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는 여행학교 이야기
김현아 여행대안학교 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우리가 배움을 얻는 곳은 학교, 학원, 공부방 등 다양하지만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의 학교는 다름 아닌 길 위, 바로 여행 속에서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와 미래를 향한 꿈을 배우는 학교, 로드스꼴라에 찾아가 여행을 학교로 만든 사람, 김현아 교사를 만나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백기광

여행을 꿈꾸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누구에게는 치열했던 일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삶에 에너지를 주는 새로운 자극이 되기도 한다.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남을 행복한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 정처 없이 헤매는 방랑 같은 여행도 있다.

여행으로 세상을 배우는 학교
대안학교 로드스꼴라는 여행을 통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여행학교’다. 미인가 대안학교인 탓에 학력인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 학교처럼 3년제로 운영되며 학기별로 프로젝트를 수행해 졸업 때는 결과물을 제출해야 수료할 수 있다.
“로드스꼴라에 대한 오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일 년 내내 여행만 하는 학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실은 그렇지 않고요. 여행은 한 학기에 한 번, 한 달 정도 하게 됩니다. 나머지는 여행을 준비하고, 여행을 다녀와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로도 충분히 벅차거든요.”
대부분 ‘따분한 학교수업 대신 여행을 하는 학교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식의 기대를 하고 찾아온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니, 절대로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여행하기 전 여행지에 대한 지리, 문화, 사회적 상식은 기본이요, 관련 주제에 대한 전문가 초청 강의만 해도 10회 이상에 감상문도 제출해야 한다. 해외여행에 필수인 외국어 공부는 외고보다 더 철저하며 경우에 따라 제 2외국어도 배운단다. 그 뿐이랴. 여행지에서 낯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는 필수. 어디서나 손쉽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연주는 물론, 전문가 급의 사진기술도 익히고 있다.
“최근에는 졸업반 친구들과 함께 ‘백제의 길, 백제의 향기’라는 졸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서울, 부여, 공주, 익산부터 일본까지 백제의 흔적을 좇아가는 대형 프로젝트죠.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각각 자기 나름의 발견을 하게 돼요. 역사나 인류학에 관심을 보이는 친구는 졸업 후 대학에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을 것이고, 이런 식의 스토리를 만드는 여행 자체가 좋은 친구는 여행업계로 진출하고 싶겠죠. 여행을 통해 자신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친구도 있고요. 여행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반드시 여행 관련 업종에 종사하게 되는 건 아니에요.”
김현아 교사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를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대표교사로 ‘아픔을 딛고 미래로 향하는 나라 베트남 이야기’ ‘박영숙을 만나다’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그녀들에 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등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하다. 또 청소년직업센터인 하자센터에서 오랫동안 ‘창의적 글쓰기’ 강좌로 청소년들을 만나오기도 하고 ‘고정희문학상’? 수상자들의 모임 ‘고글리’를 운영하면서 문학에 소질 있는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글로벌 마인드를 익히는 확실한 방법
그런 그녀가 여행을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공정여행’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도가 높아진데서 출발했다. 공정여행이란 쉽게 말해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의 삶과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에서 쓴 돈이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그곳의 자연을 지키는 방식’을 이른다.
그렇게 공정여행을 전파하고자 한 사람들이 모였고, 일부는 여행사 트래블러스맵을, 그리고 김 교사는 대안학교 로드스꼴라를 맡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들을 학교를 운영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돼요. ‘여행이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구나, 여행 자체가 학교가 될 수 있겠구나….’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맞았다는 것을 아이들이 증명시켜준 셈이죠.”
그녀의 지론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학교를 다니며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는 이유는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다. 즉 학교는, ‘내가 평생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곳인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라면 여행은 더없이 훌륭한 학교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20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계획 하에 독립적인 여행을 떠나볼 기회가 거의 없죠. 하지만 배움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 시기 아이들에게 여행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져요. 인생의 거창한 깨달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도 필수적인 삶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지요.”
