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적 후 이틀 뒤인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됐다. 전날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조문객들로 그 넓디넓은 절 마당이 시장처럼 복작거렸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다비하여 주기를 바란 법정 스님의 유지대로 그 절차는 놀라우리만큼 간소했다. 다비장이라고 따로 마련한 것도 아니고 산속 움푹 들어간 공터에 나무를 쌓아 만든 연화단뿐이었다. 그 흔한 영결식도, 사전행사도 없었다. 지닌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무소유를 실천하며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다운 마지막이었다.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선각자
그는 수행자이자, 선승, 자연주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법정 스님이 법회를 통해, 혹은 글을 통해 이야기해온 무소유, 자유, 단순한 삶, 침묵, 홀로 있음의 진리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서서히 대중의 뇌리 속에 스며들었다. 우리 삶의 가치가 ‘성공’에서 ‘행복’으로 바뀌어간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던 그는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마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나중에 법정 스님은 출가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법정 스님은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하여 1956년에 송광사에서 당대 선승이던 효봉 스님의 문하에 출가했다. 그 후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했으며, 사미계를 받은 뒤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그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다가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한때는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대한불교신문> 논설위원을 맡는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정도로 현실 참여적이었다. 1971년 <불교신문> 칼럼 사건은 법정 스님의 이러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전 파병을 결정했을 때 불교계가 장병들의 무운을 비는 대규모 법회를 연 일이 있었다. 이때 법정 스님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가 전쟁을 하러 가는 군인들의 무운을 비는 건 웬 소리냐”며 크게 비판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같은 용기는 대단한 일이었다. 정병조 동국대 교수는 “한국 현대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 둘인데 한 분은 성철 스님이고 또 다른 분이 바로 법정 스님이다. 성철 스님은 수도자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고, 법정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언어로 나타냈다. 그는 한국 불교계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지만 모두 애정 어린 비판이었다”라고 불교사에서 스님의 가치를 평가했다.
그렇게 젊은 시절, 세속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법정 스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게 한 사건이 벌어진다. 1975년, 일명 ‘인혁당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으로 생때같은 젊은이 8명이 한꺼번에 사형을 당한 것이다. 이를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법정 스님은 수행승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수도하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뒤에 법정 스님이 그때의 일을 회고하며 말한 내용이다. 다시 출가 수행자의 위치로 돌아간 그는 철저히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호흡하기를 잊지 않았다.
“시골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나를 보더니 불쑥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아, 그 빨래판 같은 것이오?”라고 되물었다. ‘빨래판 같은 것’이라는 이 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꽂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전 에세이에서 이렇게 밝혔듯,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불가의 귀한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 쓴 저서가 바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명저, <무소유>다.
인생에 대한 성찰과 세상 사는 지혜를 담은 수필집, <무소유>는 1976년 발간된 이래 35년간 3백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최근까지도 매년 1만 부씩 팔려나가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에 대해 고 김수환 추기경이 “무소유를 강조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말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명실 공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필집이 되었다. 이 외에도 <산에는 꽃이 피네> <맑고 향기롭게> <텅빈 충만> <오두막 편지> <홀로 사는 즐거움>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어느 정도 인세가 모일 때마다 “이 돈은 수행자에게 지나친 재산이다”라며 필요한 이웃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작 본인이 중병에 걸렸을 때는 병원비가 모자랄 정도였다고.
70년대 불일암에서 수행 중이던 법정 스님의 젊은 시절
그리고 스님이 남긴 맑고 향기로운 흔적들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널리 알려온 법정 스님은 끝없이 정진하는 진정한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늘 무소유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일깨운 것처럼 자신도 청빈한 삶을 고집했다. 휴지 한 쪽도 절반으로 갈라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지병이던 폐암이 재발되어 돈이 많이 드는 수술이 필요해지자 치료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널리 알려온 법정 스님은 끝없이 정진하는 진정한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늘 무소유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일깨운 것처럼 자신도 청빈한 삶을 고집했다. 휴지 한 쪽도 절반으로 갈라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지병이던 폐암이 재발되어 돈이 많이 드는 수술이 필요해지자 치료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1994년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를 10만 장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고 대중 강연을 하며 본격적으로 사회 계몽운동을 펼치며 최근까지 모임을 이끌었다. 대원각 소유주인 고 김영한 여사에게서 아무 조건 없이 기증 받아 현재의 길상사를 지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는 창건 당시부터 지난해 병세가 심해지기 전까지 법정 스님이 대중들과 직접 만나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왔다.
그러다 지난 2007년, 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아간 스님은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았다가 폐암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인들의 강권으로 이때 미국 유명 암센터인 ‘MD 앤더슨’에서 수술을 받지만 결국 올 초 재발하고 말았다. 지난 1월 말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한 법정 스님은 체중이 45kg까지 줄어 보기에 처참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입적하는 순간까지 맑았다. 법정 스님의 속가 조카인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에 따르면 입적하기 이틀 전에 “내 소원은 하루빨리 다비장 장작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단다. 결국 3월 11일, 법정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 돌아와 그 올곧은 수행의 삶을 마쳤다. 육신에서 영혼을 떠나보내고서야 생전에 단 한 번도 하룻밤 이상 머문 적이 없던 길상사에 비로소 몸을 누인 것이다.
법정 스님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무소유’라는 철학적인 단어가 함께 떠오른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신선 같은 언어를 가져보았던가. 이렇듯 법정 스님이 낸 수십 권의 대중서는 불가의 교리와 영혼의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쉽게, 그러나 깊숙이 간직하게 해줬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제 더 이상 길상사의 고즈넉한 절 마당에서 법정 스님의 고요하고 맑은 법문을 들을 수 없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바란다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주옥같은 저서도 더 이상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법정 스님의 모든 저작권을 위임받은 시민 모임 ‘맑고 향기롭게’의 김자경 사무국장은 “절판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며 사무국에 항의 전화를 하는 분들도 많다. 스님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또한 무척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어쨌든 스님이 유언을 남기신 만큼 출판사들과 함께 해법을 찾고 최선을 다해 유지를 받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제 그의 목소리도, 그의 책도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게 됐지만, 그가 우리 마음속에 남긴 족적은 맑고, 향기롭게 퍼져나갈 것이다.
법정 스님의 소중한 인연
종교를 넘어선 향기로운 우정, 고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은 타 종교와의 경계를 무너뜨린 선구적인 역할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수십 년 동안 맺은 인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층과 종교를 초월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1984년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 2백 주년 기념미사. 법복을 입고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스님이 십자가 아래 제단에 선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이 낯선 풍경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신도들을 향해 법정 스님은 초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2백 주년 천주교 기념 미사에 저 같은 미약한 사람을 이 제단에 세워주신 천주님 은혜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 후 법정 스님은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해 종교를 뛰어넘는 향기로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각 사찰에서는 성탄절에 플래카드를 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있다.
스님과 수녀님의 은은한 인연,
이해인 수녀
두 사람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해인 수녀가 출간한 첫 시집 <민들레 영토>를 친구의 권유로 법정 스님에게 보냈고, 법정 스님은 이에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수필을 쓰는 스님과 시를 쓰는 수녀님은 이 일을 계기로 이따금 왕래하며 친분을 다졌다.
“자신의 수행에는 엄격했지만, 좋은 문장을 지닌 수필가였고, 가끔 유머감각을 보이실 때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소년 같기도 하셨죠. 어느 날 편지로 ‘성베네딕도 규칙서’를 보내달라시기에 그리 해드렸더니, ‘내 지령에 즉각 응답해줘서 고맙소’라는 답장을 보내신 거예요. ‘지령’이란 단어에서 장난기가 느껴져 웃고 말았죠. 산에 사셔서 새 이름을 많이 아시던 스님은 ‘수녀님은 뻐꾸기밖에 모르시지요?’라는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놀리신 적도 있어요.”
법정 스님은 이해인 수녀를 세례명(클라우디아)에서 연상한 ‘구름수녀님’이란 별명으로 곧잘 부르곤 했다고 한다.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 모임 10주년 때는 이해인 수녀가 기념 축시를 썼고, 2005년 음악회에도 초대받았다. 이해인 수녀는 스님을 찾아갈 때마다 “공양 주세요”라고 했고, 법정 스님은 “성찬을 즐기십시오” 하면서 서로의 종교 용어를 쓰곤 했다
.
늘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모신 조카,
현장 스님
대원사 주지인 현장 스님은 법정 스님의 속가 조카이자 절집 조카로 늘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보필했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 혼자 살면서도 부처님처럼 쉰다섯이 될 때까지 시봉승(시중을 드는 제자 스님)을 곁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또, 사소한 물건이라도 두 개 이상을 소유한 적이 없을 정도로 청빈의 도를 지켰다.
투병 중에 현장 스님이 “앞으로 스님 뵈려면 어디로 갈까요?” 하고 물었더니 “불일암으로 와”라고 하더란다.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는데요”라는 현장 스님의 말에 “그럼 길상사로 와. 거기 오면 나 볼 수 있지”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위트 있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일곱 제자들 상좌스님들에게 남은 숙제는 무엇?
다비식에서 법구를 운구하는 상좌스님들
덕조에게는 10년 수행에 정진…….
덕진에게는 ‘신문배달부를 찾아라’ 특명
법정스님의 유지를 철저히 받들어 간소하고도 정성스럽게 치른 다비식이 훈훈한 화제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법정스님이 가르친 일곱 명의 상좌스님이 있다. 바로 덕조,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스님이다. 상좌스님들은 길상사의 주지를 맡고 있는 덕현 스님을 비롯, 길상사의 크고 작은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덕문스님은 재무를 맡고 있으며 덕진 스님은 총무, 덕일 스님은 포교를 맡고 있다.
3월 17일 초재일에 공개된 법정스님의 유언장에는 상좌들에게 당부하는 몇 가지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첫 번째는 덕조스님에게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하라는 당부였다. 덕조스님은 창건 당시부터 지난해까지 12년 동안 길상사를 이끌어온 주지스님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3월, 임기를 3년 남겨둔 채 주지소임을 내려놓게 되었다. 덕조스님은 ‘인연이 다하여 홀가분하게 산속으로 정진하러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이라며 절을 떠났고 후임으로 넷째 상좌인 덕현 스님이 주지를 맡아왔다. 초재가 끝난 직후 덕조스님은 법정 스님의 당부대로 바로 불일암으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주의를 끄는 점은 여섯째 상좌인 덕진 스님에게 맡겨진 소임이다. 법정스님은 유언장을 통해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전에 이에 대한 언질이 전혀 없었기에 신문을 배달한 이가 누군지, 머리맡의 책은 또 무엇인지 확실치가 않아 상좌스님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많은 이들은 1972년 출간된 법정스님의 저서 ‘영혼의 모음’ 한 구절에서 단서를 찾고 있다.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글을 쓸 당시 법정 스님은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고 있었는데 신문을 배달하던 꼬마는 지금쯤 5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다래헌의 신문배달 꼬마가 유언장의 ‘그 사람’인지도 분명하진 않다. 그러나 법정스님으로부터 직접 부탁을 받은 이상 덕진 스님은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신문배달부를 찾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by 트래블러 2010. 4. 25. 00:31
2007년, 열두 번째 아이를 끝으로 더 이상 낳지 않겠다던 서울 대표 다둥이 가족! 그런데 지난해 말, 이 집에서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사내아이가 또 태어났다. 열세 번째 아이다.
열두 남매의 부모로 유명한 남상돈(46)·이영미(44세)씨 부부에게 지난해 12월 29일 3.4kg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또 품안에 들어왔다. 얼마나 금슬이 좋길래 아이를 열 세명이나 낳았을까.
“금슬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이번 아이만 해도 거의 1년 만에 함께한 잠자리에서 생겼는 걸요.”

