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쪽빛, 장인의 손길에

하늘마저 빛을 내주네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 정관채

훈기를 머금은 북풍이 불어온다. 쪽빛의 명주천이 정신없이 흩날리는데 그 가운데 선 장인의 손길은 가만가만, 정갈하기 그지없다. 자연에서 색을 뽑아내는 사람, 정관채 염색장의 여여한 색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Edit. Hong you-jin |Photo. Oh choong-seok

손에 손을 거쳐 쥐어진 쪽씨 한 움큼

장인의 안내로 나주천연염색문화관을 둘러본 후 근처에 있는 그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공방 한 편에서 그의 부인 이희자 여사가 단아하게 앉아 쪽수건을 다림질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집채만 한 항아리들이며 재료를 쓰일 조개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작업장 바로 뒤에는 장인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황토집이 정겹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이 무서운 기세로 먹구름에 뒤덮이나 했더니 황톳집 뒤편을 아늑하게 감싼 대숲에서 잎사귀 부딪는 소리가 분주하게 들려왔다.

“나주 샛골은 예전부터 쪽 염색으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쪽풀이 홍수에 강해요. 영산강 물이 해마다 범람을 해서 쪽 외에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거든. 온 마을 사람들이 길쌈을 하고 목화 농사나 쪽 농사를 지었다고 해요.”

‘샛골나이(샛골에서 무명 짜는 일을 통칭하는 말)’라는 고유명사가 생겨날 정도로 그의 고향인 나주 샛골은 길쌈과 천연염색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어린 시절 그도 길쌈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베틀 아래서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았다던 쪽풀은 60년대 무렵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성염료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70년대에 들어서고 좀 먹고살만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다시 찾기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셨던 예용해 선생님께서 어렵사리 쪽씨를 구해 오셨어요. 전통 천연염색기법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수자를 찾으시다가 당시 저의 대학 스승이셨던 박복기 선생님을 통해 저에게까지 온 거죠.”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쪽씨가 손에 들어왔을 때 느낀 장인의 사명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쪽 농사를 시작했고, 그게 삼십 년 천연염색 한 길을 걷게 된 시작이었다.

“주위에서는 모두가 반대했지. 옛날에는 염색쟁이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옛날 어른들도 염색을 하긴 했지만 먹고 살기위해 한 것이었으니 내가 갖고 있던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시작하긴 했으나 당시엔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다, 무엇보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염색한다는 게 육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무척 힘들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간 쪽물이 손끝에서 빠질 날 없이 한길만 걸어온 것은 아름다운 색을 만드는 일이 너무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시간과 햇빛과 바람의 힘으로 완성된 쪽빛

이른 새벽, 쪽밭에 나가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풀을 베어 담는다. 소쿠리에 가득 담은 쪽풀의 빛은 일반 풀의 초록색과 다르지 않다. 장인의 정성과 기술을 담아야 비로소 남색과 하늘빛을 섞어놓은 듯한 오묘한 쪽색이 탄생한다.

“수많은 색 중에서도 쪽은 천연염색의 꽃이라 할 만큼 염색과정이 까다롭습니다. 보통 물에 넣고 끓이면 그 색이 올라오거든요. 빨간색을 내려면 빨간 홍화를 물에 넣고 끓이면 되고 보라색을 내려면 자초나 포도껍질을 끓이면 되죠. 그러나 쪽은 달라요. 그 특별함 때문에 쪽색에 더욱 애착이 가는 걸지도 모르지요.”

쪽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의 힘이 필요하다. 정성 들여 잘 길러낸 쪽풀을 따다가 물을 부어 항아리에 담가놓고는 이틀 동안 기다려야 한다. 긴 시간 우려낸 색소 물에 석회가루를 넣고 또 오랫동안 저어야 한다. 그 다음엔 ‘발효’, 즉 미생물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콩대나 쪽대를 태워 만든 잿물을 넣어 발효시켜야 비로소 염료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햇빛’과 ‘바람’의 힘.

“쪽색을 환원색이라고 해요. 천을 염료에 막 적셨을 때는 연한 초록색을 띱니다. 그런데 햇빛 아래 널어놓고 자연이 불어주는 바람을 쐬어야지만 천이 마르면서 천천히 쪽색으로 바뀌지요.”

수줍은 새색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운 낯을 보여주듯, 장인의 정성어린 손길에 자연의 힘이 보태지면 그제야 비로소 맑은 쪽빛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쪽색을 내기 위해 장인이 흘렸던 피와 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번은 새벽에 쪽풀을 베다가 낫에 손가락이 절단된 적도 있었다며 상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왼손 중지를 보여주었다. 잘린 손가락을 주워서 병원에 가면서도 ‘그래도 쪽 일하다가 다쳤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니 그 열정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세상을 쪽빛으로 물들일 청출어람을 꿈꾸다

하늘을 뒤덮는 푸른 천이 바람에 휘날린다. 묵묵히 염색에 몰두하는 장인의 모습 뒤로 거대한 염색천이 고운 쪽빛을 자아낸다. 지난 해 세간에 화제가 된 한 증권사의 기업이미지 광고의 한 장면이다. 대목장 최기영 선생과 주철장 원광식 선생에 이어 정관채 장인도 자신만의 철학과 정신을 묵묵히 지키는 장인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미지 광고 모델을 물색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나, 잘 살펴보았을 것인데 내가 그런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기뻤지요. 무엇보다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염색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준 것 같아 더 뿌듯했고요.”

