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보면 발레의 현신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춤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관객과 무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원국. 나이 들어간다는 절박함만큼이나 춤을 꼭 붙들고 있는 그의 몸짓은 그 자체로 춤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나는 44세의 발레리노다!”
모 증권회사 광고에서 붕대를 감은 맨발로 땅을 박차고 오르는 그의 모습은 예술성과 한결같음이 빚어낸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흔히 ‘발레’ 하면 발레리나를 떠올리는 우리들에게 ‘이원국’이란 이름은 발레리노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탁월한 실력과 감각으로 유니버설발레단,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자리를 꿰차는가 하면 당세르 노블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2005년 국립발레단을 은퇴한 그는 대학이나 또 다른 컴퍼니에 들어가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무대를 갈구했다. 이제는 아예 ‘이원국 발레단’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민간 발레단을 세우고 좀 더 관객 가까이, 보다 낮은 곳으로 다가간 것이다. 이원국 단장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노원문화예술회관의 지하 연습실. 그가 창단한 민간 발레단인 이원국 발레단이 지난해 노원문화예술회관의 상주 예술 단체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원구 시민들은 1년 내내 <지젤>같은 정통 발레부터 ‘해설이 있는 발레 이야기’와 같은 퓨전 발레까지 폭넓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군부대와 같은 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가는 등 발레가 보다 깊숙이 우리 일상에 침투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는 중년의 발레리노, 이원국은 발레의 다른 이름이었다.
근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 -지젤- 공연을 성황리에 잘 끝냈다. 매달 ‘해설이 있는 발레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고 또 매주 월요일에는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에서 상설 발레 공연을 갖고 있다. 내일은 원주에 있는 공군 비행단을 찾아갈 예정이다. 이처럼 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가 색다른 발레 공연을 보여주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군부대 같은 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가 공연하는 일이 말처럼 쉬울 것 같지 않다. 특히 발레의 특성상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나?
찾아가는 공연의 경우 춤을 추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춘 곳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조명도 음향 시설도 없고, 바닥이 미끄럽고 층고도 낮고…. 그런 것을 감안하고 가는 공연이기 때문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국립발레단 공연처럼 큰 무대에 주로 서다가 작은 공연을 하다 보면 그 차이가 피부에 와 닿을 것 같다.
아무래도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무대가 크다 보니 군무가 많고, 전체적으로 완성도 있는 극작품을 많이 하게 된다. 또 관객들도 마니아들이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미리 알고 오시는 분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원국 발레단이 지향하고 있는 ‘찾아가는 발레 공연’의 경우 관객들이 발레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아마 70~80% 이상이 발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관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분위기나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발레는 오페라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용수를 근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소극장 공연도 이채롭다. 무대장치나 화려한 조명이 없으니 무용수의 몸짓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다. 표정, 땀방울, 근육의 움직임 같은 것을 코앞에서 보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느낌이 강렬하다는 관객도 있었다.
