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투명한 교육을 꿈꾸다

김형태 교육위원


언제부터 학교가 이렇게 됐을까? 어른들의 욕심으로 얼룩진 비리 사학의 진흙탕….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그 속에서 올곧고 순정하게 빛나는 희망 하나를 발견했다. 투명한 양심의 상징으로 교육의원이 되어 다시 돌아온 김형태 의원을 만났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이한마루

온갖 이변이 속출했던 지난 6·2지방선거. 전교조 출신 교육감이 처음으로 탄생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 중 하나가 바로 김형태 교육의원의 당선이었다. 학교장, 장학사 출신 등 화려한 경력과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후보를 제치고 40대 중반의 젊은 해직 교사가 접전을 벌인 끝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 결과에 가장 기뻐하고, 반가워 한 이들은 다름 아닌 학부모와 학생들이었다.
“그저 평범한 교사였어요. 행복한 학교를 꿈꾸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보통 국어 선생이었죠. 그랬던 제가 시위를 하고, 사재를 털어 선거운동을 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몸이 약한 아내는 반대도 많이 했어요. 대의를 위해서 가족들에게는 정말 못할 일을 많이 했지요.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선을 위해 고생해준 어머니, 아내, 아이들, 지방에서 제 소식을 듣고 일부러 서울에 올라와 투표한 제자들과 학부모들, 그 외에 안팎에서 제 일 같이 도움을 아끼지 않은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기도 했죠.”

시인을 투사로 만든 비리 사학의 정체
불과 지난해의 일이었다. 지난 20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20년도 영원히 선생님일 줄 알았던 시절. 예상치 못한 해직 통보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1인시위를 했던 218일의 고통스런 시간들, 그리고 교육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올해. 그렇게 교육의원으로 교육계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불과 1년 6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변화의 바람과 맞닥뜨려야 했다.
김형태 의원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볼 때 양천고 비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사립고등학교인 양천고등학교는 불법급식 수의계약,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동창회비 징수, 학교 운영회 회의록 조작, 공사비 허위로 부풀리기, 체육복 불법판매, 도서실비 불법징수 등 온갖 사학비리의 온상이라 할 만큼 정도가 심했다. 평범한 국어교사였던 그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은 새로 온 행정실장으로부터 이사장의 위법, 탈법 행위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이사장이 제멋대로 쌈짓돈처럼 학교 자금을 가져다 쓴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행정실장은 가짜 영수증으로 비는 자금을 메우느라 여념이 없고요. ‘이사장님 지금 시대가 변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결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조언을 해봤자 듣지 않는다더군요.”
아이들의 고충을 듣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한창 자라날 나이에 형편없는 급식을 먹고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부당한 차별로 상처받은 아이가 그에게 찾아가 하소연할 때는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저도 평범한 월급쟁이에 불과한 한 사람의 교사였을 뿐인데 두려움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묵과하고 있다면, 이건 공범과 다를 게 없겠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어요. 결국 뜻을 함께한 선생님들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개선을 요구했죠.”
지난 수십 년간 독재를 하다시피 사학 권력을 만끽해온 이사장은 ‘교육의 근본’을 지키라는 교사들의 간절한 외침을 간단히 무시했다. 어떻게든 학교 안에서 일을 해결해보고자 애썼던 선생들의 용기는 그저 무력할 따름이었다. 결국 김형태 의원과 동료들은 서울시 교육청 등 외부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 부당한 잘못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조차도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사학 권력 앞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교육청에서 사립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도 이미 사학 권력과 한통속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내부고발을 한 사람의 신변을 법적으로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게 교육청인데 오히려 학교측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더군요. 그리고 하루아침에 직위해제 되었고요.”

결국에는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진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음침한 권력의 힘 앞에서 시 쓰기와 꽃 가꾸기를 좋아하던 고등학교 국어교사는 그야말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당한 해임에 항의하는 피켓을 들고 매일 교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그나마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는데 학교 측 사람들은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든 피켓을 빼앗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학교 앞에서 시위를 못하도록 법원에 접근금지 신청도 했단다. 하지만 김형태 의원은 추운 날도, 더운 날도, 비오는 날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신념에 의한 결정이었으므로 불의에 맞서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가족들이 받을 고통이었다. 아내는 제발 그만두고 좋아하는 꽃집이나 차리자고 사정했고, 한창 사춘기였던 두 아들은 갑작스런 아빠의 변화된 모습 앞에서 적응을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아이들 때문에요. 저 이전에도 학교의 만행에 대해 항의하다가 부당한 해고로 떠나간 선생님들은 많았어요. 그저 사라졌지요.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바른 소리를 하면 저렇게 쫓겨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는구나….’ 아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선생이었으니까요.”
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던 양천고 제자들은 외롭게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선생님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라며 흐느꼈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를 지켜보며 동료교사들도 모두 미안해했다.
그렇게 김 의원은 썩을 대로 썩어 들어간 교육 비리에 맞서 싸우는 청렴하고 양심적인 교사의 상징이 됐다. 그의 진심은 점차 밖으로 알려졌다. 진심이 전해지니 자연히 힘이 모아졌다. 그의 1인 시위는 결코 혼자서 완성된 게 아니었다. ‘양천고 김형태 선생님 부당파면 철회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시민 단체를 비롯, 언론과 학생? 학부모들도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내준 덕분에 지난해 국감에서 양천고 비리문제가 크게 다뤄지기도 했다. 또 지난해 MBC <PD수첩>과 공동으로 ‘제 9회 투명사회상’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버팀목 삼아 그는 교육 비리에 맞서 싸웠고 결국 양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가 교육의원 출마를 결심했던 계기는 이러한 경험이 배경을 이루었다. 평범한 교사인 그를 투사로 만들었던 부당한 교육계 비리들, 그 어둡고 거대한 권력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또 해직교사 신분으로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던 답답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제가 했던 행동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죠.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계란으로도 바위를 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무리 약해보여도 정의는 결국 이긴다는 것을요.”
그렇게 그는 지난 지방선거에 출마해 강서, 양천, 영등포구 교육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료교사들과 학부모들의 힘이 모였음을 그는 고마워했다. 그가 당선됐을 때, 자기 일 같이 기뻐하고 함께 울던 사람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깨끗한 교육을 위해 그는 이제 한발 내디뎠을 뿐이었다.