처음 시작할 때 비하면 천연염색의 저변이 많이 확대된 것도 사실이다. 도시에서도 천연염색으로 된 조각보나 공예품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화학염료보다 건강에 더 좋다고 해서 천연염색으로 된 옷만 고집하는 소비자도 늘었다. 그러나 쉽게 달아올랐다 빠르게 식는 한국 사람들의 특성상 금세 관심이 사라질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천연염색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늘었어요. 하지만 6개월을 못 버텨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못 됩니다. 염색 기술이야 머리 좋은 사람들은 금방 배울 수 있죠. 하지만 진정한 천연염색은 쪽을 다루는 마음과 자세에서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장인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배움이지요.”

‘청출어람’(쪽보다 쪽에서 나온 색이 더 푸르다)이라는 속담이 진정한 명언이라는 것을 보여줄 후계자가 아쉽다는 정관채 장인. 그는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훗날, 쪽으로 염색한 청바지를 개발해 명품브랜드로 세계에 선보일 꿈을 갖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쪼이는 햇빛 한 줄기가 쪽빛 천에 닿아 푸르게 빛났다. 농사와 작업으로 거칠고 뭉툭해진 장인의 손. 쪽빛으로 물든 손끝이 작업을 마친 천을 어루만질 때마다 햇빛도, 쪽빛을 바라보는 마음도 푸르러진다.

by 트래블러 2011. 3. 25. 21:03

People 화제의 인물
우리 아이들의 존엄성은 몇 점입니까?
김민아 인권교육전문가

몇 달 전 제정된 청소년 인권조례안 때문에 교육계 안팎의 분위기가 뜨겁다. 체벌 금지로 대표되는 청소년의 인권과, 그로 인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교권이 대치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 이런 상황을 인권교육전문가 김민아씨는 곪았던 데가 터져 나온 명현현상이라고 정의한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백기광

얼마 전, 알고 지내던 중학교 선생님과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체벌 금지를 필두로 한 인권조례안이 발표되면서 학교 안팎의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였다. “취지가 좋은 건 알지만 아직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이제 선생님은 때리지도 못하잖아요’ 어쩌고 하면서 괜히 더 까부는 거 있죠?” 최근에도 선생님 앞에 대놓고 욕설을 한 반 아이 때문에 비상회의에 불려갔다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인권이라는 말은 힘없는 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단어다. 하지만 많은 어른들의 경우 청소년 뒤에 인권을 붙이기를 망설인다. 가두고 제제하지 않으면 통제 불가능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입시’라는 바늘구멍 앞에서는 인권이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즈음,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다년간 청소년 인권교육에 매진해온 김민아씨의 책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라는 제목은 명쾌한 답을 주는 듯했다.

