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주 잠시지만, 비행에 빠진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비행, 옳지 못한 행동을 매일 같이 하고 다녔던 때였다. 열 살 때였으니까 비행청소년도 아니고 비행어린이였다고 해야 하나.

술을 마시고, 난잡하게 놀기엔 안타깝게도 너무 어린 나이였고, 다만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고, 닥치는 대로-이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돈과 물건을 훔쳤다.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몸싸움까지는 안 갔지만 그 직전까지 갈 정도로 반 애들과 심하게 싸운 적도 있었다.

사실, 2학년 때까지 나는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수 적고, 착하고, 내성적이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최고의 모범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나를 두고 많은 어른들이 우려를 표했다. 숙제를 전혀 해놓지 않고, 마치 해온 것처럼 어줍잖은 꼼수를 쓴 나에게 벌을 주다가 담임선생님은 “전혀 그럴 것 같이 안 생겼는데....”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시로 지갑에 손을 대고 무슨 잘못인지 학교에 불려가기까지 할머니와 엄마는 “다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 돌려버리기도 했다.

그랬다. 그 때 내겐 비행을 함께하던 친구가 있었다. 함께 했다는 것은 적합지 않겠다. 내 비행을 지켜보고 방관했던 친구가 있었다. 훔쳐온 돈으로 군것질을 함께 했으며 가끔은 그냥 돈을 주기도 했다. 그 애는 그게 다 훔친 돈이라는 걸 알면서 아무 말 없이 받아쓰고 내 곁에 있었다. 함께 다른 애들과 싸웠고,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게 어떤 형태의 우정이었는지, 혹은 상처받은 영혼들끼리 이해타산이 맞았던 건지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그 애는 늘 ‘죽음’에 대한 이야길 했다. 열 살짜리의 고민치고는 참 심오했다. 물론,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끄덕끄덕 동조를 했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어떤 고민을 이야기했던가. 그게 무엇이든 진실을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가 왜 그렇게 모진 방황을 거쳐야만 했는지 알겠다. 나에게 상처 입힌 어른들, 뭣같은 세상에 열 살짜리 꼬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음을... 지금은 알겠다. 그 일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작고 어렸다. 적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묻고 지나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어쨌든, 당시 내가 1년 남짓 저질렀던 온갖 비행과 악행들은 나름대로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 상처를 그대로 담아두고 다시 착한 아이로 돌아가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나쁜 아이로라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1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다. '착한 아이'라는 본성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던 도벽에의 충동도 어느 정도 사그라졌고, 숙제도 공부도 조금씩 할 맘이 생겼다. 그렇게 4학년이 되어서는 그 애와 반이 갈리고, 나 또한 이전의 착한 아이로 거의 돌아왔다. 할머니와 엄마는 역시 ‘다 친구 잘못사귀어서 그랬던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내 비행의 원인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던 나 또한 ‘그런가 보다’하고 살았다.

내 비행의 원흉으로 지목된 그 애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후에는 맨송맨송하게 지냈다. 공부는 그저 그랬지만 사실 그렇게 못된 애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날 힘들게 했던 애로 여기고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누명을 씌웠으니 미안하기도 하다.

6학년 때였던가, 그 애와 다시 한 반이 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이미 나는 완벽한 모범생으로 거듭나있었다. 반에서 1등은 못돼도 2등 정도는 늘 차지하는 성적이었고, 부반장까지 역임했으니. 그 애와는 노는 무리도 달랐다. 친하지 않아서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는데 그 애와 그 애의 친구들이 날더러 ‘고상하다’며 비꼬고 놀렸던 건 기억난다. 지난 과거를 떠올리게 했음은 물론이다.

왜 갑자기 그 애 생각이 나는 걸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의 아픈 시절을, 그 애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한 게 많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그 애도 아마 그럴 것이다.

by 트래블러 2012. 2. 10. 12:14
창고형 마트, 뭐가 달라?
동네마다 대형 마트가 등장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평범한 대한민국 가족들의 주말 나들이 코스가 될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마트 시장에서 창고형 마트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일반 마트와 무엇이 다른지, 어떻게 이용하면 좋은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처음 코스트코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결혼하고 얼마 후, 신혼집 근처에 회원제 창고형 마트가 있다는 걸 알고 산책 삼아 가본 것이었다. 연회비가 자그마치 3만5천원이고, 삼성카드가 아니면 카드 결제가 안 되며, 출입할 때는 회원증 검사, 나갈 때는 영수증 검사를 한다는 등의 정보를 매장에 들어서기 전에 알게 된 우리는 비위가 상할 대로 상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지하세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우리는 거인국을 탐험하는 호기심 충만한 모험가가 되어 이성을 잃고 그 넓은 곳을 정신없이 헤맸다. 그리고 바로 창구로 찾아가 선언했다. “회원가입 할래요!”

