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걸고 가게를 연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린 시절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주재근 베이커리는 제과점 특유의 고급스러운 맛이 일품이었던 대표적인 동네 빵집이었다. 주재근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빵집을 오픈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경기도 광명의 한 아파트촌 입구에 자리한 주재근 베이커리 직영점은 고급스러운 앤티크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따뜻해 보이는 조명이 인상적인 제법 큰 제과점이었다. 이곳에 가게를 연 지는 8년째로 인터뷰를 위해 머무는 중에도 주부들과 가족 단위 손님들이 적지 않게 다녀갔다.
아랫목에서 발효시키던 반죽의 기억
“주재근 베이커리라는 이름이 워낙 오랫동안 불리어져서인지 실제로 저를 만나면 왜 이렇게 젊으냐며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할아버지인 줄 알았나 봐요.”

10여 평 남짓한 주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아 보였는데, 주재근 대표가 좋아한다는, 사용한 지 10년 넘은 단풍나무 작업대가 눈길을 끈다. 이 앞에서 그가 만든 빵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달콤한 시간을 선사했을까.

“물론 처음엔 먹고살 수 있는 기술 하나 배운다는 심정으로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이 일은 제 천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년 넘게 이 일만 해왔는데 아직도 빵 만드는 일이 이렇게나 좋으니 말이에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건 빵집을 열고 한길만 고집해온 덕분에 ‘주재근’이란 이름 석 자는 빵의 맛과 품질 보증서 같은 역할을 한다.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많이 밀렸다고 해도, 전국에 40여 개의 체인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의 이름이 가진 힘이 유효하다는 뜻일 게다.

물, 밀가루, 우유, 달걀이 제빵사의 손길을 거쳐 먹음직스런 빵이 되어 오븐에서 나올 때, 그 기분을 주재근 대표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만든 빵이라는 뿌듯함과 자부심뿐만 아니라 첫눈에 빵의 상태와 그 맛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제빵사는 장인정신으로 무장한다. 맛에 관한 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만 빵의 품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제빵 기계도 워낙 첨단화되어 많은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그렇게 나온 빵을 손님 앞에 선보일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제빵사의 몫이다. 빵이라는 것이 아주 작은 요소에 의해 맛이 좌우되기 때문에 제빵사는 늘 타협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릴 때도 많다고.

“오븐에서 빵이 나오기 전에 제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색과 냄새가 맞아떨어져야 해요. 그보다 약간 검게 나오거나 고소한 버터 냄새가 기준에 못 미친다 싶을 땐 전량 폐기하는 경우도 있어요. 조금씩 타협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빵의 품질은 떨어지고 맙니다.”
대를 잇는 1백 년 빵집을 꿈꾸며
주재근 대표가 이야기하는 제빵사의 중요한 미덕 중 또 하나는 늘 새로운 기술과 정보에 눈과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 그 또한 틈만 나면 유명한 해외 제과점을 둘러보며 새로운 빵이 없나 기웃거려 본다. 맛있는 빵이 있으면 제과장에게서 노하우를 알아보기도 하고, 한국에 사들고 와 직원들과 시식하며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오리지널과는 또 다른 풍미의 새로운 한국식 빵이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

지난겨울 일본에 출장 갔다가 롯폰기에 있는 초콜릿 전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날씨가 추운데도 초콜릿을 구입하기 위해 손님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단다.

“아무래도 초콜릿 제품이다 보니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실내에 있으면 온도가 올라가니까 제한한 것이었겠죠. 하지만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마케팅이나 할인 제도에 의존하는 판매가 아니라 정직하게 맛과 품질로 승부해도 알아서 손님들이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제과업계도 곧 그런 방식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자영으로 빵집을 운영해온 그로서는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에 의한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독과점 운영 방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동통신 제휴 카드 할인 폭이 20~30%에 이르자 자연히 소비자들은 저렴하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제과점으로 몰렸다. 이 때문에 가게마다 고유의 맛과 멋을 지키던 오래된 제과점들이 속속 문을 닫게 된 것. 이에 주재근 대표는 ‘이동통신사 제휴 카드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20%의 할인율을 10%대로 내리긴 했지만 최근에 다시 올라가고 있다며 거대 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토로했다.