이제, 새로운 교육의 시대가 열린다
김형태 의원이 서울시의회에 출근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두 달여가 지났다. 교육의원이 되기 전에도 후에도, 그는 ‘교육 비리 척결’의 한 길을 걷고 있다. 그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도 많아졌다.
“지금 제 앞에 검토를 기다리는 민원이 50여개 정도 됩니다. 제가 맡고 있는 영등포, 양천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민원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만큼 교육비리가 전국적으로 만연하다는 거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청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지도 감독 권한을 제대로 썼다면 개별 학교들이 이렇게까지 버젓이 위법 해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청의 직무 유기부터 바로 잡아가야죠.”
그가 교육 비리 척결에 이렇듯 모든 것을 건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너머에 큰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거창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의 바람은 단지 ‘아이들과 교사들이 학교에서 행복해지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해요. 한 해에 300명이나 자살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뭘 해줄까’를 고민해야 하는 학교가 오히려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있죠.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이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죠.”
곽노현 서울 교육감은 ‘가장 좋은 방부제는 햇볕이다’라고 했다. 이제 밀실행정의 시대는 가고 깨끗하고 투명하게 공개된 행정이 펼쳐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형태 교육의원을 포함해 보다 깨끗한 교육에 대한 의지를 지닌 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이상 이는 꿈이 아닐 터였다.
“교육의 3주체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입니다.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방향,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지금 시점이죠. 지나친 무한 경쟁과 서열화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교육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협력하고 배려하는 핀란드식 교육으로 바꿔나가고 싶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꼭 갖추고 싶은 제도 중 하나가 바로 ‘국립대학 공동운영제’다. 프랑스처럼 모든 대학을 공동 운영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전국의 국립대학만이라도 벽을 낮추자는 것이다. 재정과 제도를 공동화 하고 교수와 강의를 순환제로 운영해 학생이 전국의 어느 국립대학을 나와도 취업에 영향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서열화의 정점인 서울대의 높은 벽만 사라져도 지금과 같은 입시 위주 교육의 폐해는 사라질 것이라는 게 김 의원의 생각이다.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공부 잘 하는 아이는 시험 끝나고 잊어버리고, 못하는 아이는 시험 보기 전에 잊어버린답니다. 어쨌든 머릿속에 지식이 남지 않는 건 똑같다는 거죠. 공교육의 근본적인 맹점을 얼른 바로잡아야 해요.”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다. 가난한 이를 보면 측은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한다. 정의는 반드시 불의를 이긴다. 우리가 책에서, 텔레비전에서, 학교에서 배운 온갖 진리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사람들을 바보 같다거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를 통해 그동안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진리들이 진정한 진리임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by 트래블러 2011. 12. 16. 23:29
people 화제의 인물
교육인은 희망의 신이다
조벽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가르친다는 것,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무게감은 때로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날개를 맘껏 펼칠 수 없는 답답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조벽 교수를 만나 이 시대 교육인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조언을 들어봤다.

Written by 홍유진 Photo by 백기광

요즘 조벽 교수는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다’, ‘명강의 노하우 노와이’ 등 잘 나가는 교육서를 집필하면서 각종 지자체 및 학교를 돌아다니며 교수법에 대한 강의를 펼치기도 한다. 또, 각종 기업 등에 특강을 나가 인재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는가 하면, 최근에는 KBS 예능프로그램인 ‘도전자’에 멘토로 출연해 주옥같은 조언을 던지기도 한다.
그렇게 조벽 교수는 교수법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유명인사다.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뛰어난 교육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의 기계공학박사인 그는 공학을 가르치는 평범한 대학교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시건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오랜 기간, 창의력을 위한 혁신센터와 학습센터의 소장을 역임해왔으며 미국 과학재단 연구상, 미시간 주 최우수 교수상, 미국공학교육학회 교육자상 등을 수상했다. 잘 가르치고 싶다는 교육에의 열정이 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제 그는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진정한 교육을 펼칠 수 있는지에 대해 가장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전문가가 되었다.



절망하는 교육자들

조벽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EBS다큐프라임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나름대로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는 현직 교사들의 멘토로 출연해 진정한 교육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콕콕 짚어주는 그의 모습이 통쾌하다 싶을 만큼 대단했다.
이처럼 그는 ‘교사를 가르치는 교수’로 더 유명하다. 가르치는 사람을 가르친다. 즉,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 그이기에 최근의 학교붕괴 현상에 대해 안타까움을 크게 드러냈다.
“최근 교실 분위기의 현상은 가정 붕괴 현상과 맞물려 있어요. 사실, 옛날에는 가정에서 인성을 가르치고, 학교에서는 교과만 가르치면 되었거든요. 하지만 가정이 붕괴되면서 학교가 떠맡아야 하는 교육의 영역이 더 광범위해지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기는 거고요.”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학생은 선생을 불신하며, 학부모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매번 정부에서는 교육혁신을 부르짖지만 더 나아지기는커녕 아이들의 부담만 가중되는 형국이다.
“이건 교육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 사회의 모든 문제는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교육문제, 정치문제, 경제문제를 모두 따로 놓고 보니 풀릴 길이 없습니다. 모든 분야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풀어나가야 하는데 서로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하기만 해요.”
조벽 교수는 그동안 많은 교사들을 직접 만나고 상담해왔다. 지난 10년 간 그가 교사들을 만나며 내린 판단은 ‘점점 절망하는 교사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것.
“절망하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사인이라고 봐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희망을 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희망을 줘야 할 주체인 교사들마저 절망하게 하는 교육이라면 학생들도 절망을 배울 수밖에 없는 거죠.”
사람이 절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있다. 즉, 많은 수의 교사들이 교육으로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에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 교사들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교사란 많은 것을 아는 사람,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에요. 교사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희망의 신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자는 한 사람의 인생의 한 부분에 개입해 변화를 일궈내야 하고, 그 변화는 반드시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조 교수는 ‘교육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즉, 인성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라는 소리다.