매주 월요일에 대학로 소극장에서 여는 상설 발레 공연은 꽤 오래된 걸로 알고 있다.
지난주에는 정말 많은 관객이 찾아와서 기뻤다. 현장에서 직접 표를 구매한 관객이 절반 이상이라고 알고 있다. 보다 대중 가까이에 다가가는 공연이 되기 위해 정통 발레뿐만 아니라 가요, 팝송, 트로트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로 꾸미고 있다. 나로서는 이 소극장 공연이 ‘발레는 어렵고 고급스러운 예술 장르’라는 편견을 허무는 작업인 셈이다.
지난해부터는 노원문화예술회관에 둥지를 틀었다. 어떻게 계기가 되었나?
‘공연장 상주 예술단체 육성사업’이라 해서 서울시 안에 있는 공연장과 연극, 발레, 무용 등 공연단체를 서로 연결시키는 사업이 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공연예술 활성화를 위해 지원하고 있는 사업인데 거기에 신청서를 내서 뽑힌 거다. 작년 9월부터 들어왔고, 정기공연을 비롯해 매달 ‘해설이 있는 발레’나 여러 가지 대중화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열심히 활동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뽑힌 예술단체들 중에서도 우수한 활동을 했다고 해서 내년에는 인센티브도 받게 됐다. 노원구 시민 65만 명이 다 발레 공연을 볼 때까지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언제부터 발레 대중화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했나? 은퇴 후 대학에서 후학양성을 한다든지, 편한 길이 많았을 텐데.
30대 중반이었던 2000년쯤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발레리노를 보는 사람들의 편견도 있고. 아직 내게는 무대에 대한 열정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언제고 춤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심했다. 게다가 나로선 지도자의 길을 걷는 데 별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공연장까지 찾아오기 힘든 분들, 문화 소외 지역에 사시는 할머니라든가 어려운 분들을 위해 공연을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발레 대중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게 된 거고. 내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
한 증권회사의 CF에 나온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나는 모래사장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다를 배경으로 모래사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콘셉트였다. 수백 번 뛴 보람이 있었다. 내가 봐도 만족스럽더라. 스태프들이 내 발이 너무 깨끗해서 놀랐다고 했다. 강수진 씨 발처럼 변형된 모양을 상상했던 것 같은데 난 그 정도는 아니다.
발레리노는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직업이다. 나이에 따라 춤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 20대의 몸이 막 떠오르는 태양과 같다면 30대의 몸은 그 태양마저 품는 바다 같고, 40대의 몸은 자연 그 자체다. 너무 거창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늘 채찍질이 필요하다는 것은 똑같다.
어떤 발레리노로 남고 싶은가?
내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내 춤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찾아왔듯이, 나도 관객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렇게 끝까지 관객들과 함께한, 그래서 그들이 가장 사랑한 발레리노로 남았으면 좋겠다. 보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춤이라도 그저 헛되지 않겠는가.