요즘 창고형 마트가 뜨고 있다. 대형 마트라는 유통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자 다른 방식의 수익 모델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소상공인 등을 대상으로 한 대량 판매로 수익을 도모하고 있는 것.

미국계 할인점인 코스트코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하고 품질 좋은 수입 제품으로 이미지를 특화시켜 마니아층까지 있을 정도다. 코스트코 어그부츠는 입점되자마자 동이 날 정도로 그 인기가 매년 하늘을 찌르고, 각종 베이커리는 훌륭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이마트도 창고형 마트 시장에 뛰어들었다. 인천, 용인 등지에 오픈한 이마트 트레이더스다. 회원제가 아니라 연회비가 없다는 것이 큰 장점. 주로 국내 제품 위주로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특히 자영업자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테리어와 서비스를 최소화한 대신 만족도 높은 가격 경쟁력으로 각광받고 있는 창고형 마트. 그러나 잦은 충동 구매와 쓸데없는 대량 구매를 일삼게 되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인구 밀집지역이 많지 않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가끔씩 차를 끌고 나가 창고형 마트에서 일주일치 식량을 구입하는 문화가 굳어졌지만, 소형 마트가 즐비한 우리나라에서는 창고형 마트의 이점이 그리 크지 않은 것도 사실. 월마트나 마그넷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고형 마트가 지니고 있는 강점은 분명히 있다.
주부 9단이 창고형 마트를 현명하게 이용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1 꼭 필요한 물품만 구매한다.
일반 마트에서는 각종 행사나 호객행위 때문에 충동 구매를 하게 되지만, 창고형 마트에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상품이나 언제 동이 날지 모른다는 희귀성, 특출하게 저렴한 가격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구매하게 된다. 그러나 2인 가구 이하일 경우 창고형 마트에서 판매하는 대량 구입은 불필요한 소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따라서 미리 쇼핑 목록을 적어 계획성 있게 구매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창고형 마트를 이용할 때 필히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특히 유통기한이 있는 식품의 경우 누가 언제 먹을 것인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대량 구매를 하면 저렴하게 구입한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된다. 또 물품 규모가 커 이것저것 카트에 싣다 보면 한 번 쇼핑에 수십만 원이 우습다.

2 특정 시즌에만 입점되는 특화 상품을 미리 알아둔다.
모든 물건을 상시 구매할 수 없다는 점은 창고형 마트의 매력이자 단점이다. 특히 코스트코의 경우 거의 모든 물건이 수입 제품이기 때문에 재고 물량이 떨어지면 다시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코스트코 어그부츠의 경우 저렴한 가격에 비해 품질이 좋아 인터넷에서 입고되는 시점에 대한 정보 교환이 분분하고, 들어오는 날짜에 맞춰 엄청난 고객이 줄을 서서 구매할 정도다. 이마트 트레이더스는 경쟁력 있는 국산 아이템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대용량 반찬이나 데친 나물류 등을 소·중·대 크기별로 판매하고 있다. 그 밖에 인기 주방용품, 가전제품, 화분이나 생활용품 등 창고형 마트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화 제품이 있으니 미리 알아두는 것은 필수.

3 가족이 소수인 경우 이웃과 나눔 구매를 한다.
앞서 언급했듯 2인 이하 가족의 경우 창고형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있는 먹을거리를 구입할 때는 심히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웃과 쇼핑 시간을 맞춰 함께 다니며 나눔 구매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쇼핑 목록 중 겹치는 것을 함께 구매해 반으로 나누는 것이다. 코스트코에서만 판매하는 물건의 경우 인터넷 구매 대행 사이트를 통해 원하는 분량만 구매하는 방법도 있다.