"교사란 많은 것을 아는 사람,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에요. 교사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희망의 신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자는 한 사람의 인생의 한 부분에 개입해 변화를 일궈내야 하고, 그 변화는 반드시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틀을 깨라

하지만 이미 지난 수십 년의 시간동안 우리나라 교육계의 방향은 점점 비정한 경쟁주의, 치열한 입시지옥 쪽으로 고개를 튼 지 오래다. 아이들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학교와 학원을 왔다 갔다 하고, 어른들은 네 탓이니, 내 탓이니 옥신각신하며 싸우는 데만 급급하다.
“치열한 입시지옥 그 이면에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진짜 현실이 숨어 있어요. 매년 200여명의 10대 아이들이 자살을 택하고, 152명의 아이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한다고 합니다. 또, 세 명 중 한 명은 진심으로 학교를 떠나고 싶어 하죠. 이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학교부적응 학생들은 나중에 성장해서도 사회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커질 겁니다. 그 사회적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까요?”
아이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교육은 결국 학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이는 나중에 부메랑처럼 엄청난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올 거란 소리다. 특히 학교에서 벌어지는 기가 막힌 사건 사고들은 그 빈도가 예전에 비해 훨씬 잦아지고 있다. 이미 현장에서는 ‘이거 큰일 났구나’하는 위기감이 팽배하다고.
“이건 분명 위험한 조짐입니다. 지혜로운 사회는 이런 조짐이 눈에 보일 때 적절한 대응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회는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지경에 가서야 허겁지겁 뒤처리를 하죠.”
우리나라의 교육계가 지금 무척이나 중요한 순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모든 교육인들이 직시해야 한다고 조 교수는 강조했다.
이처럼 공교육이 무너져가고 있는 데에는 앞서 언급했듯 학교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 너무 광범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교수는 교육의 틀이 앞으로 좀 더 유연해지고 넓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교육계 종사자들은 선을 긋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공교육과 사교육의 대립이 심한데 앞으로의 평생교육시대에는 이러한 구분이 점점 의미없어질 겁니다. ‘교육=학교교육’이라는 생각의 틀부터 깨야 합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평생 일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패턴이었을 때는 그 구분이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라는 거다. 대기업에서 신입사원 한 명에게 투자하는 교육비가 대학 4년 등록금에 맞먹는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공부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고 익히며, 그것은 삶을 더 윤택하게 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를테면 기업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통해 학위를 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겠죠. 일하면서도 학위를 딸 수 있다면 굳이 대학 입시에 매달릴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전통 교육기관이 모든 것을 독점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교육혁신이 더 느려지고 있습니다.”

교육, 그 의미를 확신하다


조벽 교수는 언젠가 교육과학기술부 정책 모임에서 정식으로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사교육을 정규교육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즉, 사교육을 정식 협력기관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제 교육은 초중고등학교, 대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학습의 장이 되어야 한다.’
“사(私)교육이 문제가 아니라 사(死)교육이 문제죠. 훌륭한 교육은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는 교육이에요. 지금도 적성에 따라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학생들만 예고나 과학고에 갈 수 있을 뿐이죠. 그조차 등급이 매겨져 선을 긋는 데 이용되고 있어요.”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한 학생들이 사교육을 선택하는 것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미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고 있는 사교육의 인프라를 정규 교육으로 흡수하고 인정해주면 어떻겠느냐고 그는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외면하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구체화하고 조직화해서 교육의 틀을 제대로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평생교육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학위나 간판이 아닌 진정한 실력과 자신만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의 말처럼 이렇게 세상은 쉴 새 없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의 마인드와 라이프스타일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교육자들이 거기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계속하지 않는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교육계는 많은 분야 중에서 가장 변화가 느리고 보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유를 조 교수는 시스템과 교육의 방향이 불일치하는 데서 온다고 설명했다.
“말로는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 학교 현장에서 창의적인 학생은 튄다고 욕을 먹잖아요. 시스템과 교육의 방향이 맞지 않는 거죠. 그 사이에서 교사들과 학생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의 방향에 시스템을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만 진정한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 가 없을 터이다.
“유능하고 행복한 사람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랍니다. 교사들이나 강사들이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어떤 이가 ‘나로 인해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서 뭘 가르치든 분명 훌륭한 교육자일 겁니다.”
by 트래블러 2011. 11. 22. 03:16

노란 개나리꽃이 안내하듯 늘어선 통나무 계단을 오르니 봄볕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나는 2층집이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자발적 시골살이로 수만 가지 선물을 얻었다는 다큐멘터리 작가 박지현 씨. 그녀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살림’은 ‘살리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냉장고의 오래된 반찬을 정리할 때, 세탁물 분리를 제대로 안 한 바람에 멀쩡한 옷을 버려야 할 때 그 의미를 절감했다. 잘하면 살림, 못하면 죽임. 이거 만만치 않은 일이구나. 담양의 소문난 살림꾼, 박지현 씨를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4시간을 달려가면서 기대감에 부풀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한 세련되고 정갈한 풍경 속에서 사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부지런하고 깔끔을 떨어야 하는 걸까. 과연 그녀의 안내를 받아 둘러본 집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감각 있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지런함과 꼼꼼함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거리 두기였다.

마당과 길 어귀에서 뽑아온 머위와 돌나물, 쑥 등으로 봄 냄새 물씬 풍기는 점심을 먹은 후 그녀의 살림 이야기가 시작됐다. 까다롭지도, 유난스럽지도 않은 그녀의 살림은 집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자연과 인간, 가족과 이웃을 관통하는 우주 이야기로 다가왔다.

(좌)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소문난 살림꾼으로 <열두 달 살림법>이라는 단행본까지 출간한 박지현 씨.
(우)박지현 씨 부부가 직접 설계에 참여한 40여 평 규모의 2층짜리 집. 부부와 두 아이가 머무는 행복한 보금자리가 된 지 벌써 10년이다.

Story 1 감나무가 준 지혜, 욕심 버리기

그녀의 집 바로 옆에 박지현 씨 가족이 이사하기 전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감나무가 있다. 따로 거름을 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아도 해마다 알이 토실토실한 단감을 먹게 해주는 고마운 이웃이다. 어느 날 지현 씨가 집 안에 있는데 감나무 있는 쪽에서 ‘뚝’하고 큰 소리가 나기에 급히 나가보았다고 한다. 집 방향으로 뻗어나간 허벅지만 한 굵기의 큰 가지가 부러져 땅에 떨어졌더란다. “참 굵고 튼튼한 가지였거든요. 사람 지나가는 방향으로 뻗어 있어 베어버릴까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저절로 떨어져나간 걸로 보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큰 나무는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가지는 스스로 떼어낸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낸다는 것은 나무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더 깊게 뿌리를 박고, 더 멀리 가지를 뻗는 것은 본능적인 성장 욕구가 아닌가. 즉, 단출한 삶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시킨 것이다.