by 트래블러 2010. 12. 8. 15:31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이끈 박칼린 감독의 애제자, 카리스마 있는 보컬 트레이너, 까칠남….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남자의 자격’은 무명에 가까웠던 신인 뮤지컬 배우 앞에 이 많은 수식어를 선사했다. 예능의 힘이다. 최근 뮤지컬 <남한산성>에서 ‘정명수’ 역으로 또 한 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멋진 배우, 최재림을 만났다.

따뜻한 리더십으로 오합지졸 합창단에서 환상의 하모니를 이끌어낸 박칼린 감독, 그 곁에서 무심한 듯 부루퉁한 표정으로 은은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젊은 남자를 기억하는가.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으리라. 박칼린 감독이 애제자라며 아끼는 보컬 트레이너 정도로만 알려진 그는 요즘 가장 촉망받는 신인 뮤지컬 배우, 최재림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연예인들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가 하면 앙증맞은 율동으로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 그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충분히 알렸다. 방송은 끝났지만 아직 인기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최재림이 본업인 뮤지컬 배우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대형 뮤지컬 <남한산성>이 공연되고 있는 성남아트센터를 찾았다. 김훈 원작의 <남한산성>에서 그가 맡은 배역인 ‘정명수’는 천민 출신이지만 뛰어난 능력과 야욕으로 청나라 역관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작품에서는 주인공 ‘오달제’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중심인물로, 최재림은 악역을 제대로 소화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게다가 스타급 배우 못지않게 이미 탄탄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어 이제 겨우 세 번째 작품을 맡은 신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많은 사람의 기대와 축복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스승 박칼린 감독의 후광 덕분일까, 아니면 운과 실력을 동시에 타고난 덕분일까. 열화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커튼콜이 끝난 후 커다란 키와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청년, 최재림을 만났다.
팬이 많이 생긴 것 같더라. 요즘 인기를 실감하고 있나?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는 박수소리가 전보다 더 커진 것 정도? 미니홈피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도 많이 늘었다. 방송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진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공연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주연이라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공연을 위해 달려온 기간이 2개월 남짓인데 솔직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거의 쉬는 날 없이 매일 공연에 매달려왔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한 회 한 회 전력을 다해 임하고 있다.
‘정명수’란 캐릭터가 매우 매력있다. 어떤 면을 보고 공연을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남한산성> 출연을 확정하고 나서 배역을 받았다. 당연히 캐릭터 간 구도나 정명수가 어떤 역할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대본을 보니까 내가 담당해야 할 역할과 분량이 만만치가 않아서 걱정이 앞서더라. 연습 시작하면서 하나하나 숙제를 풀어가는 기분으로 배역에 다가섰다. 표면적으로는 조국을 배신한 악역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인물이어서 몰입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만약 정명수와 같은 처지에 놓였어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자격’에 출연한 멤버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나?
방송 이후 다들 너무 바빠졌다. 서도훈 씨나 서인국 씨와는 꽤 친해져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다.
합창단 트레이닝은 이번이 처음이었나?
이전에 1 대 1 보컬 트레이닝은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 다수를 상대로 한 트레이닝은 처음이었다. 처음 칼린 선생님이 함께하자고 말씀하셨을 때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지만 새로운 도전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1 대 1이 아니다 보니 노래하는 것을 하나하나 잡아주긴 힘들었지만, 곡 자체의 느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한 달이 넘게 방송되면서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악플도 있었나?
방송에 나간 그대로이기 때문에 크게 할 말이 없다. 만약 내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연출했다면 잘못일 수도 있겠지만 있는 그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칭찬도 많이 받고 비난도 받았지만 거기에 좌우되지 않으려고 한다.
시종일관 까칠한 모습이다가 막판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반전의 감동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나한테는 정말 큰 감동이었다. 두 달 동안 힘들게 연습했던 시간들이 필름 돌아가듯 스쳐 지나가고, 시합 전에 보여줬던 하모니 그 이상을 보여주니까 감동이 밀려오더라. 한편으로는 나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 ‘나도 저들 사이에 함께 서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열망도 참기 힘들었다.
방송이 끝난 후 멤버들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나?
다 끝나고 쫑파티를 했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서로 서운했던 점도 털어놓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도 나누고. 농담 섞어서 ‘너 이제는 형이라고 불러라’ 하는 분도 계셨다. 연습할 때는 내가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연습할 때는 정말 일정이 너무 빡빡했기 때문에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굉장히 장난도 잘 치고 활발한 성격인데 너무 까칠한 면만 부각된 것 같다.
박칼린 감독이 인정한 제자라는 점에서 좋은 출발을 한 것 같다.
아직 배우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성악을 전공한 목소리라 가창력 면에서 칭찬을 조금 받은 것뿐이다. 어쨌든 칭찬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만 그 기대치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쉴 틈이 없어졌다는 것이 괴로울 뿐. 하지만 그 부담감이 싫지는 않다. 그게 다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박칼린 선생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차기작은 정해졌나?
나의 차기작은 ‘졸업’이다. (웃음) 아직 대학생 신분이라 학교부터 졸업해야 한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졸업전 준비에 매진해야 할 것 같다. 진짜 시작은 내년부터다.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성악을 공부하다 뮤지컬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있나?
나는 아직 앞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해도 모자란 처지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왔는지 돌아볼 상황이 못 된다. 아직은 무대에 서는 것이 좋고, 공연하는 것이 마냥 즐겁다. 한 10년쯤 후 여유가 생기면 그때 뒤돌아보며 내 선택이 어땠는지 생각해보겠다.


