들이 가장 능동적으로 똘똘 뭉쳐있어요. 부산에 갔을 때 인디고서원이라는 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나 봐요. 거기에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토론 프로그램인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에 참여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병우와 친구들은 합천 최초의 인문학 동아리를 만들기로 했다. 다음 주에 있을 인문학 캠프에 합천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고, 올해 안에 합천지역 청소년 1000명을 모아 인문학 캠프를 개최할 계획이다. 선생님의 주도로 이뤄지는 모임이 아닌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강선희 간사는 더욱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아이들이야말로 이 땅의 희망이다
청진기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은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어딜 데려가도 쭈뼛거리며 낯설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선생님, 우리 이것, 저것하면 안돼요?”하면서 조르기도 한다. 더 적극적으로 즐기게 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해야 할 일도 늘고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예산과 지원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고민이 많다.
“농촌에 노인들만 많고 아이들이 적어서 문제라고 하지만 정작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예산 자체가 노인 예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요. 그나마 있는 예산도 우정학사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다 들어가 버리니까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거죠.”
청진기 프로그램의 올해 목표는 우정학사에 들어가는 예산의 1/10이라도 일반 학생들에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합천에 생긴다는 것이다. 공부방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강선희 간사는 스스로 계획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아이들만의 공간을 만들어줄 꿈에 부풀어 있다. 도서관 겸 영화관은 물론, 아이들의 사무실도 마련해줄 예정이라고.
“2011년은 합천 지역 청소년들이 가히 혁명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 아이들이 만들어갈 합천 청소년들의 미래가 너무 기대됩니다. 그저 앞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아이들에게 이제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거든요.”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애정, 내 고향에서도 꿈꿀 수 있는 미래…. 아이들은 적극적인 진로 찾기 활동을 하며 많은 선물을 얻었다. 그저 학교 선생님, 공무원이 최고인 줄 알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기자, 수의사, 사회운동가를 꿈꾼다. 강선희, 박순애 간사와 아이들은 올해에도 역사기행, 대학탐방, 도시캠프 등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을 예정이다.
“뭐든 서울로 집중되는 현상을 깨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어요. 서울에 나가 살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놓고 싶어요. 그러려면 정치, 경제, 복지 등 복합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겠지만 일단 아이들이라도 잘 키워놓으면 좋은 밑바탕이 되지 않겠습니까?”
강선희 간사의 말마따나 아이들은 이 땅의 미래다. 이 아이들이 올바른 가치관, 삶에 대한 희망,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미래는 충분히 밝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마치 기분 좋은 노랫소리처럼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했다.

‘청진기 프로그램’이란?
삼성꿈장학재단의 후원을 받아 합천 지역의 여러 지역아동센터가 참여해 청소년들의 진로를 찾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지역적인 한계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지역의 많은 선생님들과 사회복지사, 시민단체들이 함께 힘을 모은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고운 심성을 기르고, 여러 도움을 받아 문화적,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청소년들이 많아질수록 농촌의 현실 또한 점점 풍요로워져 갈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by 트래블러 2011. 2. 2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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