“꽤 큰 가지였으니까, 작은 욕심은 아닐 거예요. 자식 욕심일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겠죠. 내가 저 감나무만도 못한 사람이구나,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감나무뿐만 아니라 사방에 반성할 거리가 지천이에요.” 방송작가로 바쁘게 일해왔던 박지현 씨도 성공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에 가족들을 두고 서울 작업실에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시골에 내려와 살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로 맘먹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후배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유혹이죠. 둘 다 병행하고는 있지만, 작가로서 명예를 얻느냐, 살림에 몰두하느냐 선택의 고비가 와요. 사실 방송작가로 이름을 높이려면 들어오는 일을 다 해야 하는데, 여기 살면서 성공에 대해, 그리고 성공이 가져다줄 행복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어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꼭 성공해야 하나 싶은 거죠. 이대로 착한 아줌마로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고….”

많은 고민 끝에 서울 작업실을 완전히 철수하고 내려온 것이 3년 전이다. 그녀가 욕심을 버리기로 한 것은 비단 일뿐만이 아니다. 살림에 대해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대단한 살림꾼라고 칭송받는 그녀도 고단하고 힘들 때면 며칠씩 청소를 놓아버리기도 한다. 저절로 하고픈 마음이 들 때까지 말이다. 그녀에게 설거지며 청소, 커튼 만들기와 된장 만들기 등의 살림은 원고 쓰기가 힘에 부칠 때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놀이이며 여흥이었다.

염색공예가인 친동생, 박희연 씨가 선물해준 하늘 무늬 광목. 봄 커튼으로도, 탁자보로도 쓰임이 다양하다.

Story 2 배롱나무의 가르침, 더불어 살아가기

거실 유리창 밖으로 곧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헐벗은 배롱나무 세 그루가 보였다. 그녀는 이 나무를 보면서도 온갖 생각에 잠긴다. “가운데 나무는 앞쪽으로만 가지를 뻗었고, 왼쪽에 있는 나무는 오른쪽으로 거의 가지를 뻗지 않은 거 보이죠? 서로 조금씩 양보해가면서 자리를 잡은 거예요. 일부러 가지치기를 한 적도 없는데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나무도 저렇게 양보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구나 싶어 존경스럽더라고요.” 그녀가 시골에 와서 얻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라고 했다. 처음 귀농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사방이 일 천지였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라났고, 쑥이며 머위 같은 나물들을 욕심껏 수확해 데치고 말리는 것도 일이었다. 냉장고에 가득가득 채워놓으면 마음이야 배불렀지만 어떻게 다 해치워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한 2년간 잡초와 전쟁을 해요. 시골에 예쁜 집 짓고 푸른 잔디밭 가꾸며 사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거든요. 그런데 하루 이틀만 신경을 안 써도 잡초가 자라서 다 뒤덮어버려요. 말끔히 모아 마당 어귀에 쌓아놓으면 거기서 또 씨를 뿌린다니까요.” 지현 씨는 2년 만에 ‘잡초와의 전쟁’에서 ‘잡초와의 평화’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제는 ‘잡초와의 행복’을 꿈꾸고 있다. “잡초의 기준이 뭘까 생각해보니까, 사람이 기르지 않은 것은 다 잡초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쑥도, 민들레도 다 잡초예요. 이런 풀들이 얼마나 쓸모가 많아요. 잡초가 피우는 꽃도 얼마나 예쁜지요. 새삼 대단하게 여겨지더라고요. 아웃사이더로 구박받으면서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살아남아 예쁜 꽃을 피워냈잖아요. 그러고 보면 잔디는 늘 똑같은 얼굴만 보여주니 지루하지요. 재미없는 초록이에요. 그저 ‘나를 보호해주세요’ 응석부리는 아기 같아요.”

뜨거운 땡볕 아래서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고 있다가도 비만 오면 생생해져서 허리를 곧추 세우는 잡초들의 변화무쌍한 생명력.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뿌리내린 풀들은 그 빳빳함이 씩씩하고, 사람 다니는 길가에 핀 민들레는 땅에 바짝 엎드려 조용히 꽃을 피운다. 그 하나하나가 때론 미소 짓게 하고, 가끔은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잡초 한 포기가 좋은 책, 친구, 선생님 부럽지 않게 한다.

잡초와 ‘화친’한 후부터는 먹을거리에 대한 욕심도 많이 버렸다. 쑥이든 머위 나물이든 그때그때 한 움큼씩만 뽑아서 국도 끓이고 전도 부친다. 조금씩 요리하고 나누니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재미나고 삶도 여유 있어졌다고 했다. 살림이든 일이든 적당히 즐기고 조금씩 남과 나눌 수 있을 정도면 족한 삶. 그녀가 찾은 행복이다.

창이 크게 난 거실은 가구나 물건을 최소화해 누구나 가볍고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Story 3 된장에게 배운 스밈의 철학

해마다 봄이 오면 그녀도 한 해 동안 요리의 기본이 되어줄 된장을 담근다. 광주에 사는 친정어머니가 뜨끈한 방바닥에서 숙성시킨 메주를 가져다주면 지현 씨는 그날로 간장을 거르고 된장을 담근다. 그녀는 된장을 담그면서도 인간관계의 속성을 배운다. 곰팡이 가득 핀 메주에 소금물이 스며 된장과 간장의 깊은 맛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도 서로 스미는 과정을 통해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좌)주로 손님이 많이 찾아올 때 이용하는 식당 겸 응접실. 냉장고와 그릇 수납장, 벽난로까지 있는 다용도실이다.
(우)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녀는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운동이 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스미지 못하는 곳이 없어요. 스며들 곳이 전혀 없어 보이는 옹기 항아리에도 바람이 스미고 된장 냄새가 배거든요. 된장을 담아뒀던 항아리는 몇 번을 씻어내도 그 냄새가 남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해요.” 살림 하나하나, 사람살이의 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녀는 살림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서로 스미지 못하면 그저 짜기만 한 소금물이 어떻게 간장으로 변신할 것이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메주가 깊은 대지의 맛을 간직한 된장으로 바뀐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는 없다.