혹자가 말하듯 여행은 삶의 축소판이다. 대표적인 것이 의식주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드스꼴라에서 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숙소를 제외하곤 독립적인 재정을 운영하며 무엇을 입고, 먹고, 볼 것인지를 결정한다. 매일 학교와 학원, 독서실 등 부모가 정해진 루트만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180도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또 일상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 혹은 나와 비슷한 히스토리를 지닌 사람만을 만나게 되지만, 여행에서는 늘 낯선 사람, 새로운 사람과 만나게 된다. 인생이 만남의 연속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낯선 사람과 어떻게 만나고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그 어떤 교육보다 중요하다.
“네팔 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4,000미터나 되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등반할 때 많은 사람들이 셰르파라고 부르는 핼퍼를 고용해 짐을 운반하거든요. 우리아이들은 자기 짐은 자기가 맡기로 했지만 그래도 공동의 짐이 있었기 때문에 핼퍼가 필요했죠. 그 핼퍼들이 대부분 아이들 또래였어요. 열흘이 넘게 여정을 함께하면서 친해지고 대화도 나누면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쟤하고 나는 같은 나이인데 나는 부모 돈으로 이렇게 해외여행을 다니고 저 아이는 학교는커녕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그 이유가 뭘까.’ 말로는 글로벌시대니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산 체험을 한 아이들은 진짜 이해가 뭔지 저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진정한 교육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
로드스꼴라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학년이 없다는 것이다. 매년 기수별로 신입생을 뽑는데 나이는 15세부터 22세까지 다양하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동갑내기하고만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또 어린데도 배울 점이 많은 친구가 있고 나이 먹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친구도 있지요.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나이대를 초월한 교감을 얻기도 해요.”
그래서 형, 언니, 선생님 등의 호칭을 빼고 자신만의 호칭을 스스로 정해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로드스꼴라만의 차별성이다. 김 교사도 학교 내에서는 선생이 아닌 ‘어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했다.
이렇듯 보도듣도 못한 형식 파괴의 배움터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변하고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을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듯했다. 김현아 교사에 의하면 그 변화는 놀라움을 넘어 감동적일 정도라고.
“창준이는 1학기 때만 해도 적응을 못하는 듯 보였어요. 어떤 것을 보여줘도 늘 멍하니 있는 모습이더라고요. 사실, 저희 수업은 몇 시간을 연속해서 스트레이트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긴 하거든요. 어쨌든 그랬던 창준이가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진 것이 첫 번째 변화였다. 세상에 대한 질문도 많아지고, 제법 수준 높은 책도 찾아 읽게 됐단다. 무엇보다 가장 흐뭇했던 것은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발휘했던 리더십과 협동심이었다.
“4,000미터나 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십대 아이들에게 결코 만만한 코스가 아니에요. 자기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들은 제몫의 짐까지 지고 올라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죠. 창준이는 체력이 좋은 편이라 먼저 올라갔는데 한참 후 보니 다시 뛰어내려오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경사가 꽤 급한 편이라 제가 깜짝 놀라 왜 내려오냐 물으니 ‘어딘이 짐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제가 들어드리려고요.’ 그러는 거예요.”
누가 요즘 아이들은 인내심도 없고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했는가. 김 교사가 함께 여행했던 아이들은 적어도 서로 힘이 되어주고 이끌어주는 과정 속에서 ‘진짜’ 인생이 완성된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었다.
“여행이라는 게 마냥 설레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처음에는 무조건 국내 도보여행을 하는데 발에 물집 잡히는 것은 다반사고, 때로는 부상도 당하죠. 누구는 속도가 느리고 능력이 부족하기도 해요. 하지만 ‘경쟁’만 해서는 결코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없거든요. 혼자 기를 쓰고 간다고 해서 그 길이 즐거운 것도 아니고요.”
로드스꼴라에는 교복도 없고 교과서도 없다. 대신 교실에서는 흥겨운 합주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은 교과서 대신 두꺼운 인문학 책을 품고 다니며, 고민과 투정 대신 프로젝트에 대한 협의와 내일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은 정부지원이 없기 때문에 미인가 대안학교에 다니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하지만 저희 같은 작은 학교가 창출해 내는 재미있는 상상력이 공교육과 만난다면 분명 대단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거라 믿거든요. 그때까지 로드스꼴라는 계속 재미있는 일들을 벌여나갈 작정이에요.”