게다가 배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속으로 ‘임신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임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태어날 아이는 태어나게 마련인가 보다. 아직 막내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지만, 벌써 형,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큰 아이들이 동생을 잘 챙기고 있어요. 둘째 보라는 엄마 몸 추스르라고 새벽에 일어나 기저귀도 갈고 하더라고요. 큰아들 경한이는 동생들 방학이라고 역사책 읽기를 시키고 있고요. 웬만하면 가사나 육아 부담을 큰 아이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이렇게 알아서 잘해주니 엄마로서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첫아이를 가진 1988년만 해도 우리나라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가족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는 인구가 줄어들어야 선진국에 가까워진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이영미씨도 그 캠페인에 발맞춰 ‘경한이 하나만 낳아서 기를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 생명을 거부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느껴지는 행복함과 뿌듯함도 있었고요. 물론 힘들 때도 있죠. 하지만 제가 낳은 13명 아이들이 사이좋게 노는 모습을 보면 ‘내가 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저는 셋째 이후부터 각서를 쓰고 출산을 했어요. 만약의 경우 잘못돼서 자궁을 들어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죠. 다출산 산모의 경우에는 자궁 수축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위험한 경우가 곧잘 생겨요. 고위험 산모에 들어가죠. 많이 낳았다고 출산이 쉬워지는 게 아니라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죠.”
(사진 설명 글) 어떻게 그렇게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아요. 그때마다 제가 하는 대답은 한결 같아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세요’