by 트래블러 2010. 11. 22. 16:11
자연스러운 컬러와 감촉의 리넨으로 만든 도트 패턴 아기 신발. 신는 아이 발도 편하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어느 목요일 아침에 만난 윤아영 씨는 블로그와 쇼핑몰을 보면서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앳된 외모와 애교가 흘러넘치는 목소리는 물론 손수 만든 소품까지 그야말로 ‘러블리’ 그 자체. 아토피로 고생하는 둘째 아들을 위해 일본에서 직접 공수한 오가닉 코튼으로 내의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녀에게 ‘에코맘’이란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최근에 <에코맘 윤아영의 아이 옷 만들기>란 책을 내면서 많은 주부의 워너비가 되고 있지만, 실제 만난 그녀는 아이에게 극성인 완벽주의 주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부 9단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살림 솜씨
열두 살, 열한 살인 연년생 아들 둘을 둔 엄마치고는 너무도 앳되고 여린 외모에 한 번 놀랐고, 모기같이 가느다랗고 여린 목소리가 아들 앞에서는 우렁우렁하게 커진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소위 말하는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남들보다 결혼과 출산이 빠른 편이었다. 솔직한 고백에 따르면 딱 3개월 해본 사회생활이 그렇게 지긋지긋했단다. 오랜 연인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서둘러 결혼하며 다복한 가정을 꿈꾼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그녀가 대학에서 배운 의상 디자인은 첫째 율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빛을 발했다.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는 스물다섯 어린 주부가 손수 만든 겉싸개며 배냇저고리는 모두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다.
“엄마가 살림을 그렇게 잘하셨어요. 계절마다 테이블보며 피아노보를 싹 갈고, 늘 뭔가를 만드시거나 요리를 하고 계셨으니까요. 저희는 한 번도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싫다는 투정에도 다 맞춰주셨고요. 그게 좋아 보였던 것 같아요. 사회적인 성공보다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식 많이 낳고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게 제 유일한 꿈이었으니까요.”

“다른 아기들이 모두 분홍색이나 하늘색 등 천변일률적인 옷들만 입고 있으니 그 안에서 우리 애가 확 눈에 들어오기는 하더라고요. 병원 간호사들이 어느 브랜드 옷이냐며 묻기도 하고…. 직접 만든 옷이 이렇게 아이를 특별하게 만드는구나 싶어 어깨가 으쓱했죠.” 그때부터 아이 옷은 물론 지인들에게도 아기 신발 등을 직접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취미는 이듬해 아토피를 앓는 둘째 준이가 태어나며 본격화되었다. “첫째는 안 그랬는데, 똑같이 먹이는데도 준이는 체질이 그렇더라고요. 아토피가 심해지면 정말 심각하거든요. 잠도 못 자고 진물이며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엄마는 애만 쳐다봐야 하죠. 그러기 전에 뭐든 다 해주고 싶었어요. 병원 치료도 받고 먹이는 것도 신경 썼지요, 인테리어도 친환경으로 싹 다 바꿨어요. 그러다 친정아버지에게 ‘일본에는 유기농으로 재배한 면사로 만든 원단이 있다’는 얘길 들었죠.” 윤아영 씨의 아버지는 자연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윤동혁 PD다. 아버지의 인맥까지 동원해 일본에서 직접 공수한 유기농 순면으로 준이에게 내의를 만들어 입혔다. 하루아침에 낫지는 않았지만 그런 엄마의 정성 덕분인지 아토피가 점점 나아 일곱 살이 될 즈음엔 언제 앓았나 싶을 정도로 완치되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중심을 잡다
그렇게 5, 6년을 정신없이 육아에 매달리며 보냈다. 어느덧 그녀의 나이도 서른 줄에 접어들었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더라고요. 집에서 남자애 둘하고 씨름을 하다 보니 저도 너무 지친 거예요. 괜히 남편이 원망스럽고, 모든 일에 가시가 돋쳤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나만의 일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더라고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찾다 보니 그것이 바로 아이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 아토피로 고통 받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엄마 마음을 알기에, 또 백화점에서 산 비싼 옷으로 허영심을 대리만족하는 대신 직접 만들어 입히는 기쁨을 알기에, 다른 엄마들과도 그런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다. “엄마들이 손쉽게 따라 만들 수 있도록 DIY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요. 2004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저희와 같은 콘셉트의 쇼핑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주문이 들어왔어요.”