“아무리 좋은 기계로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도 제빵사의 손끝에 담긴 정성을 따라가진 못하거든요. 진짜 빵맛을 아시는 분들은 분명 핸드메이드 빵을 선택하실 겁니다. 빵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젊은 사람들의 입맛과 유행에 따라 휙휙 바뀌는 빵집보다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오래된 동네 빵집이 더 유명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아닐까요?”

실제로 제빵 선진국에서는 지역마다 1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제과점이 있어 그 자체가 관광 상품화된다. 빵맛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 지역을 찾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빵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에서 빵이 대중화된 지도 이제 오래되었잖아요. 경주 황남빵이나 천안의 호두과자는 웬만한 휴게소에서 다 판매하는 유명한 빵이 되었죠. 설악산 단풍빵이나 울릉도의 호박빵도요.”
주재근 대표 또한 한 지역에서 오래 장사를 하다 보니 엄마를 따라 수줍게 크림빵을 고르던 꼬마가 어느새 훌쩍 자라 월급으로 빵을 사가는 모습도 보게 된다며 웃었다. 마치 언제고 변함없는 집 밥의 정겨운 맛처럼, 동네 빵집의 가치가 귀한 것은 이렇듯 한자리에서 변함없는 맛을 제공한다는 점일 것이다.

주 대표의 장녀인 주하영 씨도 올해 초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인 미국 CIA 요리학교에 들어가 제빵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며 주 대표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어쩌면 우리도 꿈꿔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1백 년 혹은 2백 년의 긴 세월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대를 이어 빵을 만들어내는 전통 있는 빵집을. 아홉 살 때 먹었던 달콤한 쿠키를 일흔 살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지극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코맘 윤아영의 행복론  (0) 2010.11.22
도쿄팡야 후지와라 야스마 사장  (0) 2010.09.08
기욤베이커리 에릭 오세르 제과장  (0) 2010.08.18
김치명인 강순의 여사  (1) 2010.07.23
김연신 한국선박금융 대표  (1) 2010.07.23
by 트래블러 2010. 8. 29. 17:05
언젠가 파리에 갔을 때 먹은 크루아상의 맛을 기억하고 있다. 본토에서 먹어본다는 감격도 있었겠지만 갓 구운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빵의 식감과 뼛속까지 나른하게 만드는 아찔한 버터 향이 그야말로 천상의 기쁨 같았다. 이런 빵을 매일 먹을 수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많은 사람에게 프랑스빵은 그저 국적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다. 때문에 정통 프랑스빵을 추구하는 기욤베이커리가 1년 반 만에 정상 궤도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일 터였다.
프랑스 정통 빵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기욤베이커리가 위치한 한남동 유엔빌리지 근처는 외국의 소도시와 같은 한적함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빵집에 들어서니 오렌지 빛 조명 아래 금방 화덕에서 꺼낸 듯한 커다란 통밀빵과 바게트가 낯선 손님을 반기는 듯했다.

KTX 프로젝트 건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한 엔지니어 출신 기욤 디에프반스 사장이 ‘프랑스빵이 너무 먹고 싶어’ 문을 열었다는 기욤베이커리. 프랑스 빵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다.

프랑스에서는 블랑제리(제빵)와 파티세리(제과) 두 분야로 명확하게 나뉘는데, 개점 초기에는 블랑제리 중심이었던 기욤베이커리가 지난해 프랑스 출신 파티셰 에릭 오세르 셰프를 영입하면서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유명 호텔 등에 근무하면서 미슐랭 스타를 두 번이나 받은 실력파 파티셰로, 그가 선보인 마카롱과 에클레르 등의 화려한 디저트 라인은 기욤베이커리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지만 기욤 사장의 설득은 묘하게 그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결국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지난해 가을부터 한국 생활을 하고 있다.