4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쿠폰북을 100% 활용한다.
일반 마트보다 10~30% 저렴하지만, 정기 또는 비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쿠폰을 이용하면 더욱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코스트코의 경우 회원제로 운영돼 분기별로 쿠폰북을 우편으로 보내줄 뿐만 아니라 매장 입구에서도 매주 새로운 쿠폰을 나누어준다. 구매 예정이었던 물품이 있다면 미리 오려놓았다가 쇼핑할 때 적극 활용한다.

5 붐비지 않는 시간대를 이용한다.
일반 마트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다 보니 평일보다는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족 모두가 나들이 삼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창고형 마트가 있는 지역에서는 주말마다 수백 미터나 늘어선 자동차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주차하고, 쇼핑하고, 결제하는 데만 몇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창고형 마트의 이점을 만끽하고 싶다면 되도록 사람이 많이 붐비지 않는 평일 시간대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쇼핑 동선을 미리 파악해 쇼핑 시간을 단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6 회원비가 아깝다면 상품권 구매를 고려해보자.
회원제 할인 매장인 코스트코의 경우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입장도, 구매도 제한된다. 그러나 자주 쇼핑하는 편이 아니라면 3만5천원이나 하는 연회비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럴 때는 회원만 구입할 수 있는 해당 상품권을 미리 구매해 다음 해에는 멤버십을 하지 않는 대신 상품권으로 구매해도 된다. 상품권이 있으면 회원이 아니어도 구매할 수 있다.
창고형 마트와 일반 마트에 대한 SWOT 분석
프로 주부라면 쇼핑도 철저하고 현명하게 따져본 후 실행해야 한다. 경영자들이 현 상태를 올바로 파악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할 때 이용하는 SWOT 분석을 활용해보자. 창고형 마트와 일반 마트의 강점과 약점이 한눈에 파악된다.

자료제공: 리빙센스 | 진행: 홍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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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러 2012. 1. 12. 06:43

그 여자 권순복, 이사를 가다

그녀의 첫인상은 ‘자신이 만든 공간과 참 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때로 더없이 사랑스럽고 로맨틱하며, 세련된 감각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평범한 주부에서 인테리어 코디네이터로, 지금은 멋진 CEO로 진화 중인 권순복 대표. 파란만장한 성공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녀의 공간을 만났다.
여자, 공간을 스타일링하다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권순복 씨가 이사했다는 소문이 업계에 알음알음 퍼졌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그녀의 새집을 궁금해했다. 분당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는 90년대부터 국내 유수의 잡지에 수많은 인테리어 화보를 제공해온 보물단지였다.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의 3층짜리 타운하우스. 거기에 권순복이라는 이름까지 더해졌으니 얼마나 그림 같은 집이 완성됐을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타일리스트 중 주택에 사는 사람은 별로 없죠. 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어요. 저희 스튜디오 근처에 타운하우스가 생겨 한번 가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다행히 가족들도 흔쾌히 찬성해줬고요.”

그녀가 운영하는 마젠타스튜디오와는 차로 5분 거리. 바로 뒤에 산이 있어서인지 새벽녘이면 멋진 운무에 휩싸여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층이 나뉘어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서재나 홈시어터 룸, 다락방 등 새로운 공간이 생겨 꾸미는 재미도 늘었다. 덕분에 안방은 그녀가 좋아하는 로맨틱 스타일, 거실은 세련된 모던 스타일로 공간마다 다른 콘셉트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재미에 빠져 너무 무리한 나머지 덤으로 감기몸살을 얻긴 했지만.

“이제 이사한 지 일주일 남짓 됐는데 몸살을 앓느라 정신없었어요. 일할 때는 밤샘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원래 체력이 약한 편이거든요. 다행히 남편과 딸들이 저를 많이 도와줘요. 어제 작은 딸이 ‘엄마 이제 좀 살아났나 봐? 나 시험이었는데 엄마 패닉상태인 것 같아 일부러 안 건드렸어’ 그러더라고요.”

큰딸 현지는 벌써 스무 살, 작은 딸 예지는 열일곱 살이다.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그렇게 큰 딸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긴 매일 잡지 화보 촬영이다 인테리어 작업이다 해서 집 안에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며 어수선해도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기특한 딸들이었다. 이제는 대표라는 직함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지만 집에서 잡지 촬영을 하던 전업주부 시절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고.