하지만 쇼핑몰을 운영하면서도 ‘가정이 먼저’라는 원칙은 절대 깨지 않았다. 너무 일이 고되다 싶으면 아예 보름간 ‘출장 중’ 팝업을 띄워놓고 일을 접었다. 어떤 경우라도 아이와 남편을 보살피는 주부로서의 본분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핑몰 사업은 윤아영 씨에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을 가질 수 있게 해줬지만 힘든 점도 적지 않았다. 사회생활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그녀이기에 여사장이라고 무시하는 공장 사람들의 안하무인 격 태도나,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소위 ‘진상’ 손님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던 것. 사업 초기에는 여리고 예민한 특유의 성격 탓에 한 번 시달릴 때마다 며칠씩 앓아눕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상처를 받으며 그녀가 얻은 것은 보다 단단해진 내면과 유연하게 상황을 대처해나갈 수 있는 힘이었다. 일을 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예전에는 굉장히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었어요. 신랑이 바쁘다며 내 전화를 빨리 끊으면 바로 다시 전화해 ‘자기는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 하면서 울고불고 투정을 부렸던 철없는 아내였죠. 그런데 일을 하니까 남편 입장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제가 직접 돈을 벌어보니까 돈 10만원 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싶더라고요.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타던 모범택시도 제가 직접 돈을 번 다음부터는 한 번도 못 탔어요.”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욕심 많은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도 늦고 공부도 못하는 두 아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읽으라는 책은 쳐다보지도 않고 집 안에서 축구를 한다며 살림을 다 망가뜨려놓지 않나, 장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게 ‘손만두집 주인’이라질 않나, 누구를 닮아 이렇게 이상한 아이들이 나왔는지 한숨만 쉬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큰애가 ‘엄마,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려고 하는 것도 다 행복해지려고 가는 거 아냐? 나는 손만두집 근처에만 가도 기분이 좋은데’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면서 네 말이 맞다 싶었죠. 그 뒤로는 학원도 다니기 싫다고 하면 안 보내요. 건강하고 잘 크는 것만으로도 됐다 싶어요.”

궁전같이 커다란 집, 완벽한 인테리어, 최고의 학군에 다니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 결혼 전 윤아영 씨가 꿈꿨던 이런 이상적인 가정과는 분명히 다른 현실이지만, 그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블로그에는 그녀의 대소사에 함께 웃고, 울고, 감동하는 수백 명의 팬이 있고, 건강하고 착한 두 아들, 세상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남편까지, 오히려 가진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단다. 지금도 많은 주부가 TV나 책에 나오는 호화로운 집을 보며 환상을 좇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의 시작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다. 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조바심을 내는 게 아니라 현재 내 곁에 있는 말썽쟁이 아이가 잘 입고 잘 먹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윤아영 씨의 얼굴에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번졌다.
윤아영 씨가 제안하는 에코 라이프 실천법
1 먼저 마트를 끊으세요
유기농 제품이 가격은 비싼데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어 의심받곤 하죠. 하지만 특히 먹을거리는 유기농 제품을 이용하는 것이 좋아요. 가족 하루 외식 가격 정도면 한살림이나 생협을 통해 유기농 농산물을 한 달치를 구입할 수 있답니다. 일단 습관적인 마트 쇼핑부터 줄이세요.
2 물려 입는 옷이 좋아요.
일반 면에는 농약, 유연제 등 화학성분이 스며들어 있어 오히려 새 옷이 아이 피부에 좋지 않다고 해요. 오래 입은 옷은 세탁을 거듭하면서 화학성분이 다 빠지게 되죠. 어린아이의 옷인 경우 낡고 헤진 곳에 토끼나 하트 문양을 아플리케로 덧대주세요.
3 너무 새하얗고 부드러운 옷은 의심해봐야 해요.
아기 옷을 만드는 보들보들한 천이 엄청난 양의 유연제와 기름에 담가서 만든 것이래요. 아토피가 있는 아이에겐 치명적이죠. 흰색 옷도 형광증백제로 화학 처리한 경우가 많아요. 약간 누르스름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색이 피부에 좋답니다.