오래된 전축과 고가구의 조합이 그럴싸하다. 이 적절한 매치를 위해 지현 씨는 친구를 통해 직접 맞춤 제작했다.

보통 귀농을 결정할 때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도시에서 맺었던 인간관계가 단절되지 않을까, 하는 고립감에 대한 우려다. 그러나 박지현 씨의 경우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덕분에 교류가 오히려 늘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가까이에 사는 동생이 선물 받은 새송이버섯을 나누려고 방문하기도 하고, 이웃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그녀의 사는 모습을 보고 동생을 비롯해 시누이네 가족까지 근처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고 했다.

(좌)살이 부러진 그릇장에 아이가 그린 그림을 붙여놓았다. 집 주변에서 들꽃을 꺾어다 작은 백열전구를 꾸며놓은 센스도 돋보인다.
(우)어느 시골집 대문일까? 그대로 버려질 뻔했던 대문 한 짝이 앤티크한 멋이 살아 있는 앉은뱅이책상으로 변신했다.

“요즘 시골에는 젊은 사람이 워낙 없으니 토박이 어르신들도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셨는지 몰라요. 제가 게으른 농사꾼이라 텃밭을 만들어놓고도 신경을 안 쓸 때가 많은데, 건너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보다 못해 싹 다 베다가 깨를 털어다 주셨어요. 저는 생각도못하고 있다가 ‘웬 깨예요? 고맙습니다’ 했더니 무심하게 그러시더라고요. ‘자네 거여. ’”(웃음)

중학교에 다니는 딸, 소희의 방에는 다락까지 만들어주었다.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소녀적 감성이 물씬 풍긴다.

그녀도 처음부터 자연의 풍요와 경이를 만끽하며 전원생활에 빠져든 것은 아니다. 도시의 편의시설에 익숙했던 터라 근처에 슈퍼마켓이나 식당이 하나도 없다는 게 너무도 불편했다. 결국 직접 해 먹거나 굶어야 하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 것. “시골 환경이 절 살림꾼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먹을 게 없으니까 가까이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에 눈이 가더라고요. 특히 이웃 할머니들이 가라지, 자운영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나물을 한 줌씩 가져다주시는데, 그제야 풀 맛을 알겠더라고요. 어렸을 때 저희 할머니께서 꼭 3가지 나물 반찬을 상에 올려주시곤 했는데 그 맛이 떠올랐어요.”

상추, 감자, 미나리, 옥수수, 대나무 등 웬만한 식재료는 집 근처 텃밭이나 길가에 널려 있었다. 부족한 것은 대체할 줄 아는 지혜도 생겼다. 그것이 창의적인 살림법의 밑바탕이 되었다. “하다못해 오이 하나도 맛이 달라요. 재료의 맛이 다른데 어떻게 레시피가 똑같을 수 있겠어요. 노지에서 나는 나물은 하우스에서 재배한 나물보다 훨씬 달아요. 그걸로 국을 끓일 때는 양파를 덜 넣는다든지, 계속해서 새로운 노하우가 생기더라고요.”

(좌)컴퓨터가 있는 작업실 겸 서재. 집을 짓다 남은 목재로 책상도 만들고 책장도 꾸몄다.
(우)요즘 헬렌 니어링의 책에 푹 빠져 있다는 박지현 씨. 햇살 가득한 온실 같은 베란다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골에 와서야 비로소 진짜 입맛이 살아났다. 하루 세 끼 양껏 밥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아이스크림보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미숫가루를 더 좋아한단다. 그녀가 시골살이를 통해 받은 선물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Story 4 창의적 살림의 기본, 거리 두기

그녀의 집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손님 온다고 대청소한 거 아니에요?” 거실이며 애들 방에 잡동사니 하나 허투루 놓인 데가 없고, 구석구석 먼지 한 톨 찾아보기 힘들다. 작은 테이블에 센스 있게 놓인 마른 꽃과 열매들, 부엌에는 모양대로 크기대로 보기 좋게 정리해둔 그릇들. 정갈하고 깔끔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모델하우스처럼 너무 깨끗해서 건드리기 어려운 깔끔함이 아니라 머무는 이의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둥지 같은 느낌이다. “손님들이 놀러오면 저희 애들한테 몰래 물어본대요. ‘솔직히 말해봐. 평소엔 어지르고 살지?’ 우리 애들은 솔직하게 대답하죠. ‘항상 이래요. ’ 저는 정리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강박관념을 가지고 청소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편은 아니에요. 언제까지 이걸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기 시작하면 스트레스죠. 사람들은 늘 깨끗한 모습만 보니까 제가 엄청 부지런한 줄 알아요.(웃음)”

그녀가 짧은 시간에 재미있게 정리 정돈하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테트리스 청소법’이다. 모양에 맞게 끼워 맞추는 테트리스처럼 물건도 맞는 자리에 끼워 넣듯 채우는 것이다.

“만약 33평 아파트를 1억 전세로 산다고 쳐요. 방 하나는 창고처럼 변하고, 잡동사니 때문에 안 쓰는 공간이 늘어나다 보면 결국 절반밖에 안 되는 17평에 사는 셈이 돼요. 그럼 1억이 아니라 5천만원짜리 집에 사는 거잖아요. 물건들이 나머지 5천만원짜리 공간을 쓰고 있는 거고요. 이자로 따져도 얼마나 손해예요? 제가 가서 보면 다 들어갈 자리가 있는데 끼워 맞추지를 못하는 거예요. 만약 도저히 새로운 물건을 넣을 공간이 없다면 버리는 게 현명한 거죠.”

살림도, 정리 정돈도 잘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거리 두기를 하다 보면 창의적인 방법이 떠오른다는 것이 박지현 씨의 이론이다. 그것은 육아 문제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상경한다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녀들을 위해 시골로 내려왔다. “가까이에 붙잡아두고 지식을 집어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오히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메마른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자극이 되는 것도 많고요.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 새로운 풀들, 꽃이 피고 지는 모습…. 모두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좋은 요소가 되죠."