“프랑스, 뉴칼레도니아, 튀니지, 모로코, 뉴질랜드, 일본,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프랑스빵을 만들어왔어요. 현지 사람들의 입맛과 정통 프랑스빵을 접목시켜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즐깁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밀빵처럼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약간 신맛이 나는 빵을 좋아한다는 에릭 셰프. 그러나 부드럽고 안에 소스나 양념이 들어간 빵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취향을 알기에 여러 모로 연구를 하고 있단다. 워낙 도전을 즐기는 성격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적응하고 즐겁게 지내는 편이지만 한국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행복하다며 커다란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국은 발견할 게 많은 나라입니다. 사람들도 자기 삶을 즐기면서 사는 것처럼 보여요. 프랑스인이 일을 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사람만큼 자기 삶을 즐기지는 못하거든요. 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상당한 것 같아요. 처음 보는 음식에도 크게 경계심을 갖지 않아요.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감자튀김만 지겹게 만들었다니까요.”

어느 나라에 가든, 에릭 셰프는 그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으로 시작해 점점 한 단계씩 프랑스 정통 빵에 가까운 형태로 변형시킨다. 그 단계 속에서 점점 정통 프랑스빵의 매력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꼭 프랑스빵만이 아니라 모든 빵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재료입니다. 유기농 밀가루와 정제된 물, 좋은 소금 같은 것들요. 최고의 재료가 있어야 최고로 맛있는 빵이 탄생하는 법이죠. 그래서 항상 직접 재료를 확인하고 쓰고 있습니다.”

그가 매일 출근해서 빵을 만드는 주방은 기욤베이커리 옆 건물 지하에 있었다. 오후에 백화점에 납품할 제품이라며 에클레르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그가 주방에서 작업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것은 그날그날 달라지는 작업 여건이다. 바깥 날씨는 어떤지, 실내 온도와 습도는 얼마인지를 체크하고 그에 따라 물의 양을 조절하거나 온도를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연 발효가 생명인 프랑스빵은 특히 온도에 따라 발효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할 부분이라고.

주방 이곳저곳을 안내해주면서도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 사양의 한국 전자제품이 필수죠”라며 연신 립 서비스를 한다. 실제로 거의 모든 제품이 한국 제품이지만 커다란 반죽 기계와 물 냉각기는 프랑스밖에 없다며 넌지시 일러주기도 했다. 이렇게 평소의 에릭 셰프는 미소를 잃는 법 없는 유쾌한 모습이지만 주방 안에 들어가면 180도 달라진다. 이는 프랑스 제과인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직원들의 사소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 최고의 빵맛을 내기 위해 철저한 프로 정신은 필수 조건인 듯했다.
고소한 캄파뉴 속에 숨은 작은 프랑스
에릭 셰프에게 손님에게 들은 찬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국수주의자(chauviniste)라 프랑스에서 먹던 맛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가 제일 기분이 좋더라”며 크게 웃더니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맛은 ‘기억’이거든요. 파티셰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곧 세상에서 사라질 허망한 작품들이죠. 미술이라든지, 책이라든지, 모든 창조물은 실체가 있지만 빵은 그렇지 못해요. 오직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빵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파티셰들에게는 반드시 철학이 필요합니다.”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따금 예술 작품 못지않은 외양과 맛을 선사하는 빵이나 디저트를 본다. 하지만 이런 음식들은 모두 사라지기 위해 세상에 나온다. 다만 빵을 먹었던 날의 기분, 함께 먹었던 사람들과의 행복한 대화, 장소 등이 기억에 남아 그 맛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뇌 언저리에 각인되는 것이다. 파리 중앙역에 서서 먹었던 크루아상의 버터 향이 아직까지도 프랑스인들을 부러워하는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에릭 셰프가 말하는 파티셰의 철학이란 항상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직접 수입한 유기농 밀가루 등의 좋은 재료, 수고롭지만 먹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아날로그적 조리 과정 등 그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특별한 가치임에 틀림없었다. 남은 건 초심을 지켜가는 일.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늘 집에서 바게트나 호밀빵을 만들어주셨어요. 요리 솜씨가 좋기도 하셨지만, 그 맛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사실 프랑스인들에게 빵은 주식이라기보다 일상의 향신료에 더 가까워요. 무엇을 먹든,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식사를 하든 빵이 늘 가까이에 있거든요. 와인과 함께 먹어도 좋고, 꿀이나 치즈를 곁들여 먹을 수도 있으며, 식사를 끝내고 접시를 빵으로 훑으며 만족스러운 음식의 여운을 느끼기도 하죠.”