by 트래블러 2010. 11. 22. 16:03
번화한 강남대로를 살짝 비껴난 골목 어귀의 작은 빵집. 그저 부동산이 있고, 작은 슈퍼가 있고, 가끔 새소리가 들려오는 한적하고 평범한 동네 길목일 뿐이다. 그러나 도쿄팡야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빵 굽는 냄새와 어눌한 한국어로 손님을 맞는 후지와라 씨의 인사가 문득 작은 일본에 온 듯 가슴 설레게 했다.
밀가루를 반죽해 벽에 장식한 ‘서울’, ‘동경’, ‘NY’이라는 글자가 먼 길을 돌아 여기 이 낯선 땅에 자리 잡은 후지와라 씨의 여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작은 빵집에서 만나는 도쿄 스타일
빵집은 제자리에서 모든 빵을 집어들 수 있을 만큼 아담했다. 이른 오후임에도 나무로 된 트레이 몇 개는 이미 비어 있었고, 안쪽으로 깊은 주방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빵은 구워내느라 예닐곱 직원의 손길이 분주했다. 후지와라 씨는 몇몇 직원과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직원도 있고, 애니메이션 보면서 공부를 했다는 직원도 있어요. 천재예요. 저는 한국 오면서 서울대 어학당에서 두 달 배웠는데, 아직 멀었어요. 직원들이 저질 한국어라고 놀려요.”

발음이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완벽한 실력이라고 칭찬했더니 수줍은 듯 웃는 표정이 영락없는 젊은 청년이다. 뉴요커를 꿈꾸던 음악도가 어쩌다 한국이란 나라에 와서 빵 사랑에 푹 빠져 있을까? 후지와라 씨의 달콤 짭조름한 빵 이야기가 시작됐다.
“한국에는 개인 빵집이 거의 없어요. 작은 빵집은 돈벌이가 쉽지 않아 불안해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는 콘셉트가 강하잖아요. 일본 사람이 직접 만든 ‘토오쿄오’ 스타일 빵이에요. 일부러 손님들이 찾아와요. 그래서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수익이 똑같아요.”

후지와라 씨가 내뱉는 ‘토오쿄오 스타일’이라는 거센 발음이 문득 귓가를 맴돌다 간다. 실체는 잘 모르겠지만 스타일이 있는 빵집이라니 낯설면서도 멋지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빵집에서 특정한 스타일을 찾으려 했던 적이 있던가. 문득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대부분인 것을 보고 놀랐다는 후지와라 씨. 무역 컨설팅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한 카페의 제과 담당으로 왔다가 가게를 내고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타깃 고객층인 젊은 여성이 많이 다니는 이대나 홍대 근처로 알아봤지만 권리금만 1억이 넘는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모자란 자금을 가지고 가게를 찾다 보니 이렇게 한적한 골목까지 밀려났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국적인 도쿄 분위기를 내는 데는 더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후지와라 씨는 일본의 유명 제과점인 안젤리카 출신으로 일본의 빵 맛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사람이 직접 만드는 일본 빵’이라는 콘셉트는 강했다. 특히 비교적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 그토록 다채로운 디저트와 새로운 빵 맛을 본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충분히 어필할 만한 곳이었다.

“손님들이 ‘일본 갔을 때 먹어봤어요’ ‘망가(일본 만화)에서 봤는데 꼭 먹어보고 싶었어요’ 등의 말을 많이 해요. 아무래도 서로 가까운 나라니까 많이 알고 계시고, 그래서 찾아오시는 분도 많은 것 같아요.”

특히 그가 제빵을 배운 시모키타자와의 안젤리카는 카레빵이 유명한 곳으로 일본 여행을 가는 이들이 한 번쯤 들르는 맛집이다.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곳이 ‘안젤리카의 카레빵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입소문이 쫙 퍼진 것이다. 후지와라 씨는 자신이 안젤리카 출신 제빵사라는 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 가게가 빠른 시간에 자리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젤리카에서 배운 빵들을 한국에서 한국의 재료로 만드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고.

“일본에는 카레 페이스트가 있어서 거기에 재료를 좀 섞어서 빵의 속을 채워요. 그런데 한국에는 카레가루밖에 안 팔더라고요. 한국의 큰 제과점에서도 카레빵을 파는데, 감자에 카레 양념을 한 거라 일본 카레빵과는 달라요. 결국 스스로 방법을 개발해야 했어요.”