집은 늘 어린이 놀이방, 그래도 행복해

요즘 저출산 문제로 사회 전체가 위기의식에 휩싸여 있지만 사실, 서울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교육비, 사회적 위험 비용 등 경제적인 문제도 문제거니와 불임부부가 늘면서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그래서 다둥이 가족으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KBS <인간극장> 등에 출연하며 다산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이영미씨에게 많은 사람이 고민을 토로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아요. 특히 아들을 낳고 싶어 하시는 분들은 엄청 부러워하죠. 그때마다 제가 하는 대답은 한결같아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세요.’ 이것뿐이거든요. 사실 저는 한 번도 아이를 몇 명 낳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들이 모두 어리던 6~7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편해졌다며 행복해하는 이영미씨. 다행히 2005년 제기동 전세방에서 지금의 임대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임대아파트가 다자녀 가족에게 우선적으로 분양된 덕분이다. 방이 3개라 하나는 부부가 쓰고, 나머지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 방으로 나눠서 쓰고 있다. 그래도 워낙 아이들이 많아 소란스럽고 부대끼기는 마찬가지이다.
“집 안은 늘 난리법석이에요. 자기 전에 한 번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 외에는 따로 잔소리하지도, 치우지도 않아요. 집이라기보다는 거의 놀이방에 가깝죠.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장난감이든 책이든 가까이에 두고 마음껏 꺼내 놀고, 읽고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교육에 관한 한 이영미씨는 완전히 자유방임형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첫째 경한이는 새벽 5시부터 깨워 공부시키고 밥 먹이고 학교 보내는 것까지 일일이 다 챙겼다고.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오로지 기댈 것은 육아백과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첫째, 둘째를 교과서적으로 키우다 보니, 부작용이 생기더란다.
“지금은 보라가 엄마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자기 키울 때 너무 엄격하게 규율과 규칙을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사회에 나가서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유연성이 좀 떨어지는 거겠죠. 그래서 교육방침을 바꿨어요. 육아를 오래 하다 보니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게 되네요.”

둘째인 보라양(21세)은 동생들을 잘 챙기는 든든한 누나로 TV에 얼굴이 알려지면서 몇 년 전 연예계에 데뷔했다. 처음부터 연예인이 되려는 건 아니었는데 기획사 사장님의 꼬임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단다.
“기획사에서 매일 보라네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었어요. 도넛을 30박스나 사가지고 학교 친구들에게 보라 이름으로 쫙 돌리기도 하고요. 결국 먹을 것에 넘어갔죠. 다행히도 지금은 연기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해요. 얼른 CF나 몇 개 잡아서 보라 덕분에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 좋겠네요.(웃음)”

동덕여대 방송연예학과 3학년에 다니면서 학업과 연예계 활동을 병행하는 보라양은 지난해부터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학비를 지원받고 있다. 2학년 등록금부터 6학기분을 지원받게 돼 이영미씨 가족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고.