by 트래블러 2011. 12. 16. 23:31
우리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전성은 前 거창고등학교 교장

일평생을 교육계에 몸담아온 퇴임 교장이 책을 냈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왜 학교는 불행한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의 지난 역사가 그려진다. 진정한 교육전문가가 부재한 현실 속에서 원로 교육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폐부를 꿰뚫는 일침이 된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오정훈



지루한 장마가 끝날 생각을 않던 어느 목요일, 거창에서 막 올라온 전성은 교장을 만났다. 훌쩍 큰 키에 선 굵은 주름과 깊은 눈빛.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일평생을 투신한, 노회한 교육자의 카리스마가 번득이는 외모였다. 몇 시간 버스에 몸을 싣고 온 터라 피로가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성큼성큼 걷는 품이 힘찼다. 마침 때가 되어 근처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는데 노교장은 거리낌 없이 유명 프랜차이즈 피자 가게를 가리킨다. 피자를 즐겨먹는 퇴직 교장선생님이라니. 몇 번이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전성은 교장은 40여년 넘게 경남 거창고등학교 등에서 교사,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다. 나름의 교육관과 뚜렷한 교육개혁 정신으로 지난 참여정부 때는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을 2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일평생 일궈온 주옥같은 교육관을 정리한 책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퇴임 교장, 학교의 안부를 묻다
지난 6월 그가 출간한 교육 에세이 ‘왜 학교는 불행한가’는 가장 원론적인 교육의 의미와 학교의 가치를 묻는 책이었다. 과거 학교의 목적은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든가, 학교 교육으로는 결코 인격을 바꿀 수 없다는 등 거침 없는 그의 교육론은 지난 세기에는 금지어 취급을 받았고, 오늘날 봐도 가히 혁신적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제국주의적 학교교육 제도 아래서 교육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까? 교육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과연 국익일까?’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 우리 학교의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오로지 경쟁, 경쟁만을 부르짖는 오늘날의 교육 풍토에서 그는 의연하게 ‘교육의 목표는 평화’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마치 경쟁이 교육의 목표인 양, 성공하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인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쟁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도 제국주의에서나 쓰이던 사람을 통치하던 수단이에요. 학교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시합’을 해야 해요. 경쟁은 너와 내가 겨뤄서 이기면 살아남고, 지면 나가떨어지는 거지만, 시합은 서로 같이 잘 되자는 거거든요.”
그는 경쟁의 한 예로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들었다. 과거제는 관료를 뽑기 위한 등용문이었지 절대 진리탐구를 목표로 한 제도가 아니었다는 거다. 조선시대에서나 통용되었던 고루한 가치를 여전히 고집하는 것은 무지와 편견의 소치다.
전 교장은 지난 노무현 정권 시절, 교육혁신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약 2년간 교육 개혁에 힘쓰기도 했다. 당시 그의 주도로 연구하고 쓰였던 ‘참여정부 교육백서’는 현재의 입학사정관제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교육개혁의 요지는 성적만 가지고 애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91점과 89점이 무슨 차이냐 이 말이죠. 그건 그 학생에 대한 정보가 못돼. 정보라는 건 수학을 좋아하는지, 국어를 좋아하는지, 시를 잘 쓰는지 소설을 잘 쓰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와 같은 것들이죠. 이런 것들을 포트폴리오에 기록해 놓으면 대학은 그걸 보고 학생을 뽑으면 됩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그 학생의 교육이력을 보고 뽑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학교도, 선생도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르쳤는지 기록으로 남겨 단순한 선발 경쟁이 아닌 가르치기 경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의 입학사정관제는 잘못 가고 있다며 전 교장은 혀를 찼다.
“준비단계만 5년이 필요합니다. 교과서도 바꿔야 하고 바뀐 교과서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도 교육시켜야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줄 수 있는 교육시스템도 확립시켜야 하죠. 2008년에 시작됐으면 아무리 빨라도 2012년도에나 적용시킬 수 있는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작정 진행하니 아이들의 부담만 가중되고 있지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제도도 요동치는 게 현실이다 보니 교육이 백년지계(百年之計)가 아니라 삼년지계도 못 된 지 오래다. 많은 학부모들이 학교에 대해 불신과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른다.

