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신정일 (문화사학자)



사람들의 가슴 속엔 저마다의 풍경들이 살고 있다. 다양한 얼굴을 한 그 풍경들은 우리들을 추억에 잠기게 하거나, 우울하게 하거나 때로는 끝 모를 환희로 인도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발 디딜 땅이 필요하고 기댈 나무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풍경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풍경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신정일의 시선집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에는 참 많은 풍경들이 나온다. 그것은 시로, 사진으로, 때로는 작가의 입을 빌어 우리의 예민한 심장을 자꾸만 건드린다. 그리하여 결국은 책을 접고 창 밖, 어딘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걸으면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

“보름이나 한 달쯤, 전쟁터에 나선 전사처럼 죽기 살기로 걸어보라. 하루 이틀이 가고 대엿새가 지나면 밤이면 밤마다 바뀌던 꿈의 풍경이 비슷해질 것이다. 꿈 속에서도 계속 걸어가고, 길을 묻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 가을, 고즈넉한 산사와 한없이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中

그는 ‘걷는 사람’이다. 걷는다는 일상적 행위가 무슨 직업이라도 되느냐고 반문한다면,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는 걸으면서 역사를 공부하고, 지리를 익히며, 시와 글을 쓴다. 황토현 문화연구소의 소장이며 우리땅걷기 모임 대표이기도 한 신정일 씨는 길을 걸으며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운동을 쉼 없이 펼쳐왔다. 요즘도 한 달에 서너 번씩은 강으로 산으로 답사를 떠난다는 그의 여행 수단은 무조건 ‘걷기’이다. 엊그제 경주에서 돌아왔다는 그는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로 오른쪽 눈 주위를 다쳐 몇 바늘을 꿰맨 상태였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도 전, 벌써 또 다른 답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그의 걷기에 대한 열정은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태백시에서 김포까지 한강변을 차로 달리면 8시간 반이 걸립니다. 같은 길을 걸으면 얼마가 걸리는지 아십니까? 16일이 걸려요. 요즘 사람들은 물론 이해를 못합니다. 차로 몇 시간이면 갈 거리를 십수 일씩이나 걸려 힘들게 가는 게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지요. 그러나 차로 가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내가 내 발로 땅을 딛고 걷는 것이 길이지요. 그렇게 강가를 걷다 보면 매 순간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드라이브와 비할 것이 아니지요.”


풍경은 시가 되고, 시는 다시 풍경이 되고……

“나는 너무도 많은 세월을 떠돌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 진정한 ‘떠남’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기도 하고 이제야 떠나고 돌아오는 의미를 알기 시작했는지도 모르지만 새삼스럽게 세낭쿠르의 <열두번째 편지>가 마음 속에 더 깊숙이 파고든다. ‘난 될 수 있는 한 방향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할 수 있는 한 길을 잃으려고 한다.’”
– 여름, 산은 가까워지고 바다는 하얗게 춤추네 中

<다시 쓰는 택리지> 등 이미 다수의 저서를 낸 문화사학자이기도 한 신정일 씨는 원래 시인을 꿈꾸던 문학도였다고 한다. 300편의 습작시를 갖고 있지만 아직 공개해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은 그이기에 그의 발 닿는 아름다운 산천이 모두 ‘시’였으리라. “제가 시를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시 속의 배경이 되는 곳을 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또 반대로 그 장소에서 너무나 어울리는 시를 찾게 되기도 하고 지난 추억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 제 경험들이 좋은 시들을 이해하게 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의도한 바처럼 <자꾸만 그곳에 가고 싶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시인들의 친숙한 시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에세이, 또, 글과 너무 잘 어울리는 사진들이 결합된 최상의 앤솔로지가 되었다. “옛날 선비들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이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속에서 만나는 시의 아름다움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길의 시인, 아름다운 여행은 계속되다