이씨는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형제가 적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많은 형제들 틈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고. 그것 때문에 아이들을 이렇게 많이 낳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규칙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작은 사회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애들이니까 가끔 싸우기도 하죠. 저는 절대 끼어들지 않아요. 그럼 큰 애들이 알아서 중간에서 중재를 하고,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곤 다시 잘 놀아요. 컴퓨터 사용 같은 경우에도 일부러 규칙을 정해준 것도 아닌데 낮에는 작은 아이들이 사용하다가 형, 누나들이 오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더라고요.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같아요.”


한 달이 멀다하고 다가오는 생일도 자기네들이 알아서 챙긴단다. 가끔 엄마가 깜박하고 미역국을 못 끓여도 섭섭해하기는커녕 먼저 전화해서 케이크라도 사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형제가 많으니 오히려 부모가 손을 댈 일이 줄어드는 셈이다.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과 예의를 배우며 사회성도 기르고 협동심도 키우게 된다.

하나하나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보석들

아이들의 취향과 성격, 입맛도 다 제각각이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토마토케첩이 들어간 음식을 질색하는 아이도 있다. 한번은 점심때 미트소스스파게티를, 저녁때 샌드위치를 해줬는데 한 아이가 하루 종일 쫄쫄 굶은 것이다. 저녁에 아빠가 들어와 김칫국에 밥을 말아먹고 있으니 그때서야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학원은 잘 다니는지, 시험기간은 언제인지 챙긴다고 해도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달력에 적어놓고 들여다보기는 하는데, 너무 많다 보니 힘들죠. 그런 점에 있어 엄마로서 미안해요.”

이영미씨는 아이들에게 표현을 아끼는 편이다. 칭찬도 자주 하지 않는 편이고, 웬만한 일에는 야단도 잘 치지 않는단다. 엄마의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아이들을 배려해서다. 그렇다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1/13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13배로 늘어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다. 그래서 더 해주고 싶은 것도 많고 기대도 크지만 현실의 한계가 늘 발목을 잡는다.

서울시립대에 재학 중인 성실한 장남 경한군, 오는 6월 MBC 미니시리즈 출연을 앞두고 있는 탤런트 보라양, 엄마가 잘 챙겨주지 못해도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예비 고3 지나, 성격이 좋아 친구가 많은 진환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석우, 천재 소년 휘호, 동생을 잘 챙기는 세빈, 천방지축에 개구쟁이지만 말로는 누구도 이길 재간이 없는 다윗, 똑 부러지는 성격에 공부도 잘하는 세미, 춤을 잘 추는 소라, 자기 것을 잘 챙기는 경우, 이제 막내 자리를 내줘야 하는 열두 번째 아이 덕우, 그리고 또 찾아온 새로운 선물….

한 명, 한 명, 자식들의 이름을 꼽을 때마다 부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세종대왕은 6명의 부인이 22명을 낳아줬지만 엄마는 혼자서 22명 낳아줬음 좋겠다!” 어느 날 역사책을 보던 다윗이 한 말이란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하나 둘씩 사회에 진출하며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할 것이다. 남상돈씨와 이영미씨는 그날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어찌 보내나 싶어 아까울 것 같기도 하다. 먼 훗날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훌륭한 유산을 남겨줬는지 어려울 때, 기쁠 때 함께해주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우먼센스 3월호
취재 홍유진(프리랜서)
by 트래블러 2010. 4. 16. 01:38

21세기형 새로운 전문가,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수상자

리빙센스 | 입력 2010.03.05 13:00



블로그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도 이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주부 혹은 백수였던 사람들이 이제 21세기형 전문가로 각광받고 있다. 책보다 빠르고 알차며, 전문가들보다 쉽고 재미있게 정보와 뉴스를 전해주는 사람들.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를 수상한 4명 남녀를 만나보았다.

<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대상 >

출장 전문 해외 영업사원,여행이 직업이 되다

스무 살, 아무것도 모르고 떠난 동남아 배낭여행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지독한 여행 중독증. 대학 시절에는 물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해외 출장이 잦은 해외 영업사원이었기에 여행의 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래도 감히 여행가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지는 못했다. 여행은 어디까지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일 뿐이었으므로. 그런 그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직을 준비하며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블로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몇 달 쉬면서 여행하다 얼른 취직해야지,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일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닉네임 '김치군'은 PC통신 시절부터 써온 이름이다. 간간히 여행기를 올리던 홈페이지를 블로그로 옮기면서 김치군의 '내 여행은 여전히 ~ing'가 시작되었다. 공대 출신인 그는 남들처럼 감각적인 사진에 감성 가득한 여행 에세이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이 필요로 할 만한 실용적인 여행 팁 위주로 블로그를 꾸몄다. 알찬 정보와 매일 계속되는 업데이트는 많은 여행객을 블로그로 이끌었고, 방문객 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혼자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블로그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서 해외 관광청에서 초청도 들어오고, 여행 잡지 등에 원고도 기고하게 되었어요."

블로그 안에 설치해놓은 애드바로 벌어들이는 수입만 한 달에 40만~60만원. 올해 출판하기로 한 책만도 두 권이다. 이쯤 되니 다시 안정적인 직장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계획은 자꾸만 뒤로 미뤄지고 있다.