유예되면 사라져버릴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행복
사실, 이 말은 요즘 아이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들도 학창시절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닌가. ‘대학 가면 실컷 놀 수 있어’, ‘연애도, 여행도 다 대학가서 해’ 등등. 눈앞에 닥친 부조리함과 억울함을 해결하는 것은 모두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다는 것만으로 참아내야 했다. 김민아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진감래’에 대한 허상부터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고사성어가 ‘고진감래(苦盡甘來)’예요. 반대로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뭔 줄 아세요?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건 당연한 거예요. 입시를 핑계로 현재의 행복은 무조건 유예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제동을 걸어보고 싶었어요.”[##줄바꿈##]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 우리 모두 겪어보지 않았던가. 애를 써서 대학에 간다고 해서 인생이 180도 달라지진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조리를 겪고 자란 세대들조차도 아이들에게 반복되는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공부를 못하니까’ 인권 따위는 없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더 잘해야 하니까’ 바빠서 인권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학에 들어가도 마치 고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것 같다며 하소연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고생만 하다가, 과연 낙이 오기는 올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은 인내의 미덕을 강조하는 덕담 같지만 실상 알고 보면 감언이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도, 그리고 우리들 모두 현재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라 하더라도 굳이 다른 친구와 비교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이 존엄하다는 자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높은 성적만으로도 면죄부를 받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등수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든요. 거창하게 인권이라 표현하긴 하지만 맞지 않을 권리, 고통 받지 않을 권리, 스스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8년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교육 담당으로 인권 관련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김민아씨는 청소년 대상 인권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만났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냈다. 그 책이 바로 ‘인권은 대학가서 누리라고요?’다. 청소년 인권, 언뜻 들으면 익숙한 조합 같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와닿지 않는다. 과연 어떤 것들이 청소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일까? 그녀의 책 속에는 체벌과 부당한 대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 자유롭게 모여 의사를 표현할 권리, 사생활의 비밀이 보호될 권리 등 일곱 가지 청소년 인권이 다양한 사례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청소년 인권을 보장하는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결코 매를 들어서는 안 되며, 머리 길이와 의복 등에 제한을 두어서도 안되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 한 집회나 시위를 할 권리도 보장해주어야 하며, 어떤 빌미가 있더라도 소지품 검사를 한다든지 해서 사생활을 침해해선 안 된다. 나열해놓고 보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인권 사각지대 안에 놓여있었는가 짐작하게 된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줘야
그러나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이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 이유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김민아씨는 학생들의 인권이 교권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늘 교사와 학생, 교권과 학생 인권은 이분법적으로 해석되고 대립하는 구조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교권과 학생 인권은 왼손과 오른손이라고 생각해요. 둘 다 필요하다는 거죠. 둘이 만나면 악수를 할 수도 있고, 박수를 칠 수도 있고, 깍지를 끼고 하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절대 반목하는 관계가 아니에요.”
우선은 학교 교사들부터 청소년 인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인권 교육을 의뢰하면서도 어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권리만 가르치지 말고 의무도 가르쳐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단다. 그럴 때마다 김민아씨가 하는 말이 있다.
“맛있는 걸 많이 먹어본 사람이 요리를 잘하죠.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줄 알고요. 인권이 뭔지 누려보지도 못한 아이가 어떻게 남의 인권을 지켜줄 수 있겠어요.”
그래서일까. 실제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인권교육을 펼치는 그녀가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반응은 “우리한테 정말 그런 권리가 있어요?” 식의 놀라움이다.
“예를 들면 ‘유엔 아동권리협약 31조’에 보면 ‘어린이들은 충분히 쉬고 충분히 놀 권리가 있다’는 얘기가 나와요. 우리나라를 포함한 197개국이 이 협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죠. 즉,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쉬고 놀 수 있게 국가가 보장한다는 얘기니 아이들로서는 얼마나 놀랍겠어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인권의 의미와 인권 침해에 대한 여러 사례를 나누어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김민아씨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교육과에 소속되어 있지만 절대로 아이들을 ‘교육’시키지는 않는다고 했다.
“교육시킨다는 것의 의미는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뉘앙스가 있어요. 즉, 선생님이 학생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에게 교육시키는 거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절대 인권 교육이 성립될 수가 없어요. 의욕과 동기를 불러일으킬 수가 없으니까요. 제목은 ‘인권 교육’이지만 그 안에서만큼은 다른 것을 내려놓고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를 나눠요.”
이러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사실 인권은 유엔이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지만 이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사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그녀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인권 문화 컨텐츠 등으로 끊임없이 인권 교육이 시도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일들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감수성이 발달하는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이런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옆 짝꿍이 돈이 없어 밥을 못 먹는데 그것에 대해 아무 감흥을 못 느낀다면 문제 아닐까요? 적게 먹더라도 나눠먹을 줄 아는 감수성 즉,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나와 너, 나와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끔 해줘야 해요.”
그녀는 앞에 놓인 백지 위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물코를 그렸다. 개인을 의미하는 네모 모양은 마치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나 그물코 하나만 빠져도 전체를 못 쓰게 된다. 즉, 내가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위 사람들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모두 볼 줄 알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권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너와 나의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완성되는 인권
그녀는 최근 김상곤 경기 교육감이 발표한 청소년 인권조례 제정안이 이슈가 되면서 마치 학교가 아노미 상태에 빠진 것처럼 묘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놨다.
“이런 경우가 있죠. 저 집안은 늘 화목하고 한 번도 싸움이 일어난 걸 본적이 없어.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살면서 어떻게 의견 다툼이 없을 수 있어요? 그건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았거나 서로 무관심했다는 얘기죠. 현재 학교도 그래요. 아무런 소통이 없었던 학교에서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학교로 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도기라고 봐요. 그동안 쌓여서 곪아가던 상처에서 나쁜 기가 빠져나오는 거죠.”
그런 의미해서 지금은 교육계 전반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즉,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학교의 의미, 교육의 필요성부터 다시 되짚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가 왜 존재할까요? 교사들 월급 주려고? 아니잖아요. 학생들 가르치려고 선생도 뽑는 거고,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니까 학교 건물도 짓는 거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엄밀히 얘기해서 교수권보다 학습권이 우선한다고 봐요.”
말 그대로, 공교육이란 학부모들이 세금을 내고 나라에 아이들을 맡긴 것이다.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업무를 위탁받은 곳이므로 그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교에서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집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학교는 또 다른 집이에요.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편해야죠. 7~8시간 앉아서 공부하는데 자기 사이즈에 맞는 책걸상도 있어야 하고, 화장실에 화장지도 있어야 하고, 쉴 데도 필요해요. 그러한 학교의 존재 의미부터 되찾아간다면 청소년 인권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될 텐데 말이에요.”
사실, 현재의 대한민국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경쟁의 사이클 속에서 달려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안에서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경쟁에 자신 없는 자들의 변명처럼 보일 수도, 지배층에 대한 덧없는 반항처럼 치부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을 받는 기간만큼은 내 안에 갇히기보다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배려할 수 있는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김민아씨의 마지막 말은 교육계 전반에 뜻 깊은 화두를 던져주는 듯 했다.
“옆 아파트에서 같은 학교 애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고등학생 아이가 이런 얘길 했다고 해요. ‘우리 아파트 값 떨어지면 어쩌지?’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단절된 사회를 살고 있어요. 하지만 나의 인권을 누리고, 다른 이의 인권을 지켜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믿어요. 나와 세계가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걸.”

by 트래블러 2011. 2. 27. 23:50

그동안 ‘명품열전’이라는 고정 칼럼으로 물건의 가치에 대해 재기발랄한 글을 선보인 패션 저널리스트 홍석우.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리빙센스>에 펼친 칼럼을 마무리하며 산뜻한 패션만큼이나 건강하고 멋진 그의 명품론을 직접 들어봤다.