그래서 프랑스빵은 심플하고 담백하다. 가장 자주, 가까이에서 접하는 음식이기에 먹기에 부담스럽지 않으며 깔끔해야 한다. 그리고 행복을 선사할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 기욤베이커리의 대표 빵이라며 보여준 늙은 호박만 한 캄파뉴(통밀로 만든 발효빵)를 보니 비로소 프랑스인들이 즐기는 빵 문화가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듯했다. 한입 물어보니 투박한 겉껍질은 정제되지 않아 딱딱하고 거칠지만 속은 발효 향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듯 싱그럽고 쫄깃했다. 분명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달콤한 카페라테나 라즈베리잼, 고소한 버터가 함께 연상되며 어느새 꿀꺽 군침이 돌았다.

“빵집은 그 집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 해요. 프랑스의 빵 맛도 중요하지만 기욤만의 맛을 만들고 싶어요. 그 맛을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히 빵을 먹고 난 후 행복했던 기억일 테니까요. 사람들에게 그런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쿄팡야 후지와라 야스마 사장  (0) 2010.09.08
주재근 베이커리 주재근 대표  (0) 2010.08.29
김치명인 강순의 여사  (1) 2010.07.23
김연신 한국선박금융 대표  (1) 2010.07.23
패션칼럼니스트 심우찬  (0) 2010.07.02
by 트래블러 2010. 8. 18. 02:32
생명의 음식을 만드는 종부의 손길
초여름의 햇살은 뜨겁고 순정하다. 그대로 흙 속에 스며들어 금방이라도 생명 하나를 틔워낼 기세다. 낮은 담 너머로 그 햇빛을 오롯이 받으며 일행을 맞던 강순의 여사의 인상도 그랬다. 아담하지만 복스러운 인상이 죽어가는 것도 살려내고 남에게 받기보다는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종갓집 맏며느리 그 자체다.

강 여사의 안내를 받아 집 구경부터 시작했다. 붉은빛이 도는 베이지색 단독주택 안에 들어가 보니 과연 전통 음식을 하는 이답게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1층은 부엌과 응접실, 지하에 교육장을 마련해두었고, 2층은 남편과 둘이 오순도순 사는 살림집으로 꾸며놓았다.

강순의 여사는 한국 전통 김치의 맛을 가장 잘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는 김치 전문가다. 그 손맛이 얼마나 소문이 났으면 2000년부터 서울시농업기술센터로부터 전통 음식 교육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난해 마련했다는 경기도 광주 오포의 새 거처에는 40평 규모의 교육장과 일정 온도를 유지해주는 장아찌 보관고까지 갖췄다. 부엌과 창고 곳곳에는 대형 김치냉장고 열댓 개가 자리하고 있어 살림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뒤뜰 한편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묻혀 있는 수십 개의 항아리 속에는 7년 된 묵은 김치부터 연도별로 담근 김치가 가득 있고, 그 곁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을 담은 장독 1백여 개가 열을 지어 오롯이 햇빛을 받으며 숨 쉬고 있다. 이사하는 데만 한 달 반이 걸렸다며 고개를 휘휘 젓는 강 여사의 고생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직도 나주에서 못 가져온 장독이 반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고작 280ℓ짜리 냉장고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개 초보 주부는 감히 상상도 못할 큰살림임에 분명하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강순의 여사는 일행을 끌고 “덥다, 더워!”를 연발하면서도 교육장, 보관고, 그릇방, 주방 등등을 살뜰히 보여주었다. “수업하고 바로 온 거여. 바빠서 인터뷰하자는 걸 다 관두자고 했는데 여기는 어떻게 날을 잡았으까?” 충청도와 전라도의 언어가 뒤섞인 구수한 사투리가 퉁명스러운 듯 친절했다.