"취미로 시작한 블로그가 저를 여행 전문 블로거로 만들어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좋아하는 일로 돈도 벌고, 이렇게 상도 받으니까 무척 기분이 좋지만 가끔은 얼떨떨하기도 해요."

김치군, 정상구 씨는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에서 대상을 받았다. 네티즌이 직접 투표한 상인만큼 대중적인 인기도를 객관적으로 입증받은 셈. 사실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사람 치고 그의 블로그 한번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김치군'이란 이름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유명인이다.

"해외여행을 하는 도중에 한국 사람과 만날 때가 있는데 어떤 분들은 저를 알아보시더라고요. 마치 연예인 보듯 태도가 달라지는 걸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해요."

블로그를 방문하고 관심을 표하는 이웃들이 있기에 그는 혼자 여행을 떠날 때도 마치 항상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거 알려주면 좋아하겠지? 이런 장면을 어떻게 하면 잘 전해줄 수 있을까?' 등등 여행을 하면서도 포스팅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에 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광경은 사진으로도, 글로도 표현이 안 되었기에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고.

하루라도 포스팅을 거르면 마치 화장실을 가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찝찝하다는 정상구 씨. "내일은 일본 관광청 초청으로 시마타 현에 간다"며 상기된 표정을 짓는 서른 살 젊은 블로거의 미소가 싱그러웠다.

김치군의 '내 여행은 여전히 ~ing'(www.kimchi39.com)
2000년, 동남아로 첫 배낭여행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30여 개국을 누빈 김치군은 자타 공인 여행 중독자다. 여행할 때마다 후기를 올리던 기존 홈페이지에서 현재의 블로그로 보금자리를 옮긴 것이 2008년. 블로그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가 올린 알찬 여행 정보들은 순식간에 네티즌들을 사로잡았고, 이에 2009 티스토리 베스트 블로거,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좋은 사람, 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음식 세 박자만 갖춰지면 어느 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최고의 여행이 된다는 그는 지금도 여전히 여행 중이다.

<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문화 예술 부문 우수상 >

평범한 주부가 자타 공인 미술 전도사가 되기까지…

강은진 씨는 취학 전 두 딸을 키우는 가정주부다. 다른 주부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정도다.

"예전부터 미술사와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 취미였는데,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운 재미있는 이야기가 참 많았어요.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데 홈페이지를 만들기는 부담스럽고…. 때마침 블로그를 만난 거죠."그림 보는 것을 좋아한 그녀였지만, 특별한 꿈이 없었기에 대학에 가서도 취업이 잘된다는 전산을 선택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아 빠져들기가 어려웠고, 그럴수록 미술과 클래식 등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멈출 수 없었다.

"결혼 후 애를 낳고 나서도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했어요. 대학원에 들어가 '예술 경영'을 전공하기도 했지요. 그때까지도 딱히 뭐가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블로그를 하게 되기까지 좋은 준비 과정이 되었던 것 같아요."

보통 어렵게 생각하는 예술과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는 강은진 씨의 블로그 '아트 talk talk'의 방문객은 날로 달로 늘어갔다. 네이버 메인 화면이나 감성지수에도 여러 번 소개되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렇게 블로깅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이제는 전업주부가 아닌 '전업 블로거'가 되었고, 곧잘 인터뷰 요청을 받기도 한다. 아무래도 예술을 주제로 하는 블로그다 보니 하루 방문객은 1천여 명 내외에 불과하지만, 진심으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에 진정어린 소통을 나눌 수 있다고.

"블로그의 최대 장점은 이웃들과 즉각적인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가끔은 얼굴도 모르는 블로그 이웃들이 현실 속의 이웃들보다 가깝게 느껴져요."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가 이제 신문이나 잡지 등에 소개되기도 하고, 크고 작은 상을 받다 보니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책을 내자는 제의도 빗발쳐, 올해만 미술과 육아 등 여러 콘셉트로 세 권이나 출판 계약을 맺었다.

"저는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블로그라는 공간에 편하게 늘어놓듯, 예술 이야기도 그렇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의 포스팅을 보고 어떤 화가를 좋아하게 됐다는 댓글을 읽을 때마다 마치 중요한 일을 해낸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지죠."

아직 여섯 살밖에 안 된 딸 유진이와 함께 보내는 알콩달콩한 일상도 강은진 씨 블로그의 단골 소재.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유진이는 루소의 그림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좋아하는 그림을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보던 경험이 이제는 그녀만의 전문 자산이 되어 명화를 이용한 유아교육 책도 내게 되었다.

"저는 늘 꿈이 없었어요. 대학도 성적에 맞춰 들어갔고, 사회생활에서도 별다른 보람을 얻지 못했죠. 그랬던 저에게 블로그가 꿈을 찾아주고, 실현시켜준 거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꿈의 공간, 매력 있지 않나요?"