패션, 그 새로운 낙원에 빠지다

여자들에게 명품은 늘 뜨거운 화두다. 때론 사치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품격을 높여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 명품에 대해 젊은 남자가 재잘재잘 수다를 떨 듯 펼쳐낸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보통 명품이라고 하면 백화점 1층에 있는 수백만 원짜리 유러피언 브랜드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사실 명품의 정의는 매우 주관적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50만원짜리 셔츠가 반드시 3만원짜리 셔츠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거든요. 비싼 물건을 맘먹고 산 게 아니더라도, ‘이 물건 참 잘 샀다. 참 잘 만들었다’ 싶은 제품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물건을 오랫동안 쓰면 그게 명품이 된다고 생각해요.” 패션 칼럼니스트 홍석우 씨는 패션 포털사이트인 ‘무신사(www.musinsa.com)’를 통해 칼럼니스트로 데뷔, 데일리 프로젝트의 바이어로 일하며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현재 칼럼을 쓰는 일 외에도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리빙센스>에 ‘명품열전’을 연재하며 그만의 독특한 명품론과 패션관으로 많은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원래 제가 패션 칼럼을 쓰다 보니 이런 주제는 어떻겠냐며 제의가 왔어요. 패션은 사실 의식주 중 하나로 생활 속에서 늘 접하잖아요. 하지만 일부 유명 브랜드, 모델, 셀러브리티들의 이야기는 패션의 영역이긴 하지만 나랑은 전혀 다른 세계 얘기죠. 그런 얘기들을 친절하고 재미있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요.”

그가 처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고 감각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것이 전부였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제가 패션에 눈을 떴을 때는 강남 스타일, 강북 스타일로 나뉘어 다들 똑같은 옷을 입던 때였어요.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남들처럼 입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된 거예요. ‘유니폼도 아닌데 왜 다들 같은 옷을 입고 있지?’ 하고요.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패션 잡지도 사보고 동대문을 돌아다니면서 독특한 옷도 사 모으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뿐인 패션을 하나씩 찾아갔다. 브랜드에 파고들기 시작하니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 안목도 덩달아 생겼다. 패션의 세계는 그동안 그가 몰랐던 또 하나의 낙원이었다.

나만의 패션을 완성시키는 명품 하나

“2003년 즈음이었을 거예요. ‘무신사’라고 스트리트 패션을 다루는 웹사이트가 오픈했는데 거기에 제 친구가 있었어요. 제가 워낙 스트리트 패션에 관심이 많아 친구에게 제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물어봤죠. 그런데 이 친구가 ‘넌 사진에는 별 소질이 없고, 차라리 글을 쓰는 게 어떠냐’며 제의를 하더라고요. 평소에 글 쓰는 걸 좋아해 블로그에도 올리고 그랬기 때문에 시작하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청탁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데일리 프로젝트의 바이어로 일하면서부터였고, 이후 독립한 그는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스타일링도 하는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다. <리빙센스>에는 세계의 유명 브랜드에 얽힌 일화들, 모델들에 얽힌 에피소드 등을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매달 흥미로운 주제에 매달려 스스로 공부도 하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고. 연재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어보았다.

“뉴욕 출장이랑 칼럼 마감이 겹쳐서 아주 난감했던 적이 있어요. 아마 캠페인 모델에 관한 칼럼이었을 거예요. 결국 인천공항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지요. 내용 자체는 재미있게 썼는데, 혹시 펑크 날까 봐 어찌나 맘을 졸였는지 몰라요.” 1983년생, 올해 나이 스물여덟. 이제 막 꿈을 찾기 위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시기에 이처럼 자기 확신을 지닌 젊은이도 드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홍석우 씨가 운영하는 블로그인 ‘유어보이후드(www.yourboyhood.com)’만 훑어보아도 그가 얼마나 분명한 색깔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스트리트 패션을 다루는 블로그가 있었으면 했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 거예요. 외국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에 이런 패션 피플도 있다는 걸 말이죠. 수입에 도움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 작업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얻었어요. 외국의 아티스트에게서 연락을 받기도 하고, 교포가 격려의 메일을 보내주기도 했어요. 덕분에 스트리트 패션계에서 나름 포토그래퍼로 인정받게 되었죠.”

좋아하는 일,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뤄내고야 마는 의지와 고집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매력일 듯싶다. 이는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패션을 찾아 자기만의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일 터다. “요즘 패션 추세는 어떻게 하면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일까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연령에 맞는 패션은 따로 있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가장 멋있는 패션은 연령에 맞는 옷을 입었을 때라고요. 다만 가끔씩 기분 좋은 일탈을 해볼 수는 있겠죠. 늘 가던 백화점 대신 가로수길에 가본다거나, 늘 사던 옷 대신 돈을 모아 조금 비싸지만 잘 만든 제품을 한두 개 마련해본다거나. 그런 것들이 모여 자신의 스타일을 만드는 거거든요.”