“내가 가장 먼 길을 걸어갔던 때가 아마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일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당시 제일 부러운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다. 딴세상에 사는 것처럼 중학교에 간 아이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 – 겨울, 첫눈이 내리면 내 어두운 마음도 하얘지고 中
신정일 씨는 공부 욕심이 참 많다. 그 동안 출간한 도서만해도 30권에 육박하는데다 그 분야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인터뷰 내내 그가 정확하게 인용하는 문구의 양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돈이 없어서 어렸을 때 학교를 못 다녔어요. 그래도 책을 좋아해서 이웃집에서 빌려 읽은 책만 해도 어마어마했지요. 절박한 상황에서 읽은 책이기에 아직도 이렇게 기억에 오래 남는가 봅니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아직도 배우려는 욕심이 남다르다. 언젠가 시인의 꿈을 꼭 이뤄볼 생각이라며 마음을 다잡는 신정일 씨. 그러나 다만 그 뿐이다. 그에게 길이 집이고, 하늘이 지붕이며 전국 곳곳에 있는 사찰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터다. 서로 어우러져 한데 모여 바다로 나아가는 강물처럼 그는 오늘도 유유히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아름다운 여행이 계속되고 있다.


글, 사진 | 홍유진

by 트래블러 2009. 8. 7. 14:17











잘 나가는 대기업 엘리트 사원 10년 차가 그림쟁이로 변신했다! 독특한 이력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장석원 씨. 이제는 밥장이라는 이름을 걸고 그림으로 세상을 만난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일상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서른아홉 그림쟁이의 달콤한 인생

비정규아티스트 밥장

이름 : 장석원
직업: 일러스트레이터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SK그룹 공채에 수석으로 입사했으나 이렇게 평생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안정적인 직장을 버림. 이후 음악잡지 편집장, 각종 프로젝트 기획 등

다양한 분야를 전전하다 2005년 불현듯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 <비정규 아티

스트의 홀로그림>, <HOT> 등의 책과 ‘밥장의 에피파니’(blog.naver.com/jbob70)라

는 블로그를 통해 팬들과 만나고 있다. 그림으로 먹고 사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새로운 상상력을 위해 올해 말 뉴욕으로 날아가 달콤한 꼬물꼬물 바이러

스를 세계에 전파할 예정이다.

오전 8시, 신나는 하루가 시작되다

그의 아침이 변했다. 요즘 눈 뜨자마자 그가 하는 생각은 이렇단다.
‘오늘은 어떤 재미난 일이 벌어질까?’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는 사람들의 전화가 거의 오전에 걸려오기 때문에 밥장 씨는

적어도 오전 여덟 시에는 무조건 깨어있는 편이다. 그는 창 밖으로 멀리 펼쳐진 북한

산 자락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어머니와 둘이 아침드라마를 보며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친 밥장 씨가 작업실로 출근하는 시간은 단 10초. 물론 프리랜서인 그에게

‘출근’이란 의미는 색다르다. 침실과 작업실 사이의 3미터 남짓한 거리가 바로 그의

출근길.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는 관용 표현이 그에게만은 딱 들어맞는 셈이다.
이미 10년이나 회사생활을 해봤던 그로선 현재의 자유로운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프리랜서 생활의 가장 큰 장점으로 그가 꼽는 것은 '내가 내 시간

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 자유가 잠을 더 잘 수 있고, 아침드라마를 볼 수

있고, 자기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는 것만을 뜻하진 않으리라. 오히려 그는 여느 직

장인보다도 시간 관리에 철저하다. 그의 PC에 저장되어 있는 날짜별 일정표가 그가

오늘 어떤 작업을 하고 해야 하는지, 예정된 일정이 무엇인지 비서처럼 알려준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상상디자인 카툰 그리기, 클래지콰이 호란의 북칼럼 책에 들어

갈 일러스트 작업, 세상에 하나 뿐인 상품을 만드는 온리원 프로젝트에 제출할 작품

그리기, 각종 전시 준비…. 일일이 나열하는 것조차 숨찰 정도지만 이러한 작업 하나

하나는 그에게 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모험과도 같다. 하루의 일정을 확

인하고 펜을 잡는 그의 얼굴엔 어느새 신나는 미소가 떠오른다.