1. 나무 조각과 한지로 직접 만든 조명. 집을 지을 때 만들면서 해마다 바꾸리라 계획했지만 10년째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2. 빨래판 하나에서도 친환경적인 센스가 돋보인다.
3. 시골 장터에서 어느 할머니로부터 구입한 4만원짜리 조각보를 지현 씨는 딸 방에 커튼으로 달아주었다. 면과 모시 등 갖가지 흰 천으로 정성스레 만든 조각보가 햇살을 곱게 쪼갠다.
4.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달려 있는 조명은 어렵게 맘에 드는 것을 구입한 것이다. 정 맘에 드는 게 없으면 맞춤 제작을 해서라도 갖고 만다.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형준이는 관찰력과 호기심이 유별나다고 했다. 꿈은 왜 꾸는지, 봄에 개털은 왜 빠지는지, 유행가에는 왜 사랑 노래가 많은지 궁금한 것도 많고 스스로 찾아나가는 능력도 탁월하다. 어린 나이에 벌써 프로이트 책을 읽는가 하면 요즘엔 어린이용으로 제작된 니체의 철학서도 읽을 정도로 사유의 폭이 넓다. 실컷 놀고,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런지 학교 공부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단다.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 학교에서 시험만 보면 늘 ‘올백’이란다.

사춘기인 첫째 딸 소희의 구김살 없는 성격과 꿋꿋함도 자연이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보통 아이라면 못 참을 상황도 소희는 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잘 견뎌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유독 옆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와 짝이 됐는데 선생님이 얘만 짝을 안 바꿔주는 바람에 1년 가까이 고생을 했어요. 힘들면 말하라고 했는데 나름대로 대처를 잘하더라고요. 준비물도 그 아이 것까지 두 배를 챙겨가고, 허물을 덮어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걔가 친해지자며 편지까지 주더래요.” 그 어린 나이에 어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지혜를 깨우친 것이다.

1. 액세서리를 적당한 곳에 걸어놓은 것뿐인데도 멋진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했다.
2. 그녀의 꽃 사용법은 무궁무진하다. 잘 말려 인테리어 용도로 쓰기도 하고, 전으로 부쳐 먹거나, 두부나 샐러드 위에 보기 좋게 뿌려 먹기도 한다.
3. 물기 가득 머금은 다육 식물. 집 안 이곳저곳의 크고 작은 화분이 자연의 향기를 더해준다.
4. 금속으로 만든 나뭇잎 모양 브로치. 겨울에는 브로치로 쓰다가 커튼을 고정시키는 핀으로도 사용한다.

시골에 온 후 가족 모두가 건강을 찾게 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큰 선물이다. 치과의사인 남편 전상운 씨는 이곳에서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익힌 덕분에 무려 15㎏이나 체중이 줄었단다. 아파트에 살 때는 늘 아토피로 고생하던 소희도 시골집으로 이사한 지 몇 년 안 되어 증상이 싹 나았다. 지현 씨 또한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 알레르기 증세가 거짓말처럼 낫는 것을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고. “많은 사람이 행복을 고민하지만 ‘파랑새는 늘 가까이에 있다’는 교훈을 쉽게 잊는 것 같아요.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살림, 내가 만든 밥상을 고마워하는 가족, 아름다운 자연이 내게 일러주는 가르침. 주어진 행복을 온전히 누리기에 우리 삶은 길지 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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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낭암으로 투병 중이던 박완서 작가가 지난 1월 세상을 떠났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지만 늘 시대의 아픔 한가운데서 민중과 함께 호흡했던 작가. 때로는 따뜻하게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촌철살인의 어조로 현대인의 허위의식을 꼬집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아주 오랫동안 아련한 여운이 남는다.

1월 22일 새벽, 한국 문단의 살아 있는 역사인 박완서 작가가 영면에 들었다. 그녀의 장례식장 입구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평소 “내가 죽으면 찾아올 문인 중 가난한 이가 많으니 절대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한 고인의 뜻을 유족들이 따른 것이라 했다. 이처럼 박완서 작가는 유독 후배 작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했던 사람이다.

작가 박완서를 있게 한 근원적 힘

그녀가 담낭암 선고를 받은 것은 지난해 9월. 그 다음 달에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아 투병 중에도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심사를 맡아 병상에서 후보작을 읽을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심사 당일. 심사 장소에 나갈 수 없었던 그녀는 미리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문학상 심사였다. 그리고 끝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순 없었는지, 1월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흔히 작가들은 작품 속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킨다고 하지만, 공공연하게 사적인 삶을 드러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누구에게나 마음 한편에 존재하는 속물같이 질척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특히 민중 문학과 모더니즘이 격돌하던 1980~1990년대에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여성 소설가의 현대사 체험담은 ‘프티 브르주아’라는 평을 듣기 좋은 작품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럽다는 변명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비교적 솔직하게 소재로 활용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고, 나아가 자신의 유년의 삶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작품까지 발표하기에 이른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한 수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그녀의 문학이 ‘복수(復讐)로서의 글쓰기’ 혹은 ‘증언 문학’으로 표현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박완서 작가는 황해도의 시골 마을인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아비처럼 여기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실개천에서 물장구를 치고 풀과 꽃을 뜯고 산 열매를 먹으며 놀던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그녀와 그녀의 오빠를 데리고 상경하기에 이른다. 예닐곱 살 적에 이미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낄 만큼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울에 첫발을 내딛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과 시궁창 물이 흥건한 현저동 풍경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녀 적에 [삼국지]와 [수호지]를 읽고 그 내용을 술술 욀 정도로 박식했고 모성애 또한 남달랐다. 특히 반닫이 속에 가득했던 어머니의 책들을 그녀는 평생 기억했다. “나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 앉아 이야기를 졸랐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길로 믿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심심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 할 때도, 남과 같이 고운 옷을 입고 싶어 할 때도, 약아 빠진 서울 아이들한테 놀림 받아 자존심을 다쳤을 때도, 고향 친구가 그리워 외로움을 탈 때도, 시험 점수를 못 받아 기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이처럼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한테서 들은 숱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를 들으면서 직접 확인한 ‘이야기의 힘’은 박완서 문학이 존재하게 한 든든한 기둥이었다.