매주 금요일에 자택 교육장에서 오전/오후 반으로 나눠 50여 명의 수강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외부 강의가 쇄도해 눈코 뜰 새 없다는 그녀.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고된 살림을 다 짊어지느라 이젠 여기저기 고장도 나건만, 원천을 알 수 없는 에너지는 그녀를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게 한다. 이날만 해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텃밭에서 일하다 광주 시내에 가 서 강의를 하고 돌아온 참이었으니 말이다.
“자네들만 아니면 지금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일할 시간을 잠시라도 빼앗긴 것이 영 아쉽다는 듯 텃밭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각한 일중독임에 틀림없었다. 바쁘게 동동거리는 강 여사를 자리에 앉히고 김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름에 빨간 김치는 맛이 없어. 굵은 고춧가루 듬성듬성 갈아 넣은 물김치가 맛있지.”
“김치가 맛있으려면 다섯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돼. 첫째는 적당히 잘 익고, 둘째는 익을 때까지 배춧잎이 초록색을 유지해야 되고, 셋째는 군내가 나지 않아야 하고, 넷째는 무르지 않고 아삭아삭 씹혀야 하고, 다섯째는 사이다같이 톡 쏘는 맛이 나야 돼.”
“그렇게 다 갖춘 김치가 없어.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로 어려운 음식이야.”
“진짜 전문가는 우리같이 시집살이하면서 몸으로 직접 배운 사람들이야. 그걸 알아줘야 되는데, 그저 예쁘고 사근사근한 여자들만 좋아하지. 내가 진짜야.”

김치 이야기만 해도 사흘 낮밤이 모자랄 것 같았다. 조신한 종부 이미지만 생각했더니 웬걸, 억척스러운 전라도 아줌마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가 투박하니 귓가에 쏙쏙 박히는 게 왜 그녀가 김치 요리 전문가로 인정받는지 알 것 같다. 그간 그녀를 거쳐간 학생만도 수천 명에 이른다. 하지만 최근 몇몇 제자가 그녀로부터 배워간 김치를 마치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매스컴에 흘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며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92년도에 내가 김치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는 고추씨 김치에 대해 아무도 몰랐어. 왜냐면 우리 집안에서 대를 이어 내려온 김치니까. 그걸 가지고 식당까지 열었을 때도 난 아무 말 안 했어. 그런데 TV에 나와서는 자기네 친정엄마가 가르쳐줬다고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 안 그래?”

당장 잘못을 정정하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묵묵부답인 탓에 속상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도 올렸다. 그녀가 원한 것은 사실대로 인정하기를 바란 것인데, 일이 결국 이렇게 돼 그녀는 최근 집안 음식인 ‘고추씨 백김치’로 특허 신청을 내기도 했다. 그저 맛있는 김치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 특허를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오랜 시간 만들고 가르쳐온 집안의 김치가 다른 포장을 하고 돈벌이로 이용된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섭섭했던 것이다.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 마음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남편 나도균 씨 역시 외아들이다. 시할아버지는 참봉으로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고, 시댁은 나주시를 통틀어 손꼽히는 갑부였다.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 고조할머니는 자기 땅만 밟다 돌아가셨다잖아.”

그러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 나이 30대 때였다. 안정적인 교사 자리를 그만둔 남편은 시골 땅을 팔아 사업을 시작했다. 오락실, 사진관 등등 안 해본 일이 없지만 받을 돈 못 받고,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챙겨주는 성격에 시작하는 사업마다 족족 망했다.