오후 1시, 그림으로 만나는 새로운 세상 그리고 사람

전화벨이 울린다. 무심코 작업에 열중하던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전화기를 든다.
"MBC입니다. 저번에 밥장 씨 방송, 너무 반응이 좋아서요. 오늘 추가 촬영을 하러 가

도 괜찮을까요?"
지난 주, 그를 취재했던 MBC 싱싱뉴스 촬영팀이다. 빡빡한 작업 일정 중에 들어오는

인터뷰 요청에 귀찮을 법 한데도 그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다.
"네, 물론이죠. 제 작업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오늘은 어디에 갈까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다 고된 촬영까지 감수해야 하지만 그에게 인터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재미있는 시간이다. 때로, 좋은 사람들을 만

나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심지어 자신조차도 - 예상하지 못했다. 미술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그림 쪽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의 그림을 좋아해주고

의기를 북돋워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정도일까?
어제는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의 전시회가 끝났다. 절친한 선배인 스폰지하우스의

조성규 대표와의 인연으로 작업한 독립영화 ‘검은 땅의 소녀와’의 포스터 작품,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한 대작 ‘love island’ 등 그의 손을 떠난 정든 작품들이 관객과

만났다. 전시장에서 자신의 그림을 보는 관객들을 구경하는 것도 밥장 씨에겐 크나큰

즐거움 중의 하나. 그의 그림 전시회 풍경은 다른 전시회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0.3mm의 가는 펜촉으로 세밀하게 표현된 그의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그림을 ‘본다’기

보다는 ‘읽는’자세가 되기 마련이다.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정글인 듯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착한 눈의 키다리 골렘과 인어공주 사이렌, 브로콜리 천사들

이 노니는 환상의 세계…. 어떤 냉정한 관객도 그의 그림 앞에 선 순간만큼은 그림 너

머의 상상의 섬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저녁 7시, 블로그로 세상과 접촉하다

분주한 하루는 또 이렇게 저물어간다. 어둑어둑한 창 밖으로 북한산의 능선이 희미해

진다. 그의 작업대 위에는 현재 그리고 있는 펜화, <각설탕 천사들의 연대기>가 펼쳐

져 있다. 흰 종이 위에 붉은색 로트링 펜으로 그려나간 그림 속에선 사람이 아무도 없

는 카페에서 황금비율의 커피를 내리고 딸기초코케잌을 만드는 각설탕천사들의 활약

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의 상상이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매일 1개

이상 블로그 포스팅하기’라는 원칙을 세운 그는 일단 현재까지 작업한 것을 스캔 받

아 블로그에 올려놓는다.
"오로지 세상을 달달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강림한 천사들의 이야기다. 수호천사들이

각설탕 천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끔 부지런히 커피를 볶고 에스프레소를 짜낸다.

그들의 수다가 길어질수록 그림도 함께 커지겠지."
혼자 일하는 밥장 씨에게 블로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상사이자 의견을 함께 주고 받

을 수 있는 동료, 힘을 얻을 수 있는 응원군이다. 그가 올린 게시물 아래에는 기다렸

다는 듯 수많은 상사들과 동료들과 응원군들이 댓글을 단다.

‘각설탕 천사의 활약이 궁금해요’, ‘빨간 각설탕이 섹시미까지 갖춰버렸네요.’
그의 블로그 이웃은 이미 수천 명에 이른다. 방문자들이 남긴 글을 하나하나 읽고

답글을 쓰는 시간이 그에겐 하루 중 가장 기쁜 시간이다.
날개 달린 각설탕 천사는 밥장 씨의 마스코트이다. 0.3mm 로트링 펜으로 꼬물꼬물

그려나간 그의 그림들이 곳곳으로 뻗어나가 온 세상을 달콤하게 만들어주기를 그는

상상한다. 그래서일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그리고 가슴 설레는 매일을

살 수 있어 행복한 밥장 씨에게서는 달달한 각설탕의 맛과 향이 난다.

Fin.

에디터 홍유진_ 사진 박영현

by 트래블러 2009. 8. 7. 14:06


열우물 길에희망의 색을 입히다

- 2007년 10월 13일 ,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야트막한 산의 능선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낮은 집들이 옹송그리고 모여 앉은 곳. 이 십정동에 향긋한 문화 나눔의 현장이 포착되었다는 제보가 입수됐다. 숨은 문화 나눔의 향기를 좇아 향기추적팀이 달려갔다.

am 11:13 불량배 아파트에 둘러싸인 조그만 동네?