진정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전성은 교장이 책을 내고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옛 제자들 몇몇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더란다. 그 중 한 명이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 제목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목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거창고를 다니면서 정말 행복했거든요.”
그의 말마따나 거창고등학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학교’다. 수식어도 많다. 울타리도, 교문도 없는 학교, 인성교육과 입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학교 등등.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등과 같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직업 선택의 십계만 보아도 거창고가 일반 고등학교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가 책에 쓴 것, 그리고 교육에 대해 말하는 내용들은 혼자만의 오롯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의 거창고등학교를 있게 한 고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원경선 이사장님 두 분으로부터 배우고 얻을 것을 때가 되어 알린 것뿐이죠.”
전성은 교장의 부친이기도 한 고 전영창 교장은 195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부채가 많은 한 학교를 맡게 된다. 그게 거창고등학교의 시작이다. 오랜 역사만큼 사회적, 정치적 세파로부터 부침도 많이 겪었다. 전영창 교장은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주도한 학생들을 퇴학시키라는 교육감의 지시를 거부하는 바람에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고.
어쨌든 지금은 전교생의 대부분이 4년제 대학에 진학, 그 중 1/4정도 되는 학생들은 소위 SKY대학이라 불리는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으로 유명해 매년 우수한 중학생들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는 이 시골학교에 몰려든다. 그 배경에는 전영창, 전성은 전 교장을 비롯 거창고를 거쳐간 수많은 선생님들의 치열한 고민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 국력은 아이들 개개인의 재능과 소질, 관심을 살리는 거거든. 어떤 사람들은 엘리트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에요. 삼성 보세요. 10만 명이 뼈 빠지게 일해서 삼성 회장 한 사람 먹여 살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성은 교장은 진정 옳은 교육을 위해서는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교육 선진국을 보면 학교 설립이 허가제가 아닌 자유로운 신고제임을 알 수 있다. 교과서 또한 국정이 아니라 누구나 교과서를 쓸 수 있고, 학교와 교사, 학부모에 의해 채택 여부가 달려 있다. 즉, 배우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방법이야말로 진정한 선진교육이라는 것이다.
“20년 전에 비하면 얼마나 많이 나아졌습니까? 살기도 좋아졌고, 국민의식도 높아졌지요. 이만큼 사회가 성숙해졌으면 이제 국가가 교육에 손을 놔야할 때가 됐어요. 결정권을 단위학교에 맡기고 행정지원을 해줘야 돼요. 행정을 잘하고 있는지는 컨설팅을 해주는 독립적인 기구를 두고 평가를 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교육청, 교과부도 다 컨설팅을 받아야 합니다. 즉, 상부기관이 하부 기관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학교, 교육행정 기구, 평가 기구 이 셋이 수평적 보완관계를 가질 때 진정한 교육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른 어떤 사항보다 제도 개혁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다.

결국 바뀔 것이라는 올곧은 희망
매번 교육 개혁이라고 새로운 안이 나올 때마다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사교육 철폐’다. 마치 사교육이 사라지지 않으면 공교육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을 심어주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성은 교장은 이는 교육개혁의 진정한 쟁점을 흐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일침했다.
“전두환 정권 때 과외금지령이 내렸을 때 어땠습니까? 오히려 음성과외가 판을 쳤어요. 사람들은 증상과 원인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교육 시장이 공교육을 압도할 정도로 커진 것은 단순히 증상일 뿐입니다. 증상을 없앤다고 해서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학원 문제는 결코 교육 문제의 본질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무상급식 문제도 교육 문제가 아니라 복지문제일 뿐이죠. 본질에 벗어난 쟁점을 던져놓음으로써 교육관련단체들이 말려들게 만들고 그 사이에 교육부는 화살을 피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미래를 낙관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 성숙된 만큼 ‘교육 분권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 참여정부 시절, 그가 입학사정관제를 처음 내놓았을 때 결사반대를 외치던 관계자들이 지금은 교과부 요직을 맡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지배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라는 전 교장의 주장은 분명 이상주의자가 꿈꾸는 미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금껏 계속 나은 방향으로 흘러왔지 않았냐?”는 확신에 찬 질문을 받고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우리가 좀더 의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그 속도가 더 빨라지겠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수록 우리 교육 현장은 그만큼 빨리 우리가 꿈꾸는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자유, 평등, 공존…. 교과서 속에나 나오는 가치가 아니다. 그 가치를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교사, 학교가 있는 한 대한민국의 교육에도 희망은 있다.
by 트래블러 2011. 12. 16. 23:31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투명한 교육을 꿈꾸다

김형태 교육위원


언제부터 학교가 이렇게 됐을까? 어른들의 욕심으로 얼룩진 비리 사학의 진흙탕….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그 속에서 올곧고 순정하게 빛나는 희망 하나를 발견했다. 투명한 양심의 상징으로 교육의원이 되어 다시 돌아온 김형태 의원을 만났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이한마루

온갖 이변이 속출했던 지난 6·2지방선거. 전교조 출신 교육감이 처음으로 탄생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 중 하나가 바로 김형태 교육의원의 당선이었다. 학교장, 장학사 출신 등 화려한 경력과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후보를 제치고 40대 중반의 젊은 해직 교사가 접전을 벌인 끝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 결과에 가장 기뻐하고, 반가워 한 이들은 다름 아닌 학부모와 학생들이었다.
“그저 평범한 교사였어요. 행복한 학교를 꿈꾸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보통 국어 선생이었죠. 그랬던 제가 시위를 하고, 사재를 털어 선거운동을 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몸이 약한 아내는 반대도 많이 했어요. 대의를 위해서 가족들에게는 정말 못할 일을 많이 했지요.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선을 위해 고생해준 어머니, 아내, 아이들, 지방에서 제 소식을 듣고 일부러 서울에 올라와 투표한 제자들과 학부모들, 그 외에 안팎에서 제 일 같이 도움을 아끼지 않은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기도 했죠.”