“2년에 한 번씩 꼭 한 탕을 하더라니까. 어떡해. 내가 나서야지. 하숙도 하고 식당도 하고, 길거리에서 장사도 해봤어. 새벽에 애 낳고 아침에 바로 일하러 나간 적도 있으니까….”
뭐니 뭐니 해도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재주는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음식 솜씨였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 소개로 알음알음 폐백과 이바지 음식을 조금씩 해줬다. 그러자 사람들은 종가의 음식 맛을 알아봤다.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던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서비스로 끼워준 장아찌와 김치는 더욱 인기를 끌었고, 급기야는 이 맛을 어떻게 내느냐며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시에서 전화가 왔다. 강의 요청이 쇄도한다며 올라와서 장아찌 담그는 법 좀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김치와 장아찌 전문가로 가르치는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어느새 20년이 되어가고 있다. 음식 시집살이를 오롯이 겪어낸 종갓집 맏며느리, 가정 경제를 책임지던 억척 주부, 이제 한국 음식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남편의 사업이 안 풀리던 시절, 매년 수천 포기씩 담그던 김장을 못하게 됐을 때”라고 주저 없이 꼽는 강순의 여사. 그녀에게는 지독한 생활고보다 종갓집인데 김장을 하지 못해 사람들과 나눌 수 없었던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던 것이다. 마늘 자르는 기계에 절단돼 검지 길이만큼이나 뭉툭해진 가운데손가락, 고된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허리와 다리. 소문난 살림꾼 강순의 여사가 되기까지 겪은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가 그녀의 손끝에 착실히 배어 결국은 김치 맛으로 우러난 게 아닐까 싶다.

예순넷 그녀가 소화하는 일의 양을 보면 누구라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하루에 수백 명의 식사를 챙겨 보내는 것쯤은 그녀에게 일도 아니다. 며칠에 걸쳐 김치 2천 포기를 혼자 담그기는 것은 기본, 거기에 들어가는 멸치젓, 가자미젓, 게젓 등 수십 가지의 젓갈 모두 싱싱한 재료만 엄선해서 직접 만든다. 그뿐인가. 텃밭 농사를 직접 짓고, 2백여 개 항아리의 된장과 고추장을 담그고 관리하면서도 이건 언제 만든 것이고, 언제쯤 퍼 올릴 것인지 하나도 빠뜨리는 법이 없다. 이래서 종갓집 맏며느리는 타고나야 하나 보다 싶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게도 시집살이로 눈물바람이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음식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타박 받은 일이 없었다고.

“음식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으니까. 시어머니는 내가 한번 가르쳐주면 다 잘한다고 했어. 한번 가르쳐주곤 다 나한테 맡겨버렸으니까. 양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힘들었지. 울기도 많이 울고. 매 끼니 밥을 가마솥으로 세 솥은 해대야 했어. 음식이라 할 것도 없지. 된장국 아님 김칫국. 거기에 김치가 다였어. 머슴들한테 주는 김치는 하얀 거나 돼? 시퍼런 거. 근데 그 김치가 참 맛있었어. 고추씨 백김치도 거기서 나온 거야.”

그녀가 알고 있는 음식에 대한 거의 모든 지혜는 시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이라 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로부터,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로부터, 그렇게 2백여 년을 내려온 나씨 집안 여자들의 음식 솜씨는 어떤 재화나 물건보다 더 소중한 집안의 가보였다.

“시어머니? 반은 남자야. 통이 크고 못하는 게 없었어. 동네에 큰 잔치나 행사가 있다 하면 시어머니가 혼자 가서 다 하고 오셨어. 나주에서 우리 어머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니까?”
간장, 고추장, 된장만 있으면 무엇이든 맛깔나게 뚝딱 만들어내는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그야말로 마술 같았다고. 어떤 요리를 해도 쉽게, 자연 그대로의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내는 재주는 그대로 강 여사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이 나한테 김치 만드는 비법이 뭐냐고 자꾸 묻는데, 사실 비법이 뭐 따로 있어? 시집와서 4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음식해서 남들 퍼주면서 그렇게 살았어. 학원 가서 잠깐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쫓아와?”