십정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동네다. 그래도 명색이 광역시인 인천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네의 정경은 남루하다. 오랜 기간 주거환경 개선 사업 들먹임에 매년 귀를 기울여 보지만 이미 십정동 주민들은 몸도 마음도 지친지 오래다. 선거철마다 공론이 들끓다가도 당선만 되면 모른 척하는 식으로 10여년을 끌었던 재개발이 올초 확정됐고 동네에는 빈집이 더욱 늘었다.
게다가 동네 어디에서건 시야를 가로막는 아파트들에 이 키 작은 동네는 꼭 덩치 큰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이 되었다. 주거환경개선 지구 지정이 결정되지도 않은 시점에 서 고층아파트들이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동네를 포근히 감싸주었던 함봉산의 풍경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셈이다..

pm 1:40 버림받은 동네, 그래서 더 애틋한 -

6,70년대 근처에 공단이 생김과 동시에 기하급수적으로 주거민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네가 바로 이 곳 십정동이다. 울퉁불퉁한 골목과 다소 엉성해 보이는 가옥들 또한 과거 주민들의 손에 하나하나 희망으로 세워졌던 것이리라.
십정동, 열 개의 우물이 숨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위로, 아래로 꾸불꾸불하게 이어진 좁은 골목들을 따라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어디쯤 향기로운 우물 하나가 길 잃은 나그네를 맞아줄 법도 하다. 그러나 수십 년간 동네 주민들의 지친 발걸음을 견뎌냈을 골목길의 시멘트는 하나 같이 닳고 깨져 성한 곳이 없다. 십정동에서 20년을 살았다는 강숙자 할머니 또한 '동네에 정은 많이 들었지만 이젠 얼른 보상을 받고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사실, 가까운 장래에 아파트촌으로 변모할 동네의 운명을 받아들인 십정동의 많은 주민들은 이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조만간 이주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부서진 간판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무너진 시멘트 계단은 일어설 줄 몰랐다. 거대한 기중기와 포트레인 앞에 조각날 동네는 체념한 채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향기추적팀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대체 이런 동네에서 누가, 어떤 문화나눔을 펼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할머니, 이 벽화들은 다 누가 그린 거예요?”
“이거? 몇 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구청에서 그려주는지 어디서 그려주는지 난 잘 몰러. 오늘도 저기 아래에서 채 씨네 할머니 집 벽에다 그림을 그리던데?”

pm2:37 페인트붓을 잡은 천사들을 만나다
십정동의 중앙을 가르는 안성길로 나오니 어여쁜 벽화가 그려진 집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얼기설기 세워놓은 울타리를 따라 오색 빛의 나팔꽃이 그 자태를 뽐내고 빛 고운 코스모스와 잠자리가 회벽 안에서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양떼가 뛰노는 목장 벽화 곁에서 담소를 나누시는 두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들 품에서 오후의 한가로움에 마냥 젖어있던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보더니 무섭게 짖어댄다. 할머니 말로는 어디서 다쳤는지 만신창이가 된 것을 데려다 키웠는데 사람을 많이 경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할머니, 이 벽화들은 다 누가 그린 거예요?”

“이거? 몇 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구청에서 그려주는지 어디서 그려주는지 난 잘 몰러. 오늘도 저기 아래에서 채 씨네 할머니 집 벽에다 그림을 그리던데?”
할머니가 가르쳐 준 쪽으로 우리는 당장 방향을 틀었다. 한 집 건너 하나씩, 화사하게 그려진 벽화가 길을 안내하는 듯했는데 머지않아 우리는 비로소 온 몸에 페인트를 묻힌 채 벽화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천사의 무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골목에 향기로운 삶의 색깔을 입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나지막한 담벼락마다 많은 사람들의 부지런한 붓질로 벌써 거지반의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날 향기추적팀이 발견한 향기의 진원지는 '인천 희망 그리기', 한 포털의 동호회를 기반으로 하는 벽화 그리기 봉사단체다. 이들이 5년 째 진행하고 있는 열우물길 프로젝트는 매년 조금씩 무채색의 십정동에 희망의 빛깔을 입혀왔다. 이 날 벽화 그리기도 십여 명의 자원봉사들과 함께 아침 10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인천 희망그리기' 의 운영자, 이진우 씨가 그리는 해바라기는 오후 태양빛을 받아 작열하듯 빛났다. 지난 2002년, 십정동 주민이기도 한 이진우 씨가 동네의 환경을 정비하고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취지로 지역 동료 화가들과 벽화를 그린 것이 시작이었다. 지난 5년간 수백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프로젝트에 함께 하면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십정동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곤 한다.
열우물길 프로젝트는 벽화 제작뿐만 아니라 사진 전시, 지역 어린이들이 참여한 미술작품 전시 등으로 이뤄진다. 공예를 전공한 조현정 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열우물길 프로젝트에 참가해 아이들의 미술 수업을 지도해주고 벽화그리기에 동참했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과 자발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그 성취감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죠. 좋은 일도 좋은 일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무척 재미있고 보람찬 작업이었어요.”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서 아이들은 뛰놀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잠시 멈추기도 한다. 인천 희망그리기가 제안하는 나눔의 의미는 적극적으로 행복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앉아서 행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 그래서 결국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나눔이다.