아이팟으로 헤비메탈을 듣고, 자전거로 30㎞를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패션 아이템으로 멋을 내는 것 또한 하나의 취미생활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게 홍석우 씨의 지론. 앞으로도 그만의 시각과 스타일대로 한국인의 스트리트 패션을 글과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갈 예정이라는 홍석우 씨. 진중한 눈빛이 그의 이름을 건 패션 저널이 조만간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진행 홍유진 사진 박순애

출처: 리빙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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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로 살아온 50년, 가슴에 남은 아름다운 물음표

탤런트 김영옥

아름다웠던 한때의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는 배우가 있고,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오랫동안 살 부비며 산 가족처럼 함께 늙어가는 배우가 있다. 올해 74세. 반세기 동안 아내로, 엄마로, 가족 같은 배우로 살아온 그녀, 김영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고운 주름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김영옥은_그런_배우다.

아주 오랫동안 보아왔던 것 같은데 그 존재가 새삼 빛나는 배우, 이름도 없이 늘 누군가의 어머니, 이웃집 할머니로 불리지만, 나올 때마다 괜히 반가운 얼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밥을 해줘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친근한 캐릭터. 혹자는 ‘국민 엄마’, ‘명품 조연’ 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그녀를 태운 차가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롱코트 자락을 잡고 천천히 땅에 발을 내딛는 모습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작은 체구, 빛나는 눈빛, 보폭이 좁은 발걸음…. 늘 TV에서 평상복을 입은 모습만 보아서인지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여배우의 아우라가 사뭇 위압적이었다.

연기 인생 50년이 주는 존재감

사실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였다. 지난달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화려한 입담을 자랑한 뒤로 빗발치는 취재 의뢰와 인터뷰 요청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남우세스럽다고 했다. 서른한 살 때부터 할머니 역할을 했는데, 어느덧 수십 년이 흘러 이제야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올드미스 다이어리><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는 걸쭉한 욕을 쏟아내는 왈가닥 할머니였다가, <공부의 신>에서는 손자에게 한없는 사랑을 퍼주는 헌신적인 할머니가 됐다. 어떤 역할을 맡든 몸에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그녀의 변신은 놀라울 정도지만, 결코 유난하지 않다. 50년 가까이 한길만 걸어온, 어찌 보면 단조로운 일생이었다. 화려한 스캔들에 휩싸인 적도 없고, 상복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성껏 쌓아올린 공든 탑처럼 김영옥이라는 연기자의 존재감은 시청자들에게 점점 소중한 의미가 되고 있다.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지금 나를 보면 상상이 잘 안 되겠지만 소심하고 숫기도 없는 그런 애였다고. 연극이나 노래 같은 건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좋아했으니 특별할 것도 없었지.”

그 옛날 영화의 인기는 지금보다 뜨거우면 뜨거웠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얌전한 여학생이었다는 그녀도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만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교복 대신 어른스러운 사복을 차려입고 가 두근대는 마음으로 봤다는 <푸른 화원>, <7인의 신부>, <맨발의 백작부인> 등의 추억 속 영화 제목들이 그녀의 입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면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거울을 보며 여주인공 흉내를 제법 그럴듯하게 내곤 했단다.

“의지를 갖고 뭘 한 건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저절로 트이는 팔자였나 봐. 마치 배우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거울을 보며 흉내를 내곤 했는데 그게 재주로 발전한 거지. 학교 예술제 같은 데 나가 많은 사람 앞에서 연기하면서 자신감도 붙었고.” 뭐든 시작하고 싶어 20대 초반에 KBS 아나운서로 입사했고,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이른 나이에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천생 연기자였다. 성우로, 탤런트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른 결혼을 해 군대 간 남편을 기다리느라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일하는 게 좋았다. “나처럼 꾸준히 일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간혹 몇 달 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어요. 보는 사람은 늘 똑같다고 여길지 몰라도, 항상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해요. 매번 똑같은 역할만 들어오면 재미가 없지. 내가 노망 난 늙은이 역을 좀 많이 했어. 자꾸 해봐. 그 이상 뭐가 나오겠어. 노희경 작가한테 이제 망령 난 할머니는 그만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영화로 만드는데 내가 맡았던 역을 김지영 씨가 한다고 하대. 막상 그러니까 또 섭섭하기도 하고.(웃음)”

오랜 연기 생활 동안 그녀는 늘 조연이었다. 큰 욕심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늘 새로운 연기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다. “남들은 중견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하고 돈이나 벌어가는 줄 아는데, 일할 때는 완전히 몰입해야 하기 때문에 등줄기에 진땀이 흐른다고.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할 때도 신나기는 한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런데 신기한 게, 병이 났다가도 그렇게 땀을 쪽 빼고 연기하고 나면 다 나아버려. 꼭 운동하면서 땀을 시원하게 흘린 것처럼 기분이 그렇더라고. 촬영 끝내고도 여운이 사라지지 않아서 집에 바로 가지 못하고 어딜 앉았다 가는데, 남자들이 일 열심히 하고 술 먹는 게 이해가 가더라니까.”