치열하게 살아낸 뒤 비로소 문학을 만나다

그녀가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때 박완서 작가의 나이 스물이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그녀는 학교 민청 조직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좌익에 가담했다가 의용군으로 떠나버린 오빠 때문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녀로 하여금 펜을 쥐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반공이 애국이 되고 복수와 밀고가 줄을 잇던 시절, 그 시대의 아픔은 그녀의 뇌리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시민증이 없는 오빠 때문에 피난 대열에도 합류할 수 없었던 일가는 처음에 자리 잡은 현저동에 몸을 숨긴다. 그러나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돼 오빠는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오빠는 어릴 적부터 명민하고 훤칠해 그녀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작은 영웅이었다. 그러한 오빠를 앗아간 전쟁에 대한 악의(惡意)는 박완서 소설의 가장 커다란 화두가 된다. 벌레와 같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들. 그녀가 언젠가 글을 써 증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인년 꽃다운 20세에 6. 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그녀의 이러한 증언 욕구와 복수 의지는 등단작 ‘나목’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났다. 박완서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은 ‘대체 소설의 경계가 어디인가’를 되묻게 할 정도로 흡사하다. 1950년 겨울 서울을 무대로 삼은 이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스무 살을 되돌아보듯 여주인공을 스무 살로 설정하고 전쟁통에 목숨을 잃은 오빠들과 그로 인해 생의 의지를 놓은 어머니를 담담히 그려냈다. 실제로 그 시절 그녀는 오빠의 죽음으로 반송장처럼 지내는 늙은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 둘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젊은 남자만 보면, “왜 저 사람은 살아 있냐?”, “왜 하필 내 아들만 죽었냐?” 라며 애통해하며 세상을 증오했다고 한다.

때는 1951년 겨울.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녀는 수없이 발품을 판 끝에 미국 PX 초상화부 점원이 된다. 당시 서울에 그만한 일자리도 없었다. 다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사족을 못 쓸 정도였다고. 하지만 말이 근사해 초상화부지,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간판장이 대여섯 명이 앉아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몇 푼 버는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녀가 평생 잊지 못한 중요한 일화가 탄생한다. 바로 화가 박수근을 만난 것이다. 어느 날 덩치만 크고 어수룩해 뵈는, ‘박씨’라고만 알고 있는 화가가 화집 한 권을 들고 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평소에 공용 허드레 붓을 안 쓰고 자기 붓으로만 초상화를 그리는 박씨를, 그녀는 그렇잖아도 속으로 비웃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박씨가 자기 그림이라며 가리킨 시골 여자 둘이서 절구질하는 그림 밑에는, 박수근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제야 박씨의 이름을 알게 된 그녀는 간판장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너무 버르장머리 없이 군 게 더없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박수근뿐 아니라 PX에는 서울대 출신이나 재학생도 있었고, 청소 아줌마 중에 중학교 교사 출신도 있었다. 전쟁은 인간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걸, 그녀는 뒤늦게 깨닫게 된다. 박수근이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될 줄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유명 화가가 될 줄 알았다면, 그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박수근의 그림 몇 점쯤은 손쉽게 얻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8호 정도의 초상화가 단돈 6달러, 그것도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절반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겨우 목숨줄이나 이어가는 정도랄까. 박수근은 가난했지만 의젓했다. 모두 돈! 돈! 돈! 하며 한 푼에 치를 떨 때도 박수근은 돈에 비교적 미적지근했다.

“훗날 박수근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매우 기뻤지만, 그의 생전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그녀 나이 마흔 살이었다.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으나 마음 같지가 않았다. 논픽션에는 사실이라야 한다는 족쇄가 따랐기 때문이다. 자기표현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전환한다. 이렇게 대학 노트에 촘촘히 기록해가며 완성한 작품이 바로 데뷔작 ‘나목’이다. ‘나목’은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그해 11월호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래도 글쓰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현대문학]에 단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실렸다.

운명의 아픔과 정통으로 맞닥뜨리다

그녀가 비로소 ‘작가’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신동아>에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가 실리면서부터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얼마 있다가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되기도 했다. 연이어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녁의 해후’, ‘아저씨의 훈장’, ‘엄마의 말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이때 작품들은 한결같이 소위 분단의 문제라고 하는 주제를 다뤘으며, 이를 통해 비통한 그녀의 가족사를 줄기차게 내비쳤다.

늦은 나이에 등단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박완서 작가는 등단 이후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 정력적으로 글을 썼다. 작가로 살았던 40년간 책을 내지 않은 해를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역이었다. 그러나 문학성과 대중적 인기를 양손에 거머쥔 그녀의 작가로서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88년. 그해 5월, 남편 호영진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편이 죽기 전 마지막 1년을 간병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 이때의 절절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매일 밤 남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소설의 모티브인 여덟 개의 모자는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제 때문에 남편에게 탈모가 생기자 하나둘 사 모은 것이다. 간병하면서 느낀 절망과 짜증, 슬픔과 애정뿐만 아니라 모자에 얽힌 신혼 때의 추억까지 그대로 작품에 녹여냈다. 그러나 그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지독한 슬픔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은 지 불과 3개월 만에 스물다섯밖에 안 된 외아들 원태마저 먼저 보내야 했던 것이다. 딸 넷을 내리 낳고서야 볼 수 있었던 귀한 아들이었다.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아들은 마취과 의사가 꿈이었다. 그러면서도 연극을 사랑해 연극 [세일럼의 마녀]에서 주연을 하고 [코뿔소]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아들의 묘비명을 직접 썼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 남편을 보내고 자식마저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부산 분도수녀원으로 들어간다. 20여 일을 하느님과 대결하며 산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였다. 남편과 아들이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쓴다는 게 사치요, 욕심이지 싶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 글은 그녀에게 공기였다.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공기.

“내 기억력 말고는 아들이 존재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낯설고 싫다. 그런 세상과는 생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처넣는 어미라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 끔찍하고 징그럽다.

” 어려서 잃은 아버지와 젊은 시절 먼저 보낸 오빠, 그리고 남편과 아들까지 집안의 남자들을 차례로 앗아가는 운명의 심술에 그녀는 통곡했다. 그녀는 슬픔을 잊기 위해 소설에 집착했다. 잠시 서울을 떠나 부산의 수녀원에서 한동안 기거하다가 막내딸이 있는 미국에 머물기도 했다. 당시 잡지에 연재하고 있던 ‘미망’을 6개월 정도 쉬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절망하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한동안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의미를 곱씹어본 끝에 나온 작품이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와 중편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한편, 휴재했던 대작 ‘미망’을 힘겹게, 그러나 끈질기게 마무리한 후 90년대에 들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라는 두 자전적 장편을 통해 자신을 소설가의 길로 이끈 첫 자리를 차분히 돌아보았다.