여러 번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한국의 카레가루와 채소를 넣어 개발한 카레빵은 놀랍게도 안젤리카의 빵 맛과 흡사했다. 카레카루에 물을 넣더라도 너무 묽거나 되지 않게 조절해야 하는데, 그 비법은 비밀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물어봐요. 일본 빵하고 한국 빵이 어떻게 다르냐고. 그런데 난 한국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지 못해서 몰라요. 그냥 우리가 일본 빵을 우리 콘셉트대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개성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뉴욕이든 어디든 빵이 있는 곳이라면
도쿄팡야를 오픈한 것은 2008년 10월. 불과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매출은 몇 배 이상 뛰었고, 직원은 7명으로 늘어났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비좁은 가게와 담백하고 깔끔한 도쿄팡야만의 빵 맛이다.

“맛을 내는 게 굉장히 미묘해요.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약간 짜게 만드는 게 중요한데요, 소금 양을 조금만 잘못 넣어도 짜거나 맛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또 온도와 습도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니까 그것도 고려해서 소금을 넣어야 해요.”

도쿄팡야의 대표 빵은 역시 카레빵과 미소빵이다. 우리는 흔히 카레밥을 떠올리지만 일본에서는 식사 대용으로도 카레빵을 즐겨 먹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부드러운 빵 안에 다진 돼지고기와 채소를 넣은 따뜻한 카레 소스가 들어 있는데 과연 일품이었다. 일본식 된장인 미소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미소빵 또한 도쿄팡야의 인기 빵 중 하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된장의 구수한 맛보다는 달콤하고 보드라운 맛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너무 달거나 짜지 않은, 절제된 맛이 일본 빵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외에도 멜론빵, 딸기단팥빵, 명란새우빵 등 확실히 일반 제과점에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신기한 빵들이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후지와라 씨가 제빵사가 된 것은 뉴욕에 일본 빵집을 내기 위해서였다. 스무 살 때 4년 남짓 뉴욕에서 밴드 보컬 활동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무척이나 행복했고, 이곳에서 평생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갖게 되었다고. 뉴욕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을 구상하던 중 떠오른 것이 뉴욕에는 맛있는 빵집이 없다는 거였다.

“일본 빵집을 내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미국 빵은 정말 맛이 없거든요. 그래서 도쿄로 다시 돌아가 안젤리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제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웠어요.”
원래 요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생전 처음 접해보는 제빵 세계가 녹록할 리 없었다. 선배들 또한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주기보다는 알아서 보고 배우라는 식이어서 그 딱딱한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기필코 뉴욕에 빵집을 내고 말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아냈다. 그러면서 점점 빵 만드는 재미에 빠져들게 됐다.

“빵 만드는 일이 참 재미있어요. 지금은 이 생활에 푹 빠져서 다른 생각을 못하겠어요.”
매일 10시간 이상 작은 빵집에 붙어 있는 게 전부인 한국 생활이지만, 한국과 빵의 매력에 빠져 뉴욕 입성은 잠시 뒤로 미뤄둔 상태다. 곧 백화점에도 입점하고, 다른 지역에 지점도 낼 계획이란다. 그렇게 조금씩 꿈을 펼쳐가며 도쿄 스타일 빵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어떤 손님이 저희 멜론빵을 거래처에 선물했는데 그 덕분에 계약이 성사됐다고 인사하러 왔어요. 또 한 아름 멜론빵을 사가셨고요. 손님들이 행복해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참 즐거워요.”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뮤지컬 배우 최재림 인터뷰  (2) 2010.11.22
에코맘 윤아영의 행복론  (0) 2010.11.22
주재근 베이커리 주재근 대표  (0) 2010.08.29
기욤베이커리 에릭 오세르 제과장  (0) 2010.08.18
김치명인 강순의 여사  (1) 2010.07.23
by 트래블러 2010. 9. 8. 21:00
| 1 2 3 4 5 6 7 8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