나는 시트콤 연기가 생리적으로 참잘 맞아요. 처음 한 건 <오경장>이었는데 시청률은 별로 안 나왔지만 우리끼리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올드미스 다이어리>도 1년 넘게 참 즐겁게 했고. 물론 어려운 부분도 있지. 시트콤은 타이밍이야.

대한민국 대표 할머니 배우의 위엄

왈가닥 사돈어른, 푸근한 옆집 할머니, 치매 걸린 시어머니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그 때마다 자연스러운 연기 변신으로 사랑받아 온 김영옥. 그런 그녀가 스스로 꼽는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전성기는 잘 모르겠어요. <왕룽일가>, <옛날의 금잔디> 할 때였던 것 같기도 하고, 노희경 작가 작품만 6~7개는 했는데 <화려한 시절>도 좋았죠. 김수현 씨 작품도 <새엄마> 때부터 꾸준히 했고…. 이렇게 믿음을 갖고 꾸준히 찾아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은 아니었어도, 김영옥은 드라마의 적재적소에서 주인공을 빛내주거나 감칠맛 나는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조연으로 끊임없이 사랑받았다. 지난해 말에는 4개 드라마에 출연하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TV에 그녀의 얼굴이 나오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도 연기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젊은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녀는 어떤 배역이 들어와도 모두 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난 일하는 사람 많이 안 했어. ’ 김수미가 방송에서 그러더라고. 하지만 나는 조연을 해도 늘 주인공 같은 마음으로 하려고 했어요. 서른한 살에 할머니 역을 처음 맡았지만, ‘아무거나 다 줘봐라’ 하는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지요.” 요즘은 MBC 주말연속극 <글로리아>와 시트콤 <몽땅 내 사랑>에 출연하고 있다.

“나는 시트콤 연기가 생리적으로 참 잘 맞아요. 처음 한 건 <오경장>이었는데 시청률은 별로 안 나왔지만 우리끼리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올드미스 다이어리>도 1년 넘게 참 즐겁게 했고. 물론 어려운 부분도 있지. 시트콤은 타이밍이야. 현장 분위기와 템포를 잘 살려서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감각도 있어야 하고 순발력도 필요하지.”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웃음을 줄 수 있는 시트콤도 좋고,슬픈 정극 드라마는 그것대로 절절해서 좋단다. 지금도 대본 외우는 것만큼은 젊은 사람 못지않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귀찮아지기도 하고 피곤할 때도 많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해 ‘여유도 되는데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며 걱정하지만, 그녀에게 연기는 직업 그 이상의 의미인 듯 보였다.

“원래는 쉰다섯까지만 하려고 했어. 그런데 20년을 더 하고 있네. 언젠가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고두심한테도 얘기했어. ‘언니 그만둬야 할 때 같은데’ 싶은 맘이 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총기 있을 때 똑 부러지게 정리해야지, 말도 느려지고 연기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방송국에서 부른다고 기신기신 나가면 어떡해?” 김영옥은 나잇값의 무게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 똑같이 틀려도 더 부끄럽고, 같은 실수를 해도 면목이 안 선단다. 젊을 때는 객기 부리느라 부러 늦게 나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후배들보다 일찍 촬영장에 나간다고 했다.

“어디 촬영장이었던가. 피디가 어린 연기자들을 혼내더라고. 선배들 다 와 계신데 어떻게 신인이 지각을 할 수 있냐고. 그러자 옆에서 한진희 씨가 그러더라고. ‘원래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이 빨리 나올 수밖에 없어.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지잖아요. ’ 그 말을 듣고 내가 맞다고 했지. 젊을 때는 잠도 많고 실수도 해. 나이 들면 다 아니까 더 이상 못하지.”

여배우를 지켜주는 숨은 기사, 남편

인터넷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치면 독특하게도 가장 먼저 나타나는 연관 검색어가 ‘김영옥 남편’이다. 그녀의 남편 김영길 씨 또한 KBS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으로 지금은 은퇴 생활을 즐기며 그녀를 든든하게 외조한다고 했다. “남편이 그래요. ‘당신이 돈을 벌지 않아도 좋은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고. <아침마당> 같은 데서 출연 의뢰가 들어오면 정작 나는 심드렁한데 남편은 한번 해보라고 등을 떠밀어요. 그래놓고는 가서 자기 흉을 봤다고 나가지 말라고 말을 바꾸지. 사람이 왜 그렇게 이율배반적인지 몰라.(웃음)” 그동안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세심한 애처가인 남편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유별난 부부 금슬이 큰 관심을 받았다. 매사에 통이 크고 낙관적인 김영옥과 달리 배려 깊고 세심한 남편의 조합이 독특해 보였던 것. 특히 연애할 당시에는 항상 차 문을 직접 열어주고, 길을 걸을 때도 여자의 오른편에 서서 챙겨주는 자상함에 그녀도 반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사람한테 다 친절한 게 문제야. 누구는 신랑이 자기한테 관심 좀 가져줬으면 한다지만, 우리 남편은 그렇게 걱정이 많고 염려가 많아요. 어떤 성격이든 좋은 점이 있으면 맘에 안 드는 점도 있기 마련이야. 남편이라고 여편네가 예쁘기만 하겠수. 부부가 성격이 꼭 맞는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아무리 금슬이 좋아도 상대방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결혼 초에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들어가는 날이 잦아 일을 그만두라는 잔소리도 적지 않게 했단다. 아무리 제몫을 잘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아도 가사와 육아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 주부의 숙명 아니던가. 당당하게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아내와 엄마 역할을 당차게 해낸 그녀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족들에게 부채감이 있는 듯했다.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점이 참 많아요.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서까지 일을 하니까 주위에서 오해를 하더라고. ‘분명 저 사람 남편이 사업하다 망해서 저 나이까지 일하는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실제로 은퇴하고 나니까 주위에서 투자하라고 참 많이도 달려듭디다.”