아트 talk! talk!(blog.naver.com/guarneri)
클래식 마니아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서양사와 철학, 미학까지 두루 섭렵했다는 자칭 '공부하는 줌마'.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생긴 궁금증이나 생각거리들을 블로그에 정리해놓기 시작했다. '이게 뭐가 잘 그렸다는 거야?', '책에 나오는 어려운 설명이 대체 무슨 소린가?' 등등 예술이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재미난 글과 그림으로 가득하다. 즉각적인 가십성 포스팅이 큰 인기를 끄는 요즘, '아트 talk! talk!'을 방문하는 네티즌들은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내고 있다.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에서 문화 예술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요리 부문 우수상 >

할머니를 사랑한 효녀,이제 블로그로 세상과 소통하다

블로그에서는 명랑하고 발랄한 젊은 여성으로 비쳤는데, 의외로 나이도 있고, 속도 깊다. 9년 전 사랑하는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집에서 간병인을 자처했을 정도로 박현진 씨는 마음씨가 고운 처녀다. "할머니께서 저희 삼남매에게 너무 큰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는 제가 당연히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분이 그런 결정을 한 저를 걱정하고 만류하셨었어요. '너 그러다 시집도 못 가고 집에서 돈 한 푼 없이 불쌍하게 살 거다' 이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죠."

그러나 박현진 씨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일하는 강한 여성이다. 할머니를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병수발을 선택한 그녀. 긍정의 힘이 이룬 쾌거일까. 당시 그녀를 불쌍하게 바라봤던 친구들이 이제 모두 부러워한다고 했다.

박현진 씨가 베이킹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단지 '할머니가 찐빵이 드시고 싶다'고 했다는 이유였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찐빵은 설탕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아 못 미더워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단다. 첫 시도는 성공이었다. 찜통 뚜껑을 열었을 때 보얗게 잘 부풀어 오른 찐빵과 만났던 순간, 그 황홀한 느낌을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부터 빠져들기 시작했죠. '다음에는 녹차가루를 넣고 해볼까?', '소금의 양을 늘려보면 어떨까?' 여러 가지 시도를 시작했어요. 물론 실패도 많이 했어요. 제가 한번 빠져들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스타일이라 모르면 알 때까지 변수를 달리하면서 수없이 시도했죠. 밀가루 성분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고요."

처음에는 자료 창고 형식으로 그녀가 반복한 시행착오와 레시피를 적어두는 용도였던 블로그가 점차 찾아오는 사람이 늘면서 역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내용인데도, 찾아와서 보고는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고, 저에게 베이킹에 대해 물으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저도 이제 막 배우는 단계였는데 말이에요. 내 레시피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블로그에 제가 만든 정보를 올리기 시작했죠."

할머니를 돌보느라 늘 집 안에만 있어야 했던 그녀에게 블로그는 세상을 향한 소통 창구가 되어주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온갖 찬사는 물론 칭찬 댓글들에 그녀는 더 힘을 내서 새로운 레시피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블로그가 이렇게 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오븐이 아닌 프라이팬과 밥통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흔한 요리 도구로 독창적인 요리를 뚝딱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었다.

"겁없이 달려든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한 번도 베이킹에 관해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주위에 잘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거든요. 정말 '글로 요리를' 배운 사람이었죠, 제가."

그녀가 프라이팬으로 만든 빅 파이는 포털사이트 메인에 올라가 단 하루 만에 수천 명의 새로운 이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올 초에는 백호 해를 맞아 백호 털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백호케이크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8년에는 그녀만의 노하우를 담은 베이킹 책을 출간했고, 요즘은 가끔 이곳저곳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그녀가 받은 가장 기쁜 선물은 바로 할머니께서 건강해지신 것이다.

"제가 늘 되뇌는 말이 있어요. '위기를 기회로'인데요, 정말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용기 내서 최선을 다해 극복하고 나면 그 일이 전화위복이 돼서 더 좋은 일이 생기더라고요. 할머니도 이제 건강해지시고, 저도 제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됐으니 정말 맞는 말이죠?"

콩지의 음식발기 - No 오븐 베이킹의 모든 것!(blog.naver.com/ohmytotoro)

오븐 없이 만드는 치즈케이크, 파이, 쿠키 등은 창의적이다 못해 기상천외하기까지 하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과자를 똑같이 따라 한 레시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전문적인 요리 강습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평범한 처자지만 인터넷 상에서는 웬만한 유명 요리사보다 더 큰 유명세를 누리는 '베이킹의 여신'이다. 2008 네이버 파워 블로그,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요리 부문 우수상을 탔다.

<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시사 부문 우수상 >

꿈이 없었던 청년,1인 미디어의 선봉자가 되다

미디어 몽구의 브랜드파워는 이제 여느 언론사 못지않다. 블로그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시점에 나온 '1인 미디어'라는 신조어는 이제 미디어 몽구를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호칭이 되었다.

김정환 씨가 처음 블로그를 하게 된 계기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파문 사건 때문이었다. 파문을 일으킨 황우석 교수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마침 가까이에 살고 있던 그는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카메라를 들고 취재진들이 깔려 있는 풍경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올리고 잤어요.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보니 그 영상을 본 사람이 글쎄 몇만 명을 넘어서는 거예요. 다음 아고라 뉴스에도 그게 올라갔는데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다고 상금까지 줬어요. 이거, 용돈벌이가 되는구나 싶었죠."

처음부터 거창한 포부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그는 가끔 축구를 즐기며 강아지 몽구와 평화롭게 사는 것이 전부인 평범한 20대 청년일 뿐이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재주라곤, 보조로 일하며 익힌 카메라 촬영 기술이었다. 용돈벌이나 하자고 생각했던 블로그는 오히려 스승이 되어 그를 세상으로 이끌어내고, 새로운 깨우침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점점 '기존 언론사가 미처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내가 찍어서 올려주자!'는 새로운 목표로 바뀌며 젊은 피를 뜨겁게 달구었다.