그래도 뭔가 특별한 재료가 있지 않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더니 못이기는 척하며 멸치가루, 톳, 다시마 육수, 콩물, 새우가루 등 독특한 김치 재료 명단을 끝없이 줄줄줄 읊어준다. 그뿐 아니다. 대추고추장, 감고추장 등의 다채로운 장 종류, 김부각, 연부각, 아카시아부각 등 모두 시어머니로부터 배웠다는 저장 음식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있다. 한참 얘기하다가도 문득 “나씨 집안 비밀인데 너무 많이 얘기해준 것 같다”며 크게 웃는다.

“이제 내가 죽으면 없어지잖아. 며느리 얘기는 하지도 마. 음식에 관심도 소질도 없어. 뭐, 시집살이를 대물림해주고 싶지도 않지만. 아직 장가 안 간 셋째 아들, 요 녀석이 데리고 올 색시만 기다리고 있는 참이야.”(웃음)

그녀가 손으로 쭉 찢어 입에 넣어준 고추씨 백김치는 아삭아삭 입 안에서 자연의 노래를 만들어냈다. 짜지 않고, 시원하고, 감칠맛까지 맴도는 이 김치, 너무 맛있어서 다른 이에게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인터뷰 중에도 몇 번씩 강의 요청 전화가 이어지고, 바쁘고 힘들다면서도 강의를 해달라는 곳은 거의 거절하는 법이 없다. 배우고 나가서는 딴말을 일삼는 제자들이 징글징글하다면서도 김치 맛을 궁금해하는 주부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맛있는 김치를 먹게 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그녀의 손끝은 마를 날이 없을 것 같다.
by 트래블러 2010. 7. 23. 00:36
일찍 피었다 사그라지다
처음엔 작은 오만 같은 거였다. 조금만 머리를 잘 쓰면 백일장 장원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3년 내내 전국대회 규모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휩쓸었다. 경기고 근방 10km 이내 학교에서 ‘김연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여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하교할 때면 “쟤가 이번 성대 백일장에서 장원한 김연신이래”라는 속삭임과 동경의 눈빛이 따라다녔다. 다 지난 일이지만, 뭐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조기 발화’를 하고 보니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 금세라도 들킬 것 같은 조마조마함이었다. 내가 진정 시인일까? 어쩌다 우연히 상을 탄 게 아닐까? 내가 과연 엘리엇의 ‘황무지’ 같은 시를 쓸 수 있나? 진짜라면 이 정도 시는 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오만함과 두려움의 경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지러운 시절이기도 했다. 고대 재학 시절에는 긴급조치 7호를 유발한 주동자로 찍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고, 군대를 갔다 오니 대학에서 받아주지도 않았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자발적인 가난으로 시인입네 행세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원대한 꿈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대우조선에 입사해 20여 년간 철저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다.

회사 밖에 있을 때는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는 시인으로 살았다. 꿈속에서도 시를 썼다. 새벽같이 출근해 8시가 되기 전까지 시상을 정리하는 시간은 그지없이 달콤했다. 그러나 8시 정각이면 시인인 나를 무서우리만큼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덕분에 직장에서는 남들보다 빨리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다. 대신 아주 가끔, 1년에 한 번 정도 술을 아주 많이 마실 때면 뭐가 그리 서러운지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동료들은 ‘저거 일 때문에 힘들어서 주사 부리는구나’ 생각했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분리된 자아로부터 오는 강렬한 스트레스가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부하 직원들을 앞에 열 지어 앉혀놓고 ‘왕년에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무용담을 태연히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조금은 서글픈 심정으로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라고 되뇌었다.
피었다 진 자리를 바라보다
결국 나는 그동안 써놓은 시 몇 편을 들고 20년 지기이자 소설가인 이인성을 찾아가 선언했다.
“나 이제 시집 좀 내야 되겠다”
인성이는 “등단을 해야 하는데…” 하며 난감해했다. 왕년에 잘나갔던 ‘문청’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조심스러웠을 게다. 다행히 정과리 교수의 추천으로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할 수 있게 됐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문단으로 돌아온 나를, 많은 지인이 “너 어디 갔다 돌아왔냐?”며 반겨주었다. 시인 황지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땡중이라면 넌 저잣거리의 머리 긴 중”이라고.
그러나 시집을 내고 나서도 한동안 ‘내가 시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답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첫 시집 <시를 쓰기 위하여> 이후 <시의 바깥에서>, <시인,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나의 존재론적 고민은 계속되었다.