소녀 시절부터 툭하면 방 안의 가구 배치를 바꾼다거나 멋진 지휘자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등 꾸미는 걸 좋아했다. 결국 취직이 잘된다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긴 했지만 미대에 간절하게 들어가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주부가 되어 평소 배우고 싶었던 것들과 만나면서 마음 한편에 미뤄두었던 끼가 되살아난 셈이다. 집 안 정리든 요리든,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90년대 후반에 <리빙센스>에도 몇 번 소개됐어요. 그때는 다재다능한 주부로 베이킹도 하고 수납도 하고 다 했어요. (웃음) 그러다 인테리어 코디네이터라는 이름도 얻게 됐고요.”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워낙 솜씨가 좋으니 잡지계에 소문이 퍼지고 규모도 점점 커졌다. 나중에는 살림, 육아와 병행하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모든 일을 끊기도 했다. 주부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지배한 시절이었다.

“애가 3학년쯤 되던 해였나, 기자들이 다시 괴롭히기 시작하는 거예요. 고민하다가 다시 조금씩 일을 받아서 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잡지의 화보가 유행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하게 됐는데 진짜 직업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생겼어요."
"처음엔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죠. 직장에 다니다 집에만 있으려니 무료해서 가만있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요리, 인테리어 등등 쉬지 않고 뭔가를 배우러 다녔던 것 같아요. 살림도 열심히 했고요. 그렇게 주부로 살면서 소질을 발견한 거죠."
주부, 커리어 우먼이 되다
한 여성지의 친한 기자가 에스닉 인테리어를 주제로 스타일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권 대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스타일의 인테리어라 오래 망설였는데, 그때 그 후배 기자가 한 말이 촌철살인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고.

“언니는 언제까지 해본 것만 할래? 새로운 것도 도전적으로 해봐야 발전이 있지 않겠어, 그러더라고요. 다 옳은 소리란 생각에 용기를 냈죠. 당시에는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 자체도 생소했고, 참고가 될 만한 자료도 별로 없었어요. 혼자 애를 쓰긴 했는데 나중에 잡지에 인쇄된 화보를 보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전국에 배포된 책을 모조리 사다가 불태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니까요.”스스로 봐도 부끄러울 정도의 퀄리티에 권순복 씨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스타일링 제의가 당장 끊겨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후배 기자는 아무 말이 없었고, 다음 달이 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로운 스타일링을 요청해왔다.

“결국 못 참고 제가 먼저 물어봤죠. 지난 번 화보 엉망이었는데 편집장님한테 혼나지 않았냐고. ‘엄청 깨졌지’ 그러더라고요. 민망한 마음에 그런데도 나랑 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후배가 웃으면서 한번 실수로 뭘 그러냐며 오히려 절 위로해줬어요.”

그 일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로서 프로 의식을 갖는 데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에 그녀에게 주어진 미션은 황토를 테마로 한 아파트 인테리어. 권 대표는 재료와 소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결국 구하지 못한 재료가 있어 촬영 전날 밤에 남편과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경북 안성 까지 다녀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물어물어 도착한 허름한 시멘트 공장. 권 대표의 사정으로 닫힌 공장 문이 열리자 거기엔 그토록 찾아 헤매던 황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순간 정말 황토가 황금처럼 보이더라고요. 게다가 마치 기적처럼 제가 찾던 모든 재료가 거기 다 있었어요. 황토 벽돌, 황토 페인트 등을 차에 한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죠.”

작업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평소의 약한 체력은 어디로 갔는지 지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권순복표 황토 인테리어를 본 담당 기자의 첫 마디는 이랬다고. “언니, 정말 준비 많이 했구나….” “그때부터 제가 하는 일에 오기가 생긴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화보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죠. 다소 무리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투자로 여기고 열심히 했어요. 당시 저를 믿고 응원해주었던 가족들 공이 컸죠.”