짤막 인터뷰

민중미술 2세대 작가인 이진우 씨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나눔 미술을 실천해 왔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인천 희망그리기’와 ‘거리의 미술 동호회’의 운영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와의 짧은 인터뷰.

"벽화가 예뻐요. 그림체도 다양하고요."
"저희 동호회에는 미술을 전공한 회원들이 많으니까요. 각각 다른 분들이 시안을 해 오세요. 벽의 모양과 분위기에 맞게 그림을 정하죠. 그래도 대부분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많이 주려고 해요."
"5년 동안이나 이 작업을 해 오시면서 힘든 일도 많으셨을 텐데."
"왜 없었겠어요. 처음에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일을 벌이는 거냐면서 마땅치 않게 보시는 주민들이 많았어요. 재개발이 빨리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림까지 그리고 그러면 더 늦어질지도 모른다며 반대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자원봉사로 하는 일인데 주민들의 여론이 그랬다면 굉장히 힘이 빠지셨겠네요."
"말씀은 하시지 않아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삭막하던 동네가 그래도 하나씩 예쁜 그림으로 채워져 나가니까 그걸 신기해하시고 좋게 보시는 분들도 점점 늘더라고요."
"올해 십정동이 환경개선지구 결정이 났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수년 내로 동네가 사라진다는 얘긴데, 허무하지 않아요?"
"이 동네, 이 골목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사는 한은 계속 해나갈 거예요. 재개발이 결정됐다고 해서 사람들이 단숨에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 분들이 사시는 날까지는 그래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십정동을 사랑하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시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보람은 뭔가요?”
"저는 이게 봉사라고 생각 안 해요. 나눔이라고 생각하죠.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거라고요. 이 일로 주민 여러분들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고 참여해주신 자원봉사자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하잖아요. 그럼 된 것 아닌가요?"
(인천희망그리기 http://cafe.daum.net/10umulgil)

글_ 홍유진
사진_ 서희연, 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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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러 2009. 8. 7. 14:04

100년의 커피를 만드는 남자

왈츠앤닥터만 커피박물관 박종만 관장

쉼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북한강. 수백 년을 흘렀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흐를 거대한 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그윽한 커피 향이 나를 휩싸고 돈다. 너무도 향기롭고 황홀하여, 100년이 가도 사라지지 않을 그런 향기가….

클래식과 원두 향이 어우러진 그곳에 가다

박종만 관장을 만나기 위해 커피 박물관을 찾은 날은 매주 클래식 음악회가 열리는 금요일이었다. 평소엔 티셔츠 차림이다가도 이날만큼은 멋스럽게 턱시도를 차려 입는다는 박관장은 고풍스러운 박물관의 정경과 무척 잘 어울렸다.

경기도 남양주,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마주보고 서 있는 왈츠앤닥터만 커피박물관은 마치 커피로 지어진 성과 같은 모양새다. 작고 소박하지만 커피의 역사와 종류, 그리고 향과 맛까지 커피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잘 꾸며놓았다.

“벌써 169회를 맞는 금요음악회에요.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뿐인 영 아티스트 초청 연주회 날인데 날을 잘 잡으셨네요. 커피와 클래식,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뒤풀이로 와인 파티도 한답니다. 금요일 밤을 장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죠.”

커피 관련 유물을 진열해 놓은 전시실이 금요일 오후 6시만 되면 작은 콘서트 홀로 바뀐다. 오래된 물건을 보여주는 단순한 박물관에서 벗어나 음악이 있고 커피가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 변신하는 것이다. 100년 가는 음악회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이렇게 작은 홀에서도 클래식 대가들이 찾아와 연주할 수 있는 문화를 꿈꾼다고 했다.