밖에서 나는 여전히 그저 시를 좀 쓰는 ‘CEO’일 뿐이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내면으로는 이렇듯 존재론적인 고민에 사로잡혀 방황하고 있었지만 회사에서의 내 모습은 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철저한 기업인의 모습이었을 테니. 그런 사람이 갑자기 등단을 하고 시집을 냈으니 별난 CEO의 외도쯤으로 보였으리라. 그들에게 나는 절대 시인일 수 없었다. CEO가 아니었다면, 절대 주목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상 첫 시집이 나왔을 때도, 기쁘지 않았다. 2004년 시집 <시인, 시인들>의 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책이 (내가 쓴 글들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섭다. 내 몸속에서 나온 것들끼리 여기저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무섭고, 그들의 치켜뜬 눈이 당신을 쳐다보기 시작하는 것이 무섭다.”
다만, 꽃의 마음으로 살 뿐
최근 출장을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김덕규 시인의 ‘772천안함 수병은 귀환하라’는 시를 읽으며 울었다. 좋은 시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시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다 보니, 이제는 어떤 결론에 서서히 도달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이 따로 없고 잘 쓴 시와 못 쓴 시가 없다는 것,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는 진솔한 시와 그렇지 못한 시가 있을 뿐이라는 것. 낙원상가에서 조잡하게 만들어 파는 2만원짜리 바이올린이라고 해서 악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음악에 대한 절실함을 안은 이가 켜는 싸구려 바이올린 소리가 아무렇게나 켜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보다 못할 리 없다는 말이다.

이제는 CEO의 자리에 올라 비교적 여유가 생겨서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철저히 이중으로 쪼개지 않는다. 시인으로서의 교만과 시인 아님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마음도 비로소 편안해졌다.

돈을 버는 요령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남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먼저 도와주면 돈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단지 남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필요로 하는지 볼 줄 아느냐 모르냐의 차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기업에도, 사회에도 통용되는 개념이다. 내가 하고 있는 금융조선업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선박을 만들 돈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투자처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을 연결해준 ‘선박 펀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투자를 받아 선박을 만들고 선박을 운용한 수익금을 투자자들에게 분배하는 펀드로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실물 펀드의 모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또 개인적인 꿈도 이루었으니 충분히 행복한 삶 아니냐고. 그러나 누구에게나 캄캄함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각자의 문제다. 일하는 재미에 취해 그저 하루만 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러다가도 가슴속 깊이 묻었던 꿈을 다시 꺼낼 용기 있는 이가 될 것인가 그 차이일 뿐이다.

요즘 나는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도는 리듬의 예술이다. 밀고 당기고, 적재적소에 힘을 주고, 상대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비록 늦은 나이지만 전국 대회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수학의 정석>을 한 권 사서 책상 한쪽에 두고는 생각이 막힐 때마다 한 문제씩, 천천히 풀어본다. 수학은 정신의 요가라고 생각한다. 학교 다닐 때는 점수에 집착하느라 몰랐는데, 정말 매력 있고 재미난 학문이다. 한 문제를 붙들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포기하지 않고 풀다가 기어코 정답을 찾아냈을 때의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앞으로는 또 무엇을 할지 즐거운 고민이다. 오토바이를 살까,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할까?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재미있게 생겨먹지를 않았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라도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살아야 한다. 당신이 시인이든, 직장인이든, 어머니든 간에 한정된 삶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찾기를 바란다. 가슴속 깊이 넣어두었던 뜨거운 꿈을 다시 찾기에 늦은 나이란 없으니까.
by 트래블러 2010. 7. 23. 00:23
| 1 ··· 3 4 5 6 7 8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