"제가 하는 일로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어요. 한번은 서울시에서 '응가방'이란 이름의 무인 화장실을 이곳저곳에 설치했는데, 아무도 이용하지 않아 애물단지나 다름없었죠. 그걸 찍어 올리고 개선 방향을 함께 적었는데, 그게 반영되어 명칭을 바꿀 수 있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다 보면 정말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처음엔 소속도 없이 혼자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눈빛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기존 기자들의 텃세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한때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수습기자가 하는 모습을 잘 관찰해봤죠. 선배들에게 인사를 엄청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도 다른 기자들께 먼저 인사도 건네며 점점 얼굴을 익히기 시작했죠."

방송이나 신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특종도 많이 잡았다.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네티즌들이 흥미 있어 할 만한 특종을 곧잘 잡아내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새로운 대안 미디어의 등장'을 이야기했다. 1인 미디어의 특징과 장점을 잘 살린 그의 활동에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름이 알려지자 유혹의 손길도 뻗어왔다. 돈을 얼마 줄 테니 홍보를 부탁하는 사행성 청탁부터,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은 그를 영입하려는 기존 언론사의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딘가에 소속돼서 일하다 보면 지금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을 잃을 것 같아요. 세상의 소식을 저만의 미디어로 네티즌들에게 전하는 기쁨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거든요. 처음 블로그가 대안 미디어로 촉망받을 때와는 달리 지금의 블로그는 많이 변한 것 같아요. 돈을 벌기 위해 블로그를 하는 분들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사 블로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또 분위기에 따라 뜨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하는 시사 분야의 특성상 요즘은 겨우 생활이 유지되는 정도밖에 수입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김정환 씨의 가장 큰 고민은 다름 아닌 다가올 지방선거 참여율이다.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를 비판할 자격이 없는 거거든요. 6월 2일 지방선거에 선거 열풍이 불어서 제발 많은 분이 투표에 참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바꾸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쉬운 일이니까요."

미디어몽구(www.mongu.net)
영상 취재를 전문으로 하는 시사 블로거.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풍경부터 사회적인 이슈로 뜨거운 현장까지 6년째, 싱싱한 소식을 영상에 담아 네티즌들에게 전하고 있다. 매일 취재거리를 찾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간다는 그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1인 미디어의 언론인이다. 2009 올해의 온라인 저널리스트,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시사 부문 우수상을 탔다.

사진|김외밀 진행|홍유진 (프리랜서)
by 트래블러 2010. 3. 15. 16:25
육체의 감옥에 갇혀 서서히 자신의 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참혹함.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고 하는 루게릭병. 그것을 10년째 함께하고 있는 부부가 있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오래된 아파트 외관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한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분주하게 일행을 맞는 아내 이희엽씨 뒤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듯 앉아 원고를 다듬고 있는 이원규씨의 옆모습이 보인다.
올해 나이 쉰.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원규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발가락으로 마우스를 컨트롤하며 기자가 미리 보낸 질의서에 답변을 쓰는 중이었다. 몸이 성한 사람도 힘들 것 같은 발 마우스가 그에게는 묘하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왼손에서 발가락으로 그의 병이 진행되는 속도에 쫓겨 지금의 위치로 이동해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혹자는 루게릭병을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고 한다. 지적 기능과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기관은 죽는 순간까지 명료하게 남아 있는 반면, 육체에서는 매일 근육세포가 사라져간다. 말 그대로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의 육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참혹한 것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점점 더 악화될 뿐, ‘언젠가는 나으리라’는 한 줄기 희망마저도 가져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말기암 환자라도 수술이나 각종 치료약을 통해 ‘투병’할 수 있지만 루게릭병 환자는 그저 병세의 진행이 조금이라도 늦춰지기를 바랄 뿐이다.
1999년 겨울에 처음으로 진단을 받았으니, 루게릭병 환자로 오롯이 10년을 살아낸 이원규씨. 일반 루게릭병 환자들이 발병한 지 5년 이내에 사망한다는 정설에 비하면 그의 병세는 무척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병마는 더딘 속도로 야금야금 그의 육체를 갉아먹고 있다. 72kg의 건장한 육체는 50kg도 안 되는 앙상한 몸으로 변했고, 교편을 잡고 카리스마 넘치게 학생들을 지도하던 두 손은 미동도 없이 그저 팔걸이에 놓여 있을 뿐이다.