은퇴 후 남편이 잠시 의류 유통업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평생 방송 일밖에 모르고 산 남편이 험한 유통업을 하면서 몸 고생 마음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내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어느 날인가 자면서도 끙끙 앓는 남편을 보니 안 되겠다 싶었단다. “그 일 이제 그만해. 당신 이러다 죽겠어.” 아내의 진심어린 걱정에 남편도 투자금을 바로 회수하고 일을 접었다.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평소에 그렇게 잘하던 부인이 남편이 정년퇴직한 후에는 무섭게 돌변하더래. 집에 들어앉아서 컴퓨터만 하는 게 보기도 싫다고. 쫓아다니면서 잔소리하는 것도 아닌데, 컴퓨터 좀 하면 어때? 오죽하면 이런 농담이 나왔겠어요. 세 남자가 아내한테 얻어맞고 찜질방에 왔대요. 왜 맞았나 했더니, 40대는 밥 달라고 했다고, 60대는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고, 80대는 아침에 눈을 떴다고 때리더라는 거야.(웃음)” 가장의 권위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시대를 풍자하는 농담이겠지만, 그녀는 황혼에 접어드는 시기에 원만한 부부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런 말하면 좀 안됐지만, 내가 살면서 보니까 확실히 어떤 면에서나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한 존재야. 특히 나이가 들수록 여자는 성숙해지는데 남자는 하나같이 아기 같아지더라고. 요즘 ‘아버지 부재 시대’라는 말을 하는데, 젊은 엄마들이 일부러라도 남편 기 좀 살려줬으면 좋겠어. 나도 반성할 바지만….(웃음)”

그렇게 함께 살 부비며 살아온 세월이 50년이라 이제는 아옹다옹하면서도 우정처럼 변해버린 것 같다며 웃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 눈에 띄면 아무 고민 없이 사다가 먹이게 되고, 함께 식사할 때도 남편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은 좀 덜 먹게 된다는 것. 굳이 겉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애정, 그것은 거세게 퍼붓는 소낙비 같은 사랑이 아니라 따스하고 촉촉하게 젖어드는 봄비와도 같은 사랑이었다.

그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이름, 어머니

이제는 자녀 모두 마흔 줄에 접어들어 한시름 놓았지만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할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것을 그녀는 여전히 미안해했다. 그런 마음 때문일까. 그녀는 지금까지도 매년 직접 김장을 담가 세 자녀에게 나눠주고, 철마다 좋은 음식이나 물건이 들어오면 자식들 것을 챙긴다. 딱히 노후 대비랄 것도 없다. 부부 둘이 살면서 끝까지 아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도와줄 수 있으면 제몫 다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따금 오랜만에 복귀해서 ‘애 다 키워놓고 왔어요’ 하는 젊은 탤런트들 보면 참 부러워요. 나도 마음만 먹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 괜히 약이 올라.(웃음) 어쨌든 우리는 그 당시 그렇게 여유롭지가 않았으니까. 내가 일을 한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는지 몰라도, 애들 한창 클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한 건 참 후회가 돼요.”

그러면서도 “되돌릴 수도 없는데 뭘 어떡하겠수” 하고 심드렁하게 덧붙인다. 어쨌든 그녀는 일하는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까. 집에 있는 시간은 최대한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 노력했고, 가사 도우미에게 하나하나 일러가며 아이들 돌보는 일도 신경 썼다. 일요일이면 피곤에 지쳐 늦게까지 자는 엄마가 야속해 일부러 눈꺼풀을 잡아당기던 둘째 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긴 하지만. “만약 내가 전업주부였다면 아이들한테, 남편한테 더 잘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다고 봐요. 오히려 더 게을러졌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이들을 너무 챙겨서 응석받이로 키웠을 수도 있을 거야. 어떤 상황에서든 100% 잘하기는 힘들어.”

직장에 다니면서 가사와 육아까지 담당하느라 발을 동동 구를 젊은 주부들에게도 한마디 건넸다. “직장 다니는 것 때문에 혹시 아이에게 소홀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가만 보면 직장에 다니는 여자들이 더 기죽어 산다니까. 남편들이 너무 모르셔. 오히려 직장 다니는 엄마들이 모자란 시간만큼 애들한테 더 잘해요. 그리고 하나나 둘이나 키우는 건 비슷하니까 꼭 둘까지는 낳아야 돼. 저희들끼리 의지하면서 저절로 큰다니까.”