"나이 들면서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끝없는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답은 간단해요. 첫째,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두 번째는 돈벌이가 되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 인생은 커피로 인해 무척 행복하고 풍요로워졌습니다. 이 박물관은 그런 커피를 위한 제 보답입니다. 제 인생의 보람이기도 하지요."

평범한 사업가, 커피와 기적처럼 만나다

우리나라의 커피소비량은 세계 11위로 국민 한 사람당 일 년에 347잔을 마신다고 한다.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음료가 커피일 정도로 커피는 이미 우리 일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호품이 되었다. 그런 커피가 유독 박종만 관장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왜일까?

"사실, 저도 똑같았습니다. 습관처럼 매일 마시긴 했지만 특별히 커피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그랬던 커피가 제 인생을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20년 전, 당시 인테리어 사업체를 운영하던 박 관장이 출장길에 우연히 방문한 일본 커피공장. 그곳에서 그는 마치 별천지를 발견한 듯 했다. 문을 여는 순간, 이곳저곳에서 커피콩을 볶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고, 훅 하고 내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연기에 가슴이 덥혀졌다. 빨갛게 익은 커피 열매의 색에 반하고 세포 하나까지 일깨우는 듯한 커피의 향과 맛에 매혹된 나머지 그 후로 그는 커피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한참을 고민한 후에 그 커피를 한국 사람에게도 마시게 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인테리어 사업은 어떻게 했냐고요? 깨끗하게 정리했죠."

당시 우리나라는 마담이 곁에 앉아 따라주는 소위 '다방 커피'문화가 대세인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왈츠 코리아 프랜차이즈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원두커피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한 때 체인점이 70여개까지 늘 정도로 번성했다.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커피를 마셨는지 몰라요. 공부도 많이 했죠.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어요. 한번은 블루마운틴 원두가 이렇게 비싼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자마이카까지 다녀오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커피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져 지금도 그는 매년 커피의 원류를 찾아 아프리카와 아랍 등지의 커피 원산지를 탐험하고 있다.

다방에서 문화와 예술과 낭만을 논하다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가 무려 100년이 넘는다는 것이다. 1896년 고종황제가 최초의 커피 애호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커피 관련 유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박종만 관장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럽에 가면 100년 역사를 가진 식당, 200년이나 한 자리에 있었던 책방 등 참 흔하게 볼 수 있어요. 하물며 집에서 쓰는 침대마저도 백년 된 게 많아요. 3대조 할아버지가 쓰시던 거 그대로 물려받는다고요. 그런 것에 대한 부러움이 참 커요. 우리에게는 왜 그런 게 없을까……."

그는 올해 하반기 '다방 展'을 열 예정이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산실, '다방'의 본래적 의미를 되짚어보자는 취지다.

"한번 생각해보자고요. 가난한 문인들은 집에 전화도 없었어요. 대충 점심 지나고 보자, 하고 다방에서 보기로 한단 말이죠. 그런데 사정이 생겨 상대방이 못 오게 되면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거죠. 그 시간에 뭐하겠어요? 낙서하고 그림 그리고……. 거기서 예술이 시작된 겁니다. 그게 커피입니다."

천재 시인 이상도 '제비'라는 다방을 직접 운영했을 정도로 서울 명동은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문화적 진원지였다. 그러나 현재, 돌체 다방, 은하수 다방, 문예 싸롱 등 이름난 명물 다방이 있던 자리에는 주물로 만든 표지만이 그 흔적을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의식을 하던, 하지 않던 커피는 우리의 삶과 같은 속도로 늘 함께 하고 있다. 커피와 역사, 커피와 연애, 커피와 문학……. 아주 오래전부터 커피는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심각한, 그러나 아름다운 중독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박종만 관장은 오늘도 커피를 마시며 새로운 모험을 계획하고 있다.

"100년 전부터 커피를 마셔왔듯, 100년 후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커피를 마실 겁니다. 그 때에는 우리 땅에서 재배된 커피도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기다려 보세요. 아주 기가 막힌 커피가 될 테니까요."

글 홍유진_ 사진 박영현

by 트래블러 2009. 8. 7. 14:03