아내의 도움 없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이원규씨. 그러나 사람 좋게 웃는 표정과 사려 깊은 눈빛을 보니 아직 그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발로 마우스를 컨트롤하여 다음 카페 ‘루게릭병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그가 운영자로 있는 인터넷 카페다.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언론 소개’ 게시판에서 2004년 인터뷰 기사를 보여준다. 그 당시, 루게릭병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몸으로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고, 굳은 손가락으로 자판을 쳐서 박사 논문을 따내, 큰 화제를 모은 그였다. 거기엔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의 지난 10년이 자료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처음 루게릭병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문도 모른 채 사형대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이원규씨에게 루게릭병이 나타난 시점은 1999년. 워낙 희귀병이라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몰랐다고 한다. 암 판정을 받을 때 세상이 모두 끝나버린 느낌이라면 루게릭병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사형대를 향해 암흑 속을 걷는 느낌일 것이다.
그의 책에는 “그래,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거야. 절망하기엔 아직 일러”라고 마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고 되어 있지만,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자유롭게 자판을 치던 두 팔이 마치 남의 팔인 양 축 늘어져버릴 때, 가족에게 하고 싶은 천 마디 말을 뱉지 못하고 희미한 미소만 지어야 할 때, 그의 절망감을 우리가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남자 나이 마흔, 사회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쳐야 할 때 끔찍한 선고를 받아들여야 하던 이원규씨. 그러나 그에게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한 문장은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해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는 단순히 생명을 이어가는 데 삶의 목적을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꿈꾸고 희망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병 전에 다니던 대학원을 계속 다니며 석사 학위를 따고 또 곧바로 박사 과정에 돌입했다. 병세가 더 심해지기 전에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조급증도 크게 작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사 학위를 따는 3년여 동안 자유롭게 책장을 넘기던 두 팔을 거의 쓸 수 없게 되었고, 키보드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손가락도 기능이 떨어져 마우스로 화상 키보드를 하나하나 찍는 식으로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렇게 쓴 논문으로 발병 6년차인 2004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와 같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바로 다름 아닌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리라. 그런 병을 앓고 있는 그가,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공부를 끝까지 해냈다는 건 엄청난 의지력과 노력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틈틈이 시를 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박재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어엿한 시인이다. 내년쯤 그동안 적어놓은 시들을 모아 시집으로 묶어낼 계획이다.
평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바칠 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이 이원규씨의 생각. 그의 가장 간절한 숙원은 무엇보다 다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발병 전,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삼던 그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가르침을 얻고 사회로 나가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비록 병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학생들 앞에 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안구마우스와 음성변환장치 등의 보조 공학기기가 있다면 불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자판으로 적어 넣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의 곁에는 늘 아내 이희엽씨가 있다. 사실, 아픈 남편 대신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네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고, 남편의 병수발에 현재 고등학교 1학년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두 아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한다. 인터뷰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종종거리며 남편 이원규씨를 눕혀주고 앉혀주고, 식사를 도와주느라 분주했다. 병구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올 초에는 위염에 식도염까지 겹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남편과 아이들 식사를 챙겨주는 게 일이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남편을 컴퓨터 앞에 앉혀놓고, 소변 줄 끼워주고 저도 출근을 해요. 그동안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집에 오셔서 집안일을 도와주시기는 하는데, 남편은 제가 올 때까지 거의 꼼짝도 못하고 있어요. 밤에 잘 때는 몸을 뒤척이지 못하니까 2시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줘야 해요.”
누가 보아도 초인적인 힘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그녀는 잘 웃었다. 그녀가 힘든 내색 없이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남편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언어 장애가 더욱 심해져 신음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이희엽씨는 사소한 의견 하나하나를 이원규씨에게 물어가며 결정한다.
이희엽씨는 모든 일을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는 이원규씨의 심정은 오죽하랴. 그가 가장 최근에 썼다는 시 ‘내 사랑 크리스티나’에는 그런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크리스티나는 이희엽씨의 세례명이다.
앞으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남편이 예전처럼 건강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거죠. 하지만 그게 힘들다는 건 아니까 지금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좋겠어요.”
그녀는 아직도 ‘기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다행히 최근 근육세포의 퇴화를 막아준다는 ‘유스뉴로솔루션’이라는 의약품이 개발되어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주고 있다. 이미 죽은 세포를 살릴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의 죽음만은 미뤄준단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루게릭병 환자를 전면에서 다루고 있다. 배우 김명민이 20kg을 감량해가면서 실감나는 연기를 해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개봉하면 남편과 함께 보러 가려고 하는데 주위에서 루게릭병 환자 역을 맡은 김명민이 결국 죽으면서 끝난다고, 보지 말라고 권하더라고요. 남편에게도 말했더니 ‘원래 다 그런 거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네요. 하긴 10년간, 먼저 간 환자분들을 많이 봐와서인지 이제 어느 정도는 그런 문제를 초월하게 된 것 같아요.”
영화뿐만 아니라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며 베스트셀러가 된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등 언젠가부터 루게릭병은 극적인 이야기 소재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삶은 누구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이원규씨는 그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참 잘 살아냈다.
“저도 루게릭병에 걸린 이후,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소외감 등으로 많이 괴로웠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고통의 끝이 결국 ‘죽음’뿐일지도 모른다는 캄캄한 절망을 마주할 때입니다. 사실,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기대는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와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이렇지만 마음만은 허물어지지 않고 미소를 띠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5년 출간한 자서전 <굳은 손가락을 쓰다>는 진솔한 문체와 내용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며 알음알음 팔려나가 벌써 8쇄까지 찍었다고 한다. 특히, 루게릭병 환자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건강한 사람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살아 있는 한 절대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그의 눈빛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남편을 믿고 의지하며 함께 병에 맞서나가는 아내 이희엽씨도 한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 나와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안다면, 세상 근심의 반은 덜어지지 않을까요? 저희요? 그저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일본 ALS(루게릭병)협회 하시모토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루게릭병을 20년째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장애인들을 위한 쾌적한 환경과 설비를 갖추고 있는 일본이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일는지도 모르지만, 병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얼마든지 내적인 평화를 지닐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원규씨 부부도 10년째, 루게릭병을 함께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점점 악화되는 병세 앞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이 부부가 바라고 소원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기사제공 우먼센스ㅣ진행 홍유진 기자ㅣ사진 전호성
by 트래블러 2010. 1. 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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