엄마 같은 친근한 조언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식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걸, 그녀는 강조하고 싶어 했다. 김영옥의 두 딸은 엄마가 집에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게 한이 되었는지 둘 다 아이를 낳자마자 전업주부로 집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엄마처럼 일을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소리를 한단다. 하나뿐인 의사 며느리도 휴직 기간을 오래 갖고 자녀 양육에 정성을 기울이는 똑똑한 엄마다. 자식들이 각자 엄마가 돼서 아이들을 키우며 제 나름의 가정을 잘 일궈나가는 모습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행복 중 하나다. 자식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문득 어머니를 회상했다.

“친정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내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의 70%는 우리 어머니야. 내가 쉰둘일 때 어머니가 가셨는데, 잘해드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한 것, 외롭게 해드린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영원히 그럴 것 같아.” 사랑은 강줄기와도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더 넓은 곳으로 흐른다. 이제 그녀가 어머니가 되어 자식들을 보니, 가끔씩 잘못하는 부분도 보이고, 그로 인해 나중에 후회할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기는커녕 “나중에 나 가고 나서 애달프다고 하지 마.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 거 몰라?” 하고 안심시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다시 친정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교육을 열심히 시키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든, 자식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면 거저는 없더라고요. 며느리와 사위들한테는 더 예의 지키고, 그저 ‘이만하면 괜찮지’ 하면서 약게 굴어야 돼요.”

일흔이 넘어도 계속되는 인생 공부

인터뷰 도중에도 각종 인터뷰나 방송 출연을 의뢰하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내가 인기에 목숨 걸 나이도 아니고, 이젠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서 못한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지만, 사실 70대의 노년 탤런트가 이처럼 대중들의 인기를 오래 받는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일 듯했다. 얼마 전, 모 아침 교양 프로그램에서 김영옥이 정형돈, 조권 같은 젊은 연예인들을 제치고 ‘2010년 미친 존재감’ 1위에 등극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휴, 난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몰랐어. 욕 비슷하게 한 것 때문에 뽑힌 것 같은데, 1등이라니까 좋은가 보다 한 거지. 노인네가 인기 좋아봤자 뭘 한다고. 신경 안 써요.” 드라마를 통해 만난 동료 배우들과 가족 같은 정을 나누고, 이따금 만나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인연을 만든 것도 이 일을 하면서 얻은 선물이다. “조형기, 양희경 이따우 것들은 아예 호칭이 ‘엄마’야. 반효정, 김용림, 백수련 이런 친구들도 다 친한데 시간이 없어서 자주 보진 못하지. 연말에는 고두심 만나서 노래방에 가기로 했어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배우가 있다. 데뷔하자마자 주연 자리를 꿰차고도 금세 잊히는 배우,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20대 못지않은 피부로 각종 CF를 섭렵하는 배우, 늘 도전하는 연기로 해외 영화제에서 이름을 드높이는 배우…. 누군가는 그녀를 할머니 전문 배우, 만년 조연 배우라 부를지도 모른다. 언젠가 김영옥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왜 나는 왕비 역할을 못하냐?”고 PD에게 따졌다는 일화처럼, 그녀에게도 화려하고 좋은 역할만 맡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닐까?

“꿈이 달랐다고 봐요. 어떤 배우는 ‘나는 이런 역할 아니면 못해’ 하고 한계를 지어요. 그런데 나한테는 어떤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특별한 목표가 없었어요. 아니, 목표가 매번 달랐다고 얘기해야 맞겠지. 매번 다른 배역이 올 때마다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기분이 들었고. 완전히 바뀔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늘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려고 애썼어요. 할 수 있는 연기가 많으니까 계속해서 믿음을 주고 찾아주는 거겠지.” 그녀의 몸을 거쳐 간 셀 수 없이 다양한 캐릭터, 그리고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수많은 인생. 그녀의 손에 새로운 책이 쥐어질 때마다 항상 새로운 인생 공부가 시작되곤 했다.

“대본을 보면 참 좋은 글도 많았어요. 그게 내게는 다 공부였지, 뭐. 남의 인생을 수없이 들여다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만약 이 일을 안 하고 그냥 늙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고집 세고 옹졸한 늙은이가 됐을걸.”

김영옥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되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김영옥’ 속에 그 캐릭터를 녹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번 새로운 드라마를 할 때마다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표현한다. 치매 걸린 노인도 되어보고, 자식 잃은 어머니도 되어보면서 그렇게 점점 성숙해지는 자신의 오롯한 인생을 한 걸음씩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찍고 나서 애들한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만약 내가 진짜로 그렇게 되면 병원에 갖다 놔. 내가 모아놓은 돈이 그만한 돈은 될 테니까. ’ 괜히 불효랍시고 집 안에 모셔두는 거 가족들이 감당 안 되는 일이거든.” 이런 이야기를 시원하게 내뱉으면서, 그래도 찾아주는 이가 있을 때까지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날까지는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김영옥.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생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물음표라지만, 그녀는 그 자체를 충분히 즐길 줄 아는 멋진 할머니였다. 새로운 대본이 들어올 때마다 ‘요건 내가 맛있게 연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신이 난다는 그녀. 아주 오래오래, 그녀가 우리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연기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글 홍유진 사진 성균

출처: 리빙센스 1월호

by 트래블러 2011. 2. 2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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