늘 주위를 어루만진 어머니 문인의 삶

작가 박완서의 삶을 되돌아볼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늦깎이 데뷔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섯 아이를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이라는 나이에 등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40년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써온 글이 바로 그녀를 영원한 현역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소설은 늘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삼았다. 마치 저잣거리에 나가 찬거리를 마련하듯 그렇게 소설을 쓰지만, 실상 뼛속의 진까지 다 빼는 고통이 따랐다.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나 사춘기에 섭렵한 문학 작품 그리고 애통한 가족의 슬픔과 응어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녀를 소설로 밀어냈기에, 쓰지 않았으면 지레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전쟁의 상처와 가족의 문제, 소시민의 의식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언어의 조탁도 탁월해 “유려한 문체와 빈틈없는 언어 구사는 가히 천의무봉”이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다. 등단은 늦었으나 작품 활동은 왕성했다. 덕분에 생전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보관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휩쓸 정도로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또한 후배 작가들에게 한없이 다정한 어머니 같은 존재로, 한국 문학의 대모라 불렸다. 박경리 작가가 곧고 카랑카랑한 여장부 엄마였다면, 그녀는 수줍은 소녀를 마음속에 간직한 자상한 엄마랄까. 그녀가 후배 작가들 가슴속에 심은 엄마의 초상은 신화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었다. 그것도 전통 농경사회의 엄마가 아니라 도시 중산층의 엄마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자식들을 낳고 기르느라 삶을 희생하다가 자식 세대와 소통하기 어려운 옛날 엄마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에 의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거덜이 나 이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넌더리를 냈다. 그런 만큼 균형감각을 가지고 현실과 사회를 고민했다. 그녀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당시 협의회 소속이었던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박완서 선생이 수백만 원씩 도와줘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85년에 문예지 [창작과 비평]이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을 때도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3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문화공보부에 내기도 했다. 평론가 김화영 씨는 “고인은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중간에 섰던 분이다. 우리 문단에 이런 분이 다시 없다”며 애통해했다.

박완서 작가와 아름다운 인연을 만든 이해인 수녀 또한 추모시를 써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엄마의 미소처럼 포근한 눈꽃 속에 / 눈사람 되어 떠나신 우리 선생님/ 고향을 그리워한 선생님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흙 속에/ 한 송이 꽃으로 묻고 와서 우리도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을 더 깊이 사랑하는 꽃/ 선생님의 인품을 더 곱게 닮고 싶은/ 그리움의 꽃이 되었습니다.” 1년에 몇 번씩 혼자 기차를 타고 역시 암 투병 중이었던 이해인 수녀의 수도원을 찾아갈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지난해 11월 초였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저녁도 먹고, 기도도 해드렸어요.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도 이리 힘든데 수녀님은 더 힘들지 않으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따님이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는 제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만나면 이별의 아픔, 언젠가는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잘 죽는 것이 과제라고, 어떻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고 죽을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하며 기도해야겠다고.”

1982년 그녀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도 늦깎이였다.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것 이상으로 매일매일 탄탄한 신앙을 쌓아갔다. 물론 아들을 잃었을 때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몇 달을 극도로 화를 내며 싸우기도 한 그녀다. 물론 상대는 하느님이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길어 올린 그녀는 스스로의 삶과 신앙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한다. 가톨릭 신문, 문화 및 시사 칼럼 등을 통해 신앙적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고, 서울주보에 연재한 글은 묵상집으로도 엮어냈다.

평소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 선배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데도 쉼 없이 내달린 작가였다. “내 눈으로 보고 어떻게 돕지 않을 수 있느냐”며 누구보다 먼저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작가였다. 1993년 3월 유니세프와 소말리아 난민촌을 방문해 현지의 열악한 상황을 돌아본 뒤 친선대사를 결심한 그녀는 같은 해 5월 영화배우 안성기와 함께 한국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위촉되었다. 그 후 유니세프 홍보사절 자격으로 몽골의 오지와 쓰나미 피해 지역인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등을 찾아가 어린이들의 상황을 살피고, 비극적인 현실을 글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 지구촌 어린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그 작은 체구에서 그런 힘이 어떻게 나올까 싶을 정도로 단호하고 날카로운 시선, 내면을 드러내는 글은 그녀를 1970년대를 풍미한 작가, 80년대 인기 절정의 작가를 넘어 평생 우리 곁에 남는 작가로 만들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도 손에서 종이와 펜을 놓지 않았던 그녀. 여느 작가들이면 진작 펜을 놓았을 시기인 70대에 펼쳐낸 창작 활동은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생전의 마지막 책이 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출간했다.

문학에도 세대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녀의 문학에 비교적 익숙한 40대 이상, 특히 여성들이 존재한다면, 그녀의 소설을 비교적 뒤늦게 알아챈 30대 이하 젊은 세대와 남성들도 대다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의 소설은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소화해내기에는 시대에 뒤처진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를 소설가의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 우리 부모, 때론 할아버지 세대의 용감한 증언자이자 한 위인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저작의 맨 앞날개나 뒷날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짤막한 이력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쉬운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세대가 경험했던 특별한 기억들, 특히 6. 25라는 비극이 가져온 삶의 변화를 남들이 침묵하고 숨기려 할 때 그녀는 여성의 관점에서 차근차근 증언해냈다. 그녀는 한국전쟁을 함께 경험한 동시대인들에게는 용기 있는 증언자였으며, 오빠나 남편을 잃은 여성들에게는 아픔을 공유한 소중한 동지였다. 또한 급속하게 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 마흔에 데뷔한 소설가로서의 삶은, 후배 여성들에게는 따라하고 싶은 성공 모델이 되었고, 각박한 경쟁 속 젊은이들에게는 따뜻한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험난한 삶을 결국 ‘살아냈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심장부터 발끝까지 떨리는 전율을 느끼듯 그녀의 삶에 많은 사람이 깊은 존경과 애도를 보내는 이유다.

진행_홍유진

출처_리빙센스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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