시인을 투사로 만든 비리 사학의 정체
불과 지난해의 일이었다. 지난 20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20년도 영원히 선생님일 줄 알았던 시절. 예상치 못한 해직 통보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1인시위를 했던 218일의 고통스런 시간들, 그리고 교육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올해. 그렇게 교육의원으로 교육계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불과 1년 6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변화의 바람과 맞닥뜨려야 했다.
김형태 의원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볼 때 양천고 비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사립고등학교인 양천고등학교는 불법급식 수의계약,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동창회비 징수, 학교 운영회 회의록 조작, 공사비 허위로 부풀리기, 체육복 불법판매, 도서실비 불법징수 등 온갖 사학비리의 온상이라 할 만큼 정도가 심했다. 평범한 국어교사였던 그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은 새로 온 행정실장으로부터 이사장의 위법, 탈법 행위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이사장이 제멋대로 쌈짓돈처럼 학교 자금을 가져다 쓴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행정실장은 가짜 영수증으로 비는 자금을 메우느라 여념이 없고요. ‘이사장님 지금 시대가 변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결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조언을 해봤자 듣지 않는다더군요.”
아이들의 고충을 듣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한창 자라날 나이에 형편없는 급식을 먹고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부당한 차별로 상처받은 아이가 그에게 찾아가 하소연할 때는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저도 평범한 월급쟁이에 불과한 한 사람의 교사였을 뿐인데 두려움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묵과하고 있다면, 이건 공범과 다를 게 없겠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어요. 결국 뜻을 함께한 선생님들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개선을 요구했죠.”
지난 수십 년간 독재를 하다시피 사학 권력을 만끽해온 이사장은 ‘교육의 근본’을 지키라는 교사들의 간절한 외침을 간단히 무시했다. 어떻게든 학교 안에서 일을 해결해보고자 애썼던 선생들의 용기는 그저 무력할 따름이었다. 결국 김형태 의원과 동료들은 서울시 교육청 등 외부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 부당한 잘못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조차도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사학 권력 앞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교육청에서 사립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도 이미 사학 권력과 한통속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내부고발을 한 사람의 신변을 법적으로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게 교육청인데 오히려 학교측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더군요. 그리고 하루아침에 직위해제 되었고요.”

결국에는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진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음침한 권력의 힘 앞에서 시 쓰기와 꽃 가꾸기를 좋아하던 고등학교 국어교사는 그야말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당한 해임에 항의하는 피켓을 들고 매일 교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그나마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는데 학교 측 사람들은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든 피켓을 빼앗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학교 앞에서 시위를 못하도록 법원에 접근금지 신청도 했단다. 하지만 김형태 의원은 추운 날도, 더운 날도, 비오는 날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신념에 의한 결정이었으므로 불의에 맞서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가족들이 받을 고통이었다. 아내는 제발 그만두고 좋아하는 꽃집이나 차리자고 사정했고, 한창 사춘기였던 두 아들은 갑작스런 아빠의 변화된 모습 앞에서 적응을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아이들 때문에요. 저 이전에도 학교의 만행에 대해 항의하다가 부당한 해고로 떠나간 선생님들은 많았어요. 그저 사라졌지요.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바른 소리를 하면 저렇게 쫓겨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는구나….’ 아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선생이었으니까요.”
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던 양천고 제자들은 외롭게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선생님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라며 흐느꼈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를 지켜보며 동료교사들도 모두 미안해했다.
그렇게 김 의원은 썩을 대로 썩어 들어간 교육 비리에 맞서 싸우는 청렴하고 양심적인 교사의 상징이 됐다. 그의 진심은 점차 밖으로 알려졌다. 진심이 전해지니 자연히 힘이 모아졌다. 그의 1인 시위는 결코 혼자서 완성된 게 아니었다. ‘양천고 김형태 선생님 부당파면 철회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시민 단체를 비롯, 언론과 학생? 학부모들도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내준 덕분에 지난해 국감에서 양천고 비리문제가 크게 다뤄지기도 했다. 또 지난해 MBC <PD수첩>과 공동으로 ‘제 9회 투명사회상’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버팀목 삼아 그는 교육 비리에 맞서 싸웠고 결국 양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가 교육의원 출마를 결심했던 계기는 이러한 경험이 배경을 이루었다. 평범한 교사인 그를 투사로 만들었던 부당한 교육계 비리들, 그 어둡고 거대한 권력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또 해직교사 신분으로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던 답답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제가 했던 행동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죠.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계란으로도 바위를 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무리 약해보여도 정의는 결국 이긴다는 것을요.”
그렇게 그는 지난 지방선거에 출마해 강서, 양천, 영등포구 교육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료교사들과 학부모들의 힘이 모였음을 그는 고마워했다. 그가 당선됐을 때, 자기 일 같이 기뻐하고 함께 울던 사람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깨끗한 교육을 위해 그는 이제 한발 내디뎠을 뿐이었다.