권순복 씨는 당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두고 봐. 내가 이 바닥에 권순복이라는 이름 석 자 알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만두지 않아.”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최면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주문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다
권순복 대표가 스튜디오 사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째다.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오픈하자마자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사업가 기질이 있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권 대표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저는 술도 못 마시고 청탁도 잘 못해요. 사업하려면 싫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못마땅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싫은 사람하고는 일 못해요. 대신 한번 맘에 든 사람하고는 끝까지 가죠.”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 어떤 이들은 매체를 가리기도 하는데 권 대표는 매체의 이름값보다는 그저 친한 기자가 있는 매체만 고집했다. 그것은 일종의 의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고 일한다’는 신조이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도 이러한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튜디오 사업을 하다 보면 흥정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할인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에게 그녀는 가차 없이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깎아드리는 건 문제가 안 돼요. 하지만 제가 깎으면 제 뒤의 후배들도 줄줄이 다 가격을 내려야 돼요. 제가 어떻게 물 흐리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사업이 위기에 처한 거래처 사장이 신제품 촬영할 비용이 모자라다는 얘기에는 흔쾌히 무료로 스튜디오를 빌려주기도 했다. 다행히 신제품은 대박이 났고, 그 보답으로 새집의 커튼을 맡아 시공해주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한 만큼 신뢰도 깊어지고 뗄 수 없는 인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업은 사업인지라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피곤한 상황에 휘말리기도 하고,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도 다반사다. 아무리 일을 좋아하는 그녀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일거리에 심신이 지칠 때도 물론 있다. 하여 열정적으로 일한 만큼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권 대표가 훌쩍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그녀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는 증거다.
“중요한 전시가 있어 출장 겸 가는 때도 있고 1년에 서너 번은 해외에 나가서 재충전을 해요. 어떤 때는 떠나기 이틀 전에 통보하기도 해요. 남편에게는 평소에 이렇게 말해두었죠. 내가 갑자기 어딜 가는 건 정말 미칠 것 같을 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라고요. 다행히 잘 이해해준답니다.”

권 대표는 올 초에도 까사스쿨 권은순 원장과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영국의 한 전시회에서 그녀는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받았다. “권 원장님이 꼭 봐야 할 전시가 있다면서 저를 끌더라고요. 의미심장하게 ‘네가 아마 좋아할 것’이라 덧붙이면서요. 앙드레 풋만이라는 프랑스 디자이너의 전시였어요. 아흔이 넘은 할머니인데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는 분이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한 영상에서 보디가드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백발에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었어요. 얼마나 멋있던지요!”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아흔까지 산다면 저런 모습이고 싶다’고. 그런 소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던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작아져 있었다.

“만약 아흔 살이 될 때까지 일을 한다면 아직 절반도 안 온 거잖아요. 40대가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닌 거죠.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권 대표는 이제 자타가 인정하는 스타일리스트이자 CEO다. 그런 그녀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일하는 게 즐거워 보인다’이다. 그녀가 창조한 공간들은 잡지 화보에서, 모델하우스에서, 브랜드 론칭 행사에서 또 하나의 판타지를 만든다. 많은 주부가 ‘나도 저런 곳에 살아봤으면…’ 하고 가슴 설레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환상. 권 대표는 그러한 환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꽃병 하나, 숟가락 하나까지 애지중지하던 평범한 주부 시절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즐겁게 일하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큰딸 현지도 엄마를 좇아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늘 배움에 갈급했던 그녀였기에 정식으로 디자이너의 길을 걷는 딸이 앞으로 펼쳐갈 미래는 자신이 해온 것과는 전혀 다를 거란 기대감을 품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이 사는 공간을 가꾸는 건 절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마 앞으로 더 전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물건에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거든요.”

이제는 ‘공간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권 대표. 리빙 페어에도 나가고 싶고, 스타일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책도 내고 싶단다. 그녀의 성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므로 빠르든 더디든 언젠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백발을 휘날리며 멋지게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아흔의 디자이너를.



by 트래블러 2011. 12. 28. 06:09

2011년이 다 지나간다.

벌써 26일이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일은

앤써 마감 내일까지 치는 것.

웅진 마감하는 것.

일단 할일을 정리해보자.

오늘 밤 앤써 스페셜 기사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내일 구로 웅진 미팅 다녀와서

오후에 스페셜 기사 탈고.

웅진 소식지 나머지 원고 정리해서 보내기.

수요일엔 대전 취재.

저녁 때 송년회 어떡할지;;

목요일, 금요일은 웅진 마감...

by 트래블러 2011. 12. 2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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