이제, 새로운 교육의 시대가 열린다
김형태 의원이 서울시의회에 출근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두 달여가 지났다. 교육의원이 되기 전에도 후에도, 그는 ‘교육 비리 척결’의 한 길을 걷고 있다. 그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도 많아졌다.
“지금 제 앞에 검토를 기다리는 민원이 50여개 정도 됩니다. 제가 맡고 있는 영등포, 양천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민원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만큼 교육비리가 전국적으로 만연하다는 거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청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지도 감독 권한을 제대로 썼다면 개별 학교들이 이렇게까지 버젓이 위법 해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청의 직무 유기부터 바로 잡아가야죠.”
그가 교육 비리 척결에 이렇듯 모든 것을 건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너머에 큰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의 바람은 단지 ‘아이들과 교사들이 학교에서 행복해지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해요. 한 해에 300명이나 자살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뭘 해줄까’를 고민해야 하는 학교가 오히려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있죠.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이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죠.”
곽노현 서울 교육감은 ‘가장 좋은 방부제는 햇볕이다’라고 했다. 이제 밀실행정의 시대는 가고 깨끗하고 투명하게 공개된 행정이 펼쳐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형태 교육의원을 포함해 보다 깨끗한 교육에 대한 의지를 지닌 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이상 이는 꿈이 아닐 터였다.
“교육의 3주체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입니다.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방향,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지금 시점이죠. 지나친 무한 경쟁과 서열화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교육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협력하고 배려하는 핀란드식 교육으로 바꿔나가고 싶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꼭 갖추고 싶은 제도 중 하나가 바로 ‘국립대학 공동운영제’다. 프랑스처럼 모든 대학을 공동 운영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전국의 국립대학만이라도 벽을 낮추자는 것이다. 재정과 제도를 공동화 하고 교수와 강의를 순환제로 운영해 학생이 전국의 어느 국립대학을 나와도 취업에 영향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서열화의 정점인 서울대의 높은 벽만 사라져도 지금과 같은 입시 위주 교육의 폐해는 사라질 것이라는 게 김 의원의 생각이다.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공부 잘 하는 아이는 시험 끝나고 잊어버리고, 못하는 아이는 시험 보기 전에 잊어버린답니다. 어쨌든 머릿속에 지식이 남지 않는 건 똑같다는 거죠. 공교육의 근본적인 맹점을 얼른 바로잡아야 해요.”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다. 가난한 이를 보면 측은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한다. 정의는 반드시 불의를 이긴다. 우리가 책에서, 텔레비전에서, 학교에서 배운 온갖 진리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사람들을 바보 같다거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를 통해 그동안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진리들이 진정한 진리임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by 트래블러 2011. 12. 16. 23:29

'시사돼지' 김용민.

(누군가를 대놓고 돼지라 부르다니;;;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아무렇지 않다 했으니..)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pd로 요즘 그야말로 핫이슈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한창 바쁠 때 인터뷰를 요청한 탓일까.(첫 콘서트로 인터넷 뉴스가 도배되어 있던 즈음이었으니...)

정신없고 조급해보이던 모습이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노트북 모니터를 떠날 줄 몰랐고,

쉴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두손이 바빴다.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인터뷰가 끝나고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을 만나는 인터뷰는 참 신기한게,

인터뷰이에 따라 내적인 충돌을 느낄 수도 있고, 충만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직 내가 내공이 부족한 것도 한 이유겠지만

어떤 인터뷰이를 만나느냐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김용민씨는 현재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상황 속에 있는지라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변화의 여지가 많은 사람이다.

안정되지 않은 만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도 되겠다.

그래서 기